# 163
회귀자 사용설명서 163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4)
“굳이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글세…. 네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만약에 내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더라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않기는….’
이미 뭔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만약에 일을 미적지근하게 끝내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단순히 윗선에 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한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그녀가 작은바위의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장담컨대 이 장소에 단 1%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 해도 그다지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
“송 씨는 이곳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고… 보시다시피 이 장소는 전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으니까. 내가 말했잖아. 캐슬락의 영주도 이런 장소가 있을지 예상하지 못할 거라고.”
“어떻게 자신의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를 수가 있죠?”
“서울시장이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아? 아마 캐슬락의 영주성 내에서도 이곳에 합류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걸. 알면서도 쉬쉬하는 사람도 있거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가 캐슬락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어쩌면 공화국과 가까운 접경지대일지도 모르지. 아주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는.”
“어째서….”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얽혀 있겠지만 유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알아놔야 하는 것도 간단해. 도려내야 할 부분이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실도 엄연히 사회의 일부. 그리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 역시 사회의 구성원들이라는 거지.”
“사회의 일부 말입니까.”
“범죄가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라는 건 없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천천히 이해하게 될 거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작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여전히 인상이 찌푸려져 있다.
말투 자체도 조금 차갑고 화를 참고 있는 듯했다.
물론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환경과 손을 쓸 수가 없는 자기 자신.
이제야 슬슬 현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마주해왔던 세상과는 180도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줘도 될 것 같아, 은근 슬쩍 그녀에게 몸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없는 게 없는 것 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전부 다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정도야 뻔할 테니까요.”
“그 말은 맞아. 돈만 있으면 전부다 구할 수 있지. 노예는 물론이고 마약이나 이성. 심지어는 경험도 살 수 있겠지.”
“경험 말입니까?”
“그래. 경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유카는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꽤나 오래 썩었다면 경험이 없을 리가 없다. 아마 첫 경험은 튜토리얼 던전일 것이다. 식량이 한정적인 그곳에서는 지켜야 하기 위해 창을 들어야 할 때가 많으니까.
우리 파티 역시 박덕구를 제외한 모두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정하얀도 마찬가지고, 김현성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튜토리얼 던전에서 몇 명을 골로 보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하지 않은 이들.
빤히 조혜진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왔다.
“있습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나 보네.”
“좋은 기억이라고 한다면… 이상하겠죠.”
“네 말이 맞아. 좋은 기억은 아니지. 그렇지만 그걸 좋은 기억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나타나거든…. 우리 같은 자유민들이야 다들 어느 정도 경험을 하기는 하지만 평범한 귀족들은 그런 경험을 하기가 어렵잖아? 특히나 제국민 사이에서의 살인은 엄연히 불법이니까. 귀족은 평민을 처벌할 수는 있어도 죄 없이 죽일 수는 없어. 가끔 태어나는 미친 인간들이 자기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들리는 게 어디일 것 같아? 나는 이곳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데.”
“그럴 리가….”
미심쩍어 하는 조혜진을 바라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
방금 전 광경을 보고도 아직까지 인간의 양심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는 안내인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조혜진이 무슨 짓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면 알게 돼.’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물어보면 무엇이든 대답해 주는 네비게이터가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길 좀 묻겠습니다.”
“편하게 말씀 하시지요.”
“이 검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고객님. 몬스터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길만 가르쳐 주시면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아, 그것보다 먼저 커다란 몬스터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안내해 주시죠.”
“직접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설명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이쪽 길을 쭉 따라가셔서 오른쪽으로 계속 향하시면 3번 출구가 나올 겁니다. 그쪽으로 쭈욱 걸어가시면 원형 경기장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입장료는 별도로….”
“네. 알겠습니다. 이만 볼일 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녀석이 사라지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의 조혜진이 시야에 보였다.
“봤지?”
“…….”
“구할 수 없는 게 없다니까. 여기서는 경험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어. 불법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지.”
“…….”
“혹시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이나 해줬으면 하는 일, 머릿속에서만 그리고 있는 일이 있었어? 돈은 이쪽에서 내줄 테니 한번 찾아보는 건 어때?”
“당신.”
“농담이야.”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마 이곳에서 전부 실현시켜 줄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방금 전 안내인이 말했던 대로 원형경기장이 시야에 비쳤다.
내 생각보다 더 규모가 크다.
마치 예전의 콜로세움을 지하에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보였고 저마다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이쪽 역시 준비해 온 골드를 내밀자 안내원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VIP로.”
“추가 요금이 발생합니다.”
“상관없습니다.”
“네.”
“아직 경기는 시작하기 전입니까?”
“잠깐 쉬는 시간입니다. 다음 경기는 5분 후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네.”
안내인이 지나간 이후에는 곧바로 조혜진이 입을 열어오기 시작.
꽤나 많은 관객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궁금한 모양인 것 같았다.
“하루카 님. 무슨 경기를….”
“글세…. 나도 여기 온 게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형 몬스터가 나오는 경기라면 무슨 경기일지 뻔할 것 같은데.”
“이곳에서 사냥하는 모습이라고 보여준다는 겁니까?”
“그렇게 미적지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기에 모인 사람이 고작 모험가가 몬스터 때려잡는 거 보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 같아?”
“그럼….”
“보면 알 거야.”
말을 마치자 곧바로 함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체면이 있기 때문인지 대놓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조용히 박수를 보내는 사람부터 응원을 보내는 사람까지 형태가 꽤나 다양하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아까 봤던 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니겠지.’
커다란 함성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경기장의 안쪽에서 육중한 몬스터가 한 마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크네.’
뭐라고 형태를 표현할 수가 없는 모습.
머리는 도마뱀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리가 여섯 개가 달려 있는 외관이었다.
입가에서는 질질 침을 흘리고 있었고 연신 괴성을 질러대는 모습에는 귀가 시끄러울 정도. 조용히 있던 관객 역시 그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그 반대쪽에서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아마 저 괴물을 상대할 인간들일 것이다.
숫자는 30여 명.
기본적인 장비도 보급되지 않은 채로 괴물을 마주하게 될 일반인들이었다.
키가 작은 이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상품 가치가 없는 이종족도 섞여 있는 모양.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반영한 모양인지 미형의 엘프도 눈에 띄었다.
상태창으로 그들을 한 번씩 훑어 본 것은 당연지사.
당연하지만 능력치 자체가 형편없다. 중간 중간에 그나마 싸움을 한 흔적이 있는 이들이 눈에 띄기야 했지만 당연히 저런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저 정도의 괴물은 아주 잘 훈련된 자유민들이 파티를 이뤄 잡을 수 있을 정도라 생각했다.
제대로 된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이들이 저런 괴물을 상대로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몬스터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끊어진 이후 괴물이 30명의 인간들을 향해 쇄도한 것은 순식간.
시작하기 전부터 전투 의지를 상실한 인간 측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경기장을 헤집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쏟아진다.
“버텨!”
“조금 더 버티라고!”
‘내기까지 하고 있는 건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인간들을 으깨버리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
연신 피가 튀어나오지만 저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 장소에 없다.
“키에에에에엑!”
“살, 살려줘!”
“살려줘! 아아아아악!”
본인들이 나왔던 문을 두드리는 사람부터 함께 나온 이를 밀치고 도망가는 사람들까지.
나름의 처절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저들의 다큐멘터리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이 저 광경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엔터테이먼트로 보고 있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저 장면이 다큐멘터리로 보이는 걸로 보니 나도 아직 썩지는 않은 모양.
벌써 반 이상의 인간들이 죽어나간 것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찜찜해졌다.
‘쯧.’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 아마 조혜진은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방금 전 노예 시장에서 본 모습에서도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돌리니 눈에 보이는 모습은 가관.
‘너무 강했나.’
가면 안에서 보이고 있는 조혜진의 두 눈에 담긴 것은 분노.
입술을 까득 깨물고 있는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심지어 꽉 쥔 주먹에서도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
“돌발 행동은….”
“알고 있습니다.”
“하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말은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움직이면 안 된다’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당장에라도 저 경기장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해진 것은 당연지사.
손을 꽉 잡으니 그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비명이 들려오는 중. 이제 경기장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은 겨우 다섯 명이 전부다.
“살,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누군가… 누군가 도와주세요!”
“죽기 싫어… 흐어엉….”
“죽고 싶지 않아.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목이 터져라 외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광기를 보내고 있는 관객들의 함성에 묻히고 만다.
그렇지만 조혜진의 귓가에는 똑똑히 들리고 있는 모양.
‘개… 시바….’
이곳에서 그녀가 뛰쳐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자 애가 탈 지경.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쪽이 처리해 주기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여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꽉 잡았지만 캐슬락의 고집불통이라는 원칙주의자의 눈에는 이미 내 주변 환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자극이 너무 심했나.’
“미친 짓 하지 마.”
“알고 있습니다.”
“뛰어들면 나도 죽어.”
“…….”
“살리고 싶어?”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옳다.
“머리를 잘 굴려봐.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입에서 정답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
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봤고….
조금 늦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도출해 낸 결론을 입으로 내뱉었다.
“제가….”
“…….”
“사도록 하겠습니다.”
“정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