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68화 (167/1,590)

# 168

회귀자 사용설명서 168화

몬스터 웨이브(4)

‘아무리 비벼봐야… 넌 최전방이야 정욱아….’

녀석의 생각이 이해가 가기는 간다. 당연히 영주성으로 편입된 채로 명령을 받으면서 싸우는 것과 자유민들의 부대를 운용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녀석은 자신의 길드를 온전히 유지하고 싶어 한다. 아니, 조금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건 이미 생존의 문제나 다름없다.

굳이 백작의 말에 긍정한 것 역시 이런 배경이 깔려 있을 것이다. 자신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면 작은바위에 적절한 자리를 넘겨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

아마도….

‘후방 배치를 원하고 있겠지.’

어차피 캐슬락 백작은 마음을 먹었다. 캐슬락 영지 전체를 전시체제로 돌리고 계엄령을 선포해 자유민이 도시를 도망치는 것을 봉쇄했다.

이미 백작이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휘체계의 꼭대기에 선다고 발언해 봤자 괜한 위화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지만 명예주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자유민으로서도 그럴듯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교황청에서 받은 명예주교라는 직위로 이런 감투를 쓰기에 충분하다.

이러나저러나 작은바위에서 나쁠 건 없다.

작은바위의 방패가 될 사람으로 날 선택한 건 훌륭한 선택이지만 내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하책 중에 하책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이쪽이 자신을 아끼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지 필사적으로 동조하는 꼴은 꽤나 가관.

자연스럽게 다른 길드 몇몇도 그대로 녀석의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길드와 클랜이 독립된 채로 운영한다고는 하나… 어차피 지휘체계는 필요합니다. 백작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이기영 님께서 캐슬락 출신이 아니기는 하나 같은 신성 제국민이 아닙니까.”

“흐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에서 입을 열어오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그게 조금 더….”

“차라리 이기영 명예주교님께서 지휘해 주시는 게….”

몇몇 길드가 동조하자 혜택을 받고 싶은 기존 길드와 클랜 역시 지나치게 동조하기 시작.

뭔가 꿀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여론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것은 순식간.

이때다 싶어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모습이 가관이다. 마치 잘해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리라.

‘백작도 괜찮은 생각을 했네.’

자유민을 강압적으로 다루는 것은 당장이야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후를 생각하면 현명한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은 애초에 당연한 수순. 자신과 자유민들을 연결시켜 줄 연결점으로 날 선택한 것은 나에게도 괜찮고 영주에게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합리적이지.’

캐슬락 내에 있는 자유민들 중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마를린 영애 때문인지, 아니면 캐슬락에 진심을 다하려는 모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백작이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왕성 내에 퍼져 있는 소문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명예주고 이기영은 그 평가가 꽤나 좋으니까.

김현성 역시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우리 회귀자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모양.

동분서주 뛰어다녀야 할 녀석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으로 병력을 컨트롤해 줄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물론 나한테도 좋은 이야기고….’

“저는… 조금 부담스럽군요.”

“아닙니다. 이기영 님. 제가 전력으로 서포트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송정욱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큼.”

어차피 대규모 병력지휘라는 걸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참.

물론 이론상으로는 공부를 하기야 했지만 실전은 이론과는 또 다르니까.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나 다름이 없긴 하지만 겸손이란 건 한국인의 미덕.

부족하다는 걸 전제로 깔고 슬쩍 감투를 쓴다고 입을 열자 곧바로 내 쪽으로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좋네.’

“정 그렇다면… 캐슬락 영주성과 함께 부대편성과 운영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캐슬락 영주님.”

“잘 부탁드립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이제야 조금 분위기가 안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벌써부터 시선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이쪽에 할 말이 무척 많은 모양. 부대 편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게 당연하다.

‘누가 제1성벽으로 가고 싶겠어.’

이미 그 자리에 들어갈 주인공이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고민을 해봐야 하는 자리.

브리핑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제1성벽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물론 몬스터 웨이브가 정말로 일어날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눈앞에 있는 김현성은 그런 이들의 의문을 꽤나 훌륭하게 해결해 주고 있었다.

“최근에 사냥을 다녀오신 분들은 대부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캐슬락 앞에 있는 숲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생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확실히… 느낀 적이 있기는 있습니다. 늪에서 살고 있는 바실리스크가 갑자기 숲 쪽에 모습을 드러낸다든가 하는 일이 잦아졌죠. 숲 바깥쪽에서도 고등 몬스터들이 출연하기도 하고요. 저희 클랜에서도 일단은 신입 길드원들의 사냥을 자제시키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수십 년 전 캐슬락에 들이 닥쳤던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인은?”

“아마도 개체수의 포화, 혹은 기존 몬스터를 위협할 만한 새로운 몬스터가 서식지를 옮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죠.”

“그렇지만 겨우 그걸로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겁니까? 전시체제나 계엄령은 조금 더 일이 확실해진 이후에도….”

“그때면 이미 늦습니다. 알고 대비하는 것과 모르고 대비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그래프를 보시면….”

“끄응… 그렇군요.”

대충 이런 종류의 대화들을 주고받고 있다는 거다.

굳이 내가 끼어들 타이밍은 아니긴 하다. 우리 측에서 제시한 자료의 정보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일단 모든 증거가 확실하게 뭔가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었으니까.

의구심을 품은 몇몇은 갑작스러운 전시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사실 이쪽도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김현성이 가져온 정황들을 보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아니, 굳이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김현성의 역사에서 몬스터 웨이브는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유가 조금 명확하지는 않은 느낌. 어째서 웨이브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김현성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별로 상관없나.’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뻔할 뻔자.

들어오는 몬스터를 잡는다. 그게 전부다. 나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브리핑이 끝난 이후에도 여기저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이쪽도 슬그머니 발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하다. 제대로 뭘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중구난방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그럼 지휘관으로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각각의 길드와 클랜의 부대편성과 주요 병과에 대해서 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 기술 하셔야 합리적인 배치가 가능하니 숨기고 있는 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각 길드에서 보유하고 있는 보급물자는 통합. 저희 파란에서 가져온 물건들 역시 통합해서 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린델 내에서도 지원이 올 겁니다. 린델에서 도착한 물자 역시 통합 운용할 생각이니 따라주셨으면 좋겠군요. 물자 관리는 캐슬락의 상인 길드, 캐슬락 상인 조합에 맡길 생각입니다. 일이 끝난 이후에 남은 보급품들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분배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각 길드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희 파란에서 무료로 지급할 보급품의 목록입니다. 몇몇 중소형 길드가 낼 수 있는 전체 양보다 많을 겁니다. 길드 각각의 상황을 모두 고려해 주면 좋겠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감투를 쓴 게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참작해 드리겠지만 따르지 않으실 생각이라면 차라리 캐슬락 영지의 휘하로 들어가서 함께 싸우는 게 좋으실 겁니다.”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말 안 듣는 멍청이들을 컨트롤하는 것의 첫 번째는 일단 밥줄을 쥐어 잡는 것.

보급품만큼은 내 쪽에서 사수하는 게 옳다.

작은 바위의 송정욱 녀석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입을 여는 중.

“저 역시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말에 백번 동감합니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충성스러워진 느낌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길드 하우스에 남기는 것은 최소한의 병력, 모든 길드는 당분간 성벽 안쪽에 있는 막사를 이용하고 성벽 위에서 상시 대기하는 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전체 훈련은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겁니다. 붉은용병에서 오신 분들이 직접 훈련을 맡아주실 예정입니다.”

“아. 붉은용병 분들도 오시는 겁니까?”

조금은 희망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린델과 지속적으로 교신을 주고받는 상황입니다. 아마 타이밍이 맞는다면 차희라 님도 함께 싸워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오오오오.”

눈에 띄게 좋아하는 얼굴.

녀석들의 불안감을 날려버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붉은용병이 있어서 다행이다.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희라의 후광 때문인지 나를 조금 더 우러러 보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준비된 지휘관이라는 사실 역시 저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는 이유였다.

김현성이 캐슬락으로 가자고 했을 때부터 정리된 계획을 한마디씩 내뱉는 것에 불과하지만 불안한 상황에서의 지휘관의 자신감은 저런 우민들에게 확신을 준다.

‘잘만 따라오면 꿀 빨게 해줄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이기영 님이 캐슬락에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와중에도 송정욱은 이쪽을 향해 계속해서 알랑방귀를 끼고 있는 중.

어지간히 후방 배치를 받고 싶은 모양인 것 같았다.

“캐슬락 상인 조합은 오늘 안으로 모든 보급품을 받은 후 분류를 시작하도록 합니다. 다른 길드 여러분들 역시 무장하고 성벽 막사로 거주지를 옮기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말입니까?”

“네. 오늘 안입니다.”

“이거 바쁘게 움직여야겠군요.”

“혹시 모를 상황이 터진다면 보고는 제게 직접 해주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 어떤 막사로 가면 되는 겁니까?”

“다녀오시면 모든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정리할 시간은 필요할 테니 이 정도의 여유를 주는 것이 옳다.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것처럼 일 처리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들 역시 천천히 변하기 시작.

어쩌면 정말로 내가 지휘권을 잡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거고.’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로서 타 도시 사제들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용병여왕의 정부이니 붉은용병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실리아에 있는 요조라 길드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배경만으로도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제법 유능한 지휘관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캐슬락 백작님과 협의 하에 부대편성을 마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죠. 신변 정리는 최대한 빨리 끝내주셔야 합니다. 캐슬락 백작님의 말대로 지금은 전시체제니까요. 저 역시 괜한 분란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통제에만 잘 따라주신다면 여러분들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을 겁니다.”

“아….”

“당장 앞만 생각하지 말고 웨이브가 끝난 이후에 일도 한 번쯤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쪽이 먼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훌륭한 제군들이 시야에 비쳤다.

밖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의 모습은 가관.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것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1등 공신 송정욱이었다.

“이기영 님, 몇 시까지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사실 오후까지 다들 집결했으면 좋겠지만….”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렇다면 조금이지만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아뇨. 너무 융통성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역시 이기영 님이십니다. 처음에 캐슬락에 오셨을 때부터 캐슬락에 빛이 되실 분이라는 걸 느꼈지 뭡니까. 하하하하.”

꼬리를 흔드는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쪽에 한마디씩 던진다거나 입을 열어오고 있다.

이 녀석들을 떨쳐내는 것도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

내 몸에 달려 있는 위치추적기에 대해 정하얀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늦어졌다.

‘병력 편성도 해야 되는데….’

이건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나보다 능력 있는 똑똑한 조혜진 양께서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혜진 씨?”

“네. 부길드 마스터.”

“저는 잠깐 따로 볼일을 좀 보고 오겠습니다. 저도 정리할 게 있어서… 병력 편성은 혜진 씨가 알아서 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제1성벽에는 작은바위와 송정욱, 나머지는 대충 가닥만 잡아주세요.”

“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정욱 입장에서는 뒤통수가 얼얼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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