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회귀자 사용설명서 170화
믿음에는 배신으로(2)
“제1성벽은 작은바위가 맡아주시겠습니다.”
당황하는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나치게 일그러진 것은 물론 얼굴이 푸들푸들 떨려온다.
볼 살이 저렇게 떨릴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
재미있다면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놈에게도 재미있는 상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일터.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욕지거리를 억누르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뻔할 뻔 자.
‘분노 조절 장애 치료사 차희라.’
그 어떤 분노 조절 장애도 치료해 주는 사랑스러운 차희라가 내 옆에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전시상황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곧 법이야. 이건 린델도 마찬가지고 캐슬락도 마찬가지니까 굳이 출신을 따질 필요조차도 없는 거고,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우리 자기처럼 물렁하지 않아. 명령불복종은 곧 죽는다는 거야.’
계산한 건지 계산하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전에 밑밥을 깔아준 덕분에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별 것 아닌 1년 차인 내가 눈앞에 보이는 선배들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이유.
눈앞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남들의 눈에는 이쪽이 차희라의 권력과 무력에 빌붙은 여우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남들의 시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저들이 나를 지휘관으로 추대했다는 거고 내 옆에 차희라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분노 조절 장애뿐만이 아니라 많은 종류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차희라의 존재는 만병통치약이나 마찬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송정욱의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차희라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신당했다는 표정이네.’
어차피 저쪽과는 갈라지게 되어 있다.
기벽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애초에 굳이 끌고 가야 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녀석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느니 조혜진의 마음의 평안을 위한 제물로 바치는 게 더 낫다는 거다.
‘미안하다, 정욱아.’
“제2성벽은 거인 길드와 박하사탕 클랜이… 제3성벽은 영주성에서 맡아주시기로 했습니다. 이어서 제4성벽과 제5성벽은 캐슬락 북부 지역에 있는 클랜 연합이. 이전에 말씀 드렸던 대로 캐슬락 상인 조합은 보급을 맡아주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파란과 붉은용병을 중심으로 중앙지휘부를 마련한 이후 보고 체계를 획일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용병여왕님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진 것 같군요. 이거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긴장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실 저는 조금 더 유연한 회의 분위기를 추구합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웃으라고 던진 소리도 아니다. 굳이 농담을 하려고 한 의도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웃어야 되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활짝 피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푸핫.’
모두가 이쪽의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다.
실수하면 곧바로 제1성벽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리라.
갑작스레 송정욱을 버린 이쪽에 조금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기는 있지만 이미 그들에게 중요한 건 송정욱이 아니다.
나는 방금 녀석의 알량한 권력의 끝을 고했고 녀석은 그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득달같이 이쪽에게 눈빛을 보내오고 있는 길드 마스터들을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정도.
내가 생각한 것처럼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뭔가 혹시 건의사항이라든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성에 불만이 있으시면 심사숙고 후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 명예주교님.”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일단 편성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서쪽 지역의 성벽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아.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날카롭네.’
미리 준비해 온 대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쪽의 옆에 앉아 있던 차희라.
지루하다는 듯이 한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입을 여는 모습은 확실히 그녀답다.
“일단은 숲을 마주보고 있는 제1성벽에 조금 더 힘을 실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지, 자기? 작은바위 길드가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 역시 그런 이유고… 서쪽 성벽 같은 경우에는 만약에라도 1열이 뚫린다면 그 이후에 영주성과 이쪽이 지원해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네. 알겠습니다. 그…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게 뭐가 있겠어. 다 몰라서 묻는 건데….”
“용병여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질문 같은 것은 부담 없이 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한 만큼 여러분의 많은 의견이 도움이 될 겁니다.”
“부족한 건 아니야. 단기간 내에 이정도로 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빈틈 같은 건 없는 것 같은데… 어차피 파란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도 없었어.”
“…….”
“아마 제대로 수성전이 이뤄지지도 않았을걸. 장담할 수 있다니까. 아무런 대비 없이 몬스터들을 뒤늦게 발견한 이후에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역부족, 결국에는 캐슬락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그마저도 못해서 전멸했을 거야.”
“그, 그건….”
사실 나도 차희라의 생각에 동감하긴 한다.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누나.”
“알겠어. 알겠다고.”
이쪽을 위해서 힘써주는 건 좋지만 너무 힘을 써주는 것이 문제.
조금 분위기가 애매했기 때문에 이쯤에서 회의를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뭐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일단은 편성이 완료 됐으니 모두 자리를 잡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부사항은 각 조별로 추후 전달해 드리면 되겠고… 근무 같은 경우에는 각 길드 마스터들께서 재량껏 해주시면 됩니다. 오후에 있을 훈련은 전체가 참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다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보였다. 문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이쪽에게 잘 보이려 하는 모습들은 가관.
‘위기의식이 없네.’
사실상 긴장을 놓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몇몇 이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다는 것보다는 그 이후에 있을 이권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은 느낌.
어딜 가나 기득권이 하는 짓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이런 전쟁에서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들은 상대적으로 위험에 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
어쩌면 저들의 행동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인사를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바로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 이쪽에 말을 걸어온 것은 작은바위의 송정욱이었다.
“저. 이기영 님.”
“아. 송정욱 님.”
“저….”
“편한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작은바위 마스터.”
“혹, 혹시….”
“네.”
“제가 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네?”
“하하하. 작은바위 마스터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쪽에서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상대적으로 위험할지도 모르는 성벽을 맡아주셨으니까요.”
‘정확히는 내가 시킨 거지만.’
“아마 작은바위 길드는 영주성의 기사들이나 다른 제국민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겁니다. 지원은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드릴 예정이니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캐슬락을 지키는 데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집중하기 힘들겠지.’
기가 차는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굳이 따로 말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은 느낌.
“혹시 문제라도 있으신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기영 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작은바위 마스터의 임무와 책임이 아주 막중합니다. 부디 최선을 다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네….”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그래도 싸지.’
“아. 그리고 앞으로는 따로 궁금한 점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제 부관을 통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부관이라 하면….”
“부관!”
“네. 부길드 마스터.”
“조혜진 양입니다.”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조혜진과 입술을 곽 깨물고 있는 송정욱의 모습.
아마 자신이 팽 당한 이유가 조혜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이간질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차희라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몸을 옮기는 와중에도 주먹을 꽉 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니까.’
녀석이 팽 당하는 이유는 반쯤은 조혜진 탓이 맞다.
이쪽이 원망 당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저쪽이 당하는 게 나으니 굳이 오해를 풀어줄 이유도 없다.
지금에 와서 녀석이 뭘 뒤집으려고 노력한다고는 해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황.
녀석에게 선택권은 없다.
“앞으로 부대의 대소사는 혜진 씨가 관리해 주실 겁니다. 뭐,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도 제가 관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이 구면이신 것 같은데… 조용히 이야기 나누시면 됩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하하하. 혜진 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뒤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서로 원망하고 싸우고 있겠지 뭐.’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뻔하다. 저들의 대화보다 중요한 것은 이 빅 이벤트로 이쪽이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작전대로 계획을 실행시키는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간질이야? 자기?”
“그런 거 아니야, 누나. 그보다 와줘서 고맙네.”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 불러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은데… 안 그래도 이런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렇게 말해주니까 좋네.”
“정말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안 그럴 확률도 있으니까. 자기 얼굴 보러 왔다고 치면 돼. 오랜만에 길드에 긴장감도 심어줄 겸 왔으니까. 나쁘지 않다는 거지.”
“무슨 뜻이야?”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도 있다는 거야. 자기.”
“그럴 리가.”
“글쎄. 김현성, 걔가 가져온 정황들을 보면 거의 확실하기는 한 것 같은데… 증거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야 되나?”
“응?”
“뭐, 자기는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보통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징조는 숲의 포화나 던전의 불안정화야. 숲에 먹을 것이나 지낼 곳이 부족한 몬스터들이 바깥으로 튀어 나온다는 거지. 그렇지만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숲이 포화됐다는 정황은 없어.”
“그래?”
“근처에 다른 몬스터들을 자극할 만한 던전도 발견되지 않았고… 징후들은 있지만 원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알아듣겠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네.”
당연히 나도 의문을 품고 있었던 부분이다.
몬스터 웨이브를 실제로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차희라와는 달리 이쪽은 경험이 없어 제대로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는 있었다.
물론 나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뭔가 바빠 보이는 김현성 역시 그 이유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1회 차에서 캐슬락과 커다란 연관이 없었던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어째서 웨이브가 시작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이건 이미 확정된 일이야.’
이유야 어찌됐든 웨이브는 일어난다.
차희라의 말처럼 미적지근하게 끝나지는 않는다는 거다.
지금부터 일어날 사실에 대해서 입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그때였다.
“키에에에에엑.”
‘뭐야?’
희미하게 들려온 것은 몬스터의 울음소리. 도시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였다.
“방금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