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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72화 (171/1,590)

# 172

회귀자 사용설명서 172화

믿음에는 배신으로(4)

이 광활한 광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늘을 꽉 채운 거대한 불꽃 덩어리들과 화살은 예전 전쟁 영화나 만화에서나 봤던 장면.

그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은 계속해서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존재다.

“쿠워어어어어어어!”

‘뭐가 저렇게 많아.’

내가 사냥을 많이 나간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처음 보는 종류도 눈에 띈다.

인간보다 약 5배는 더 큰 중형몬스터부터 그런 몬스터의 발에 밝히고 있는 소형 몬스터까지.

목적과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성벽을 넘겠다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있는 괴물들은 확실히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녀석들이 성벽을 앞에 두고 있었을 때 고향 앵무새가 된 우리의 병사들이 쏘아 올린 마법과 화살이 내리 꽂히기 시작.

순간적이지만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콰지지직!

콰드드드드득!

폭음이 들리며 땅에 파편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소형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인다.

중형 몬스터의 온 몸에 화살이 박혀 쓰러지는 것은 물론, 한 발 한 발에 마력이 담겨져 있는 화살들은 소형 몬스터의 머리를 착실하게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몰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상상 이상. 꾸역꾸역 숲 쪽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걸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가장 깊은 숲에 있었던 몬스터들도 튀어나온 것이 분명.

숲이 워낙 커다란 만큼 그곳에 있는 모든 몬스터가 모였으니 그 숫자가 엄청날 만도 하리라.

“발사!”

다시 한번 입을 여니 2차 포격이 성벽 위에서 땅으로 꽂힌다.

다시 한번 아까와 같은 일의 반복.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쓰러지고 그 쓰러진 몬스터의 발이 걸린 몬스터들도 보인다.

살짝 손을 들어 올리니 대지 속성을 잘 다루는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고 땅에서부터 흙과 바위로 만들어진 창이 튀어 나오기 시작.

달려오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한 몬스터들은 창에 그대로 꿰뚫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좋아.’

상황은 좋다.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일단 지금의 공격만으로 앞에 나오는 찌끄레기는 정리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티도 안 나네.’

일단 이쪽이 할 수 있는 건 화살과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경험치라도 주워 먹을까 하는 생각에 나 역시도 주문을 외워볼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포기.

회귀자가 준비한 이 커다란 이벤트를 효율적으로 챙기기 위해서는 일반 등급의 몬스터나 희귀 등급의 몬스터들은 쩌리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다.

‘마력을 아껴야 돼.’

이후에 등장할 질 좋은 경험치 공급원을 위해서 말이다.

“무난한데?”

“그래?”

“응. 자기. 이 정도면 무난하게 시작하는 거야. 대지 마법으로 한 번 제동을 건 게 인상적이네. 캐슬락에는 비행형 몬스터가 많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입구를 틀어막고 방어하다보면 저쪽에서 먼저 나가떨어질 거야.”

“그거 기분 좋은 소식이네.”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자기는 마력을 아끼는 게 좋을 거야. 이런 기회는 흔치 않거든.”

“알고 있어.”

이곳에서도 있는 놈들이 없는 놈들보다 더 챙겨가는 현실이 보이기는 보인다.

아득바득 죽기 싫어서 명령에 따라 희귀 등급과 일반 등급의 몬스터에게 화력을 퍼붓는 이들과는 다르게 지휘관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나중을 위해 마력과 체력을 아끼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제1성벽에 먼저 들이 닥친다.”

“응. 그러네.”

수성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1차 웨이브에 들어온 몬스터들이 성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기세만으로는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수백 년 동안이나 캐슬락을 지켜온 거대한 성벽이 무너질 리가 없다.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몬스터들은 서로의 시체를 계단 삼아가며 꾸역꾸역 성벽 위를 기어오르는 중.

“막아!”

“쿼어어어어어!”

“화살 퍼부어! 제기랄! 화살!”

“마법으로 떨쳐!”

제1성벽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바위 길드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키야… 필사적이네.’

필사적인 게 당연하리라.

뚫리면 죽으니까.

뒤에 있는 캐슬락이 아니라 가장 눈앞에 있던 자신들이 먼저 죽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죽어버리라고 내버려 두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아직 웨이브 초반이니 저들은 계속해서 버텨주는 것이 옳다.

저 멀리서 길드원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송정욱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튀어나올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숭고한 놈들.’

저런 게 희생이 아니라면 무엇이 희생이겠는가.

고향을 지키고 있지만 자기 자신들은 지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기계처럼 쉴 틈 없이 화살을 쏘고 있는 궁수와 벌써 탈진의 위기를 겪고 있는 마법사들.

긴장을 놓치지 않는 사제들과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몬스터들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전사.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작은 바위의 송정욱이다.

“절대로 올라오게 하지 마!”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그렇지만 지천에 깔린 붉은용병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나였어도 모든 걸 버리고 홀로 도망치기는 어려웠을 터.

본인이 지금까지 일궈왔던 길드원들과 캐슬락 내의 입지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전에 고향 드립을 치기는 했지만 놈에게는 이곳이 진짜 고향보다 소중한 장소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거다.

‘히야….’

순식간에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다르다.

이쪽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바위의 전력은 강하다.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에 지휘관으로 흐뭇한 것이 당연.

“제1성벽을 지원.”

“알겠습니다. 제1성벽을 지원하겠습니다. 예비분대는 곧바로 제1성벽으로 향한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적절한 체력 분배와 예비 병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다.

이쪽의 손에 몇백, 몇천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숫자로 생각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괜한 인류애에 휘둘렸다가는 오히려 골치 아파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거다.

다른 성벽 쪽에 피해가 생기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1성벽 쪽에 여유를 조금 주는 것이 효율적. 예비 병력에 포함되어 있는 마법사들이 급하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흐음….”

“왜 그래, 희라 누나?”

“그냥… 자기는 유능한 지휘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차희라가 내 생각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희망을 주는 걸 좋아하나 봐?”

차희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내 시선은 작은바위의 송정욱에게 향해 있다.

갑작스러운 예비 병력에 멀리서나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지친 얼굴에 일순간 희망이 들어선 것은 순식간.

제1성벽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비칠지도 있으리라.

“지원군이 왔다! 조금만 더 힘내라! 애들아!”

“네! 길드 마스터!”

뭘 상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듯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

1성벽 쪽으로 지원을 집중시키기 시작하자 끊임없이 기어 올라오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야. 희라 누나. 그냥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응.”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제1성벽은 뚫리게 되어 있어. 캐슬락의 수성전 기록을 보면 수백 년 동안 계속됐던 수성전에서 1성벽이 뚫리지 않은 적은 없거든. 물론 성벽이 완전히 뚫린 적도 없지는 않지만 수많은 전투에서도 1성벽은 항상 뚫려왔다는 거야.”

“열심히 공부했네.”

“그냥 기록을 읽어보는 걸로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야. 캐슬락의 성벽 건축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성벽을 만들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조금은 정신이 나간 사람일걸.”

“왜?”

“수성전 자체에 희생을 강요하도록 만들어졌어. 성벽을 만든 놈은 애초에 제1성벽에 있는 인간들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이 성벽을 디자인했고… 음… 나머지 거점들이 1성벽 쪽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도 그런 연유고. 이를 테면 지금까지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캐슬락이 있었던 배경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는 거지.”

“이번 희생양이 작은바위라고 말하고 있는 셈?”

“물론. 아마 쟤네들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쓸 데까지 전부 쓰고 마력을 전부 뽑아낸 이후에 깔끔하게 내동댕이치면 돼. 마력이 남아 있는 채로 죽는 건 쟤들도 억울하고 이쪽한테도 손해일 테니까.”

“너무 쓰레기 같은데….”

“누나가 유능한 지휘관이 될 것 같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맞긴 한데… 그래도 넌 정말 빌어먹을 쓰레기야.”

“어차피 죽어야 했을 범죄자들이야. 이렇게 죽을 기회를 줬으니 이쪽에게 감사해야 맞지.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 아니겠어?”

명예로운 죽음이 맞다.

녀석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지만 증거를 밝혀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만약에 운이 좋아 저곳에서 살아남는다고는 해도 어차피 송정욱은 죽는다는 거다.

모진고문을 받을 확률도 있으니 저대로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

잠깐이나마 모두의 귀감이 될 테니 죽어서도 이쪽을 도와줄 것이 분명하다.

“응전하라!”

“올라오게 하지 마! 절대로! 전사들은 뭘 하고 있는!”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는데.’

제1성벽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

물론 아직 희귀 등급의 몬스터들 밖에는 없지만 지금 버티는 것만으로도 1성벽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더 고등급의 몬스터를 한 번 막아준다면 작은바위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이상을 해준 셈이니 조금 더 지원을 해줘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화살이 집중적으로 1성벽 아래 있는 몬스터들에게 떨어지자 비명을 내지르며 다시 한번 여유가 생긴다.

송정욱의 얼굴에는 다시 한번 희망이 들어서고 이쪽에게 완전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멍청한 놈.’

작은바위를 활약시키기 위해 1성벽에 배치시킨 줄 아는 모양.

저 뒤쪽에서부터 희귀 등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

파티를 이루어야만 잡는 것이 가능한 영웅 등급의 몬스터들이 하나 둘 성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부터 시작.’

본격적인 전투는 지금부터다.

한 번에 먼 거리를 이동해 점프해오는 사족보행의 괴물이 성벽 위를 기어 올라오는 게 보인다.

매뉴얼대로 집중적으로 녀석에게 마법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예비 병력까지 급하게 투입해 체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1차 목표.

그 와중에 정하얀의 마법이나 황정연의 마법도 떨어지는 것을 보니 녀석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이쪽이 가지고 있는 패들도 조금씩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녀석들의 등장으로 인해 제1성벽으로의 지원이 끊기자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작은바위는 꾸역꾸역 몰려들어오는 몬스터들과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

‘저건 지원해 봐야 의미가 없네.’

슬슬 버릴 때가 왔다는 생각이 절로 꽂힌다.

남아 있는 병력을 천천히 빼는 한편, 계속해서 원거리로만 1성벽을 지원한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는 중.

“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

작은바위의 송정욱 역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쪽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게 보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돌린 녀석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빠져나가기 시작한 예비병력일 터.

“이기영 이 개자식! 후… 후퇴! 병력을 뒤로….”

뺄 수 있을 리가 없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등을 돌리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으니까.

몬스터들의 괴성 때문에 놈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이기영! 개자식! 이기영!! 이기여어어엉!!!”

‘잘 가라.’

“이기여어어어엉!”

결국 제1성벽에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들어서서 녀석들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수인을 외우며 입을 열었다.

“작은바위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잔뜩 눈물을 머금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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