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회귀자 사용설명서 187화
미련한 놈(1)
“돌아가자 하얀아.”
“네….”
녀석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쪽이 말을 건네 봤자 별로 머릿속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박덕구와 평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정하얀도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것 같은 표정, 다른 파티원들도 물론 소중하기는 하지만 정하얀에게는 김현성과 박덕구가 그나마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 분류되어있을 테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튜토리얼 때부터 함께한 것은 물론 외톨이였던 자신을 케어해준 인간들이 바로 녀석들 이었으니까.
특히나 박덕구는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성추행범을 두들겨 패줬으니 아마 나를 제외한다면 덕구에게 가장 정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큐피트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녀석이 우리를 발견하지는 않을까 살금 살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녀석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듯한 모습.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내려와 꽂히는 게 조금은 거슬렸다.
‘나는 더 잘 할 수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녀석에게 해준 말을 계속해서 되새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처음에는 단순히 겁먹은 녀석을 움직이게 하기 위한 말 이었지만 지금은 그 말이 녀석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 입장에서도 조금은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난 녀석을 믿는다. 그렇지만 상태창이 보여주는 현실은 잔인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다는 건 개소리야.’
물론 몇몇에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결과를 선물해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력만으로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한다. 특히나 녀석이 목표로 하는 게 천재일 경우에는 노력은 너무나도 쉽게 인간의 기대를 배신한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보였다. 애써 시선을 돌렸지만 녀석의 모습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아있다.
당연히 나는 녀석의 노력이 배신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녀석의 성장치가 정말로 한계에 부딪쳐 김현성 파티를 따라올 수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는 나는 어느 쪽의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되기는 한다.
‘죽을 거야.’
녀석을 버린다 버리지 않는다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후위에 서있고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전위의 실수란 파티의 전멸, 아니 파티의 전멸이 문제가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상대로 싸웠을 때 박덕구는 틀림없이 죽는다.
차희라의 경우가 그랬다. 만약에 차희라가 적과 아군을 완전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있는 상태였다면 박덕구는 첫 일격을 받아내지도 못한 채로 사망.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몸이 터져 죽었을 거다.
앞으로 김현성 파티가 가는 길이 제법 험난할 거라는 걸 생각해 보면 박덕구는 오히려 머무른 채로 있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머리 아프네. 시바… 전직도 해야 되는데….’
안 그래도 네 번 째로 선택할 직업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은 타이밍. 생각할 게 더 많아진 느낌이었다.
***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스터 뒷정리는 모두 끝내 놓겠습니다.”
“천천히 해주셔도 됩니다. 혜진씨.”
“린델의 일도 마무리 해 놓을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세요. 현성 씨. 기영 씨도 하얀 씨랑 오붓하게 잘 다녀오시고요.”
“린델에서 뵙겠습니다. 정연 씨.”
“잘 다녀오세요. 기영 씨.”
“금방 돌아올 겁니다. 빈민촌을 잘 부탁드립니다. 희영씨.”
“네.”
수도로 떠나기 전에 파티원들과 짧게 작별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만 한 쪽에서는 굉장히 따가운 시선이 날아 들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캐슬락의 블랙마켓의 건설의 부탁을 받은 조혜진도 아니었고 김현성과 떨어지게 돼서 심기가 불편한 김예리도 아니었다. 똘똘이를 꽉 껴안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디아루기아가 그 시선의 주인공이다.
평소대로 무표정이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느낌과 누가 봐도 불만이 있다는 눈빛을 보내온 걸 보니 아직도 이쪽이 수도로 향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짧게 다녀온다고 말은 해 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박덕구를 본 날 밤에도 방으로 돌아온 뒤 조금은 언성을 높였던 것으로 기억. 가정을 소홀히 하고 밖으로 싸돌아다닌다는 게 그녀가 화가 난 이유였다.
‘이게 뭐야….’
뭔가 슬슬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이쪽을 옭아매려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녀 품에 안겨 있는 똘똘이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계속해서 키엑 키엑 거리는 똘똘이도 이쪽과 조금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지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이라도 한 번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마침 정하얀도 다른 파티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디아루기아.”
“…….”
“하… 하하… 다녀오겠습니다. 디아루기아.”
“…….”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나한테 그런 걸 보고하는지 모르겠군요. 어차피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전부 해야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까?”
“저도 마음 같아서는 똘똘이와 함께 하고 싶지만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상황입니까?”
“저번에도 분명히 설명을 드렸었는데… 이것도 전부 안전한 둥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니 알아주셨으면….”
“뭐 당신의 생각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조금만 더 말해 봅시다. 안전한 둥지. 안전한 둥지. 안전한 둥지. 그래 좋지요. 그렇지만 디아루리아에게 가장 안전한 둥지란 당신과 함께 있는 둥지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 이 시기가 디아루리아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디아루리아도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키엑! 키엑! 키엑! 키에에에엑!”
‘똘똘이 이자식… 오버하지마 이자식아.’
“인간의 생각이란 너무나도 뻔합니다. 어차피 인간들의 수도로 가서도 그 날 밤처럼 좋지 않은 음료를 마시고 정신을 잃으시겠죠. 그게 얼마나 우리 디아루리아의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건강도요. 다른 여성체와 당신이 손을 잡던 입을 맞추던 저는 상관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디아루리아에게는 충실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바… 무서운데….’
“어차피 인간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계약자는 무슨… 손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인간이 자신의 둥지는 쉽게 내팽개치는군요. 애초에 당신은 자각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사회는 복잡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고 그만큼 술자리라는 것도 빠질 수는 없는 겁니다.”
“항상 그런 식으로만 이야기 하시죠. 복잡하다. 인간들의 사회는 위험하다. 그 복잡하고 위험한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 디아루리아를 홀로 남겨두는 이유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것도… 전부 일입니다.”
“당신의 일은 술이라는 걸 먹고 정신을 잃는 게 아니라 다이루리아를 지키고 사랑해주는 겁니다.”
“…….”
“…….”
“아이고 우리 똘똘이 일루와!”
뭐라고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저 상태의 그녀에게는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으로썬 떠나기 전 똘똘이를 한 번 귀여워 해주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키엑! 헥헥!”
“오이구! 우리 똘똘이 잘한다! 오이구 그래! 이틀만 기다려 금방 갔다가 금방 다녀올게?”
“키에에에에에엑!”
“똘똘이 쓰읍! 소리 지르지 말고!”
“키에에에엑…..”
“금방 올 거니까 참고 조금만 기다릴 수 있지?”
“헥… 헥헥!”
“말 잘 들으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헥! 헥!”
“우리 똘똘이 많이 성숙해졌네.”
“키엑!”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엑! 키엑! 키엑!”
다시 한 번 방방 뛰기 시작하는 녀석을 바라보니 용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든 모양. 그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똘똘이가 저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니 얼굴이 풀리는 게 당연할 것이다. 여전히 기분이 나쁜 것 같기는 했지만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데는 똘똘이 만한 게 없다. 묘한 시선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때. 정하얀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훈훈하다는 느낌의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제야 나와 디아루기아가 보여준 그림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디아루기아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정하얀을 의식하고 있는 이쪽은 이걸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여성진들의 대부분은 그저 똘똘이를 귀여워하는 것 같은 느낌. 특히나 똘똘이가 방방 뛰는 것을 처음 본 김예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물론 그 눈을 본 디아루기아는 황급히 똘똘이를 들어 올렸지만 말이다.
“귀…귀여워.”
“최대한 빨리 오셔야 합니다.”
“네. 아. 그리고 린델에 도착한 이후에는 곧바로 둥지에 건설이 진행 될 테니 김미영팀장이라는 인간을 찾아서 필요한 걸 말씀해주시면 될 겁니다.”
“둥지 말입니까?”
“네. 사실 용의 둥지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는 저는 알 수가 없어서… 일단은 당신과 협의 하에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라고 말해 놨습니다.”
“아….”
“맞춤형이니 지르고 싶으신 데로 지르시면 됩니다.”
디아루기아의 표정에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둥지를 본격적으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일단은 선물과 똘똘이의 애교로 커다란 산 하나는 넘었다. 물론 그 커다란 산 때문에 또 다른 산이 하나 생기기는 했지만 정하얀과는 어차피 수도로 함께 가게 되니 풀어줄 기회가 제법 많을 것이다.
정하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기뻐 보이는 듯한 표정.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와 나를 꽉 껴안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녀보다 조금 더 신경 쓰이는 쪽은 박덕구 쪽이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거, 형님 잘 다녀오쇼!”
“응. 내가 없는 동안 디아루기아와 디아루리아를 부탁한다.”
“아….”
“생명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뭐 대충은 알 것 같소.”
“덕구야.”
“엉?”
“나는 너를 믿는다. 그리고 내가 하면….”
“알고 있소. 나는 더 잘 할 수 있다. 그거 말하는 거 아니요? 거 참 귀에 딱지 앉을 것 같다니까. 형님이 걱정할 일 없을 테니 기분 좋게 다녀오쇼.”
“너도 정연 씨랑 사이좋게 지내고.”
“큼. 정연이 누님이랑은 거 그런 사이 아니라니깐 형님이나 거 하얀이 누님한테 좀 잘해주는 게 좋을 거요.”
“힘내세요! 덕구오빠.”
“흐흐흐 나야 뭐 맨날 힘이 넘치는 박덕구 아니요.”
박덕구의 말에는 슬그머니 웃으며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조금은 수준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만한 신호들이 조금 씩 조금 씩 눈에 띄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어제도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른 것이 분명하다. 자신은 눈치 채지 못 하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녀석의 근처로만 가도 땀 냄새가 난다.
그나마 옷을 깔끔한 걸로 갈아입었지만 샤워할 시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별로 불쾌하지는 않다. 오히려
“기영 씨 슬슬….”
“아… 네. 현성 씨.”
각자의 그리폰에 올라 탄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 역시 등 뒤로 껌딱지처럼 달라붙었고 나 역시 아직도 인사를 해오고 있는 사람들과 발광을 하고 있는 똘똘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현성과 함께 하늘 위로 올라갔을 때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박덕구의 꽉 쥔 주먹이 떨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등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련한 새끼.’
녀석은 내가 본 인간들 중에 가장 미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