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회귀자 사용설명서 192화
아무 일도 없었어
어디론가 튕겨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현실로 되돌아 왔다.
굳이 주변을 쳐다보지 않아도 그걸 실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 풍경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껴진 것은 엄청난 격통. 비명도 지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입 밖으로 비명을 내뱉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뇌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에 괜스레 입을 뻐끔 거리며 얼굴을 쥐어 잡을 수밖에 없었다.
‘개… 슈바….’
아마도 카스가노 유노가 보고 있던 검은색 세계를 내 눈으로 직접 본 부작용인 모양.
눈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계속해서 눈이 있는 쪽을 붙잡았다.
나로서도 이런 게 가능할지 몰랐으니 이 정도의 부작용은 당연할 것이다.
조금 가슴 아픈 부분이 있다면 내가 본의로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파서 흘러내리는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몸은 1회 차 따위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거나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뭔… 개 같은 상황이야.’
물론 인상이 깊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검은색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은 없었다.
궁금한 것은 내가 언제 어디에서 죽는지 그리고 도대체 뭘 하면서 싸돌아다녔는지가 전부.
중요한 건 검은색 세계의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리라.
박덕구를 강화하러 왔다가 꽤나 여러 가지를 본 느낌에 괜스레 침을 목구멍으로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카스가노 유노의 일까지 알아버린 상황. 아니, 사실 그 이후의 이야기도 봤던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틀림없이 나는 검은색 세계의 겨울을 잠깐 들여다봤다.
그런 기분이 든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는 것이 없으니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논외.
다시 한번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볼 수밖에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들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용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파국. 박덕구는 나를 지키다 죽었고 나는 카스가노 유노를 배신했다.
‘깡도 좋은 쓰레기 놈.’
거기서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더라면 이쪽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다.
검은색 세계의 쓰레기도 카스가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녀석이 도박을 선택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던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이 괜스레 머리에 떠오른다.
‘얘는 어떻게 죽는 거지?’
카스가노 유노는 틀림없이 자신이 죽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것도 나보다 먼저.
내가 녀석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검은색 쓰레기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스스로 유노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옆에서 두고 본다고 했었으니까.’
아마 그럴 확률이 높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실제로 카스가노 유노와는 꽤나 오랜시간을 함께 한 것 같았고 쓰임새가 상당히 많은 만큼 나였어도 그녀를 죽이는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카스가노 유노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찌릿거리는 고통에 다시 한번 안면을 부여잡은 것이 당연.
유노뿐만이 아니다.
녀석의 등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멍청한 놈.’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혼자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박덕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기는 했지만 괜스레 감성적이 되는 것 같아 고개를 흔들었다.
2회 차의 박덕구는 살아 있다.
성장에 대한 힌트도 조금 발견한 것 같기도 하고… 이 지끈거리는 고통만 아니라면 모든 게 완벽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한 가지 의문점이 더 남아 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제한적인 정보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외부의 개입은 또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 특성을 사용하면서 이딴 문구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심지어 이쪽이 마음의 눈을 발동시킨 적도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방금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녀석이 있었다는 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설 등급의 특성인 마음의 눈과 본질과 미래와 과거를 꿰뚫어 보는 눈의 행사에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이건 이미 인간의 영역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내게 이 장면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왜?’
그만큼 카스가노와 박덕구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나쁘지 않은 가설이다.
검은색 세계의 쓰레기는 두 사람 때문에 꽤나 망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건….
“장려한다고 봐도 되는 건가?”
박덕구가 죽는 걸 원치 않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게 된다.
“그 미련한 놈이 내 브레이크가 되어주고 있어서?”
이것도 정답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쪽에 개입한 어떤 존재의 목적은 1회 차처럼 상황을 막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에 있다.
이거 하나만큼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왔다.
무척이나 엄청난 장면을 목격했다.
슬쩍 고개를 옆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으…응….”
“아….”
시야에 비친 것은 이쪽의 옆에 누워 있는 카스가노 유노.
“어….”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녀가 알몸이었다는 것이었다.
‘뭐야….’
살짝 창문 쪽을 바라보니 이미 해가 떠 있는 상황.
조금 오랜 시간을 검은색 세계에 쏟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밤을 지새울 줄은 전혀 몰랐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다.
‘제기랄’
아니겠지.
슬쩍 이불을 들어 올렸지만 그녀와 내가 사랑을 나눴던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카스가노 유노는 행복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겉모습은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
마지막에 봤던 장면으로 빙의라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그녀와 내가 서로를 탐구 했다는 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깊게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아 머리를 전력으로 흔들자 조용히 깨어난 카스가노가 눈에 보인다.
“아… 주인님.”
“일어났구나.”
“네… 네.”
묘하게 얼굴이 붉어져 있는 모습.
그렇지만 행복해 보인다.
검은색 세계에서 봤던 얼굴과 묘하게 대조되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행복하다면 나쁜 상황은 아니다.
실리아에 살고 있는 그녀에게는 압도적으로 소홀하기도 했고 어제 봤던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2회 차의 카스가노 유노도 나 때문에 인생이 꼬인 만큼 이쪽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검은색 세계의 유노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지금의 그녀가 완성된 것은, 사실 이쪽의 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쪽에 달라붙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리를 잠깐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의문이 남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거다만….”
“예. 말씀하시옵소서.”
“네가 나에게 검은색 세계를 보여준 것이 맞나?”
“아, 아니옵니다. 주인님. 저 역시 주인님이 제 안에 들어와 검은색 세계를 보실 줄은 상상 못 했나이다. 제가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주인님께서 제 안에 들어왔나이다.”
뭔가 말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저도 이해할 수 없는 억제력이 갑자기 물밀 듯이 몰려 들어왔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주인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세계에 그토록 오랫동안 체류한 것은 저 역시 처음이었습니다.”
“그래?”
“예. 부끄럽지만 보통은 단편적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찢어서 볼 수 있는 게 고작입니다. 물론 제 능력이 조금 더 성장한다면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었겠지만… 이제까지… 아! 혹시 주인님께서는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아니. 나도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음의 눈을 발동시킨 건 내가 아니라는 거야. 내가 그 눈으로 너를 들여다보기도 전에 이미 특성이 발동되어 있는 상태였어. 그것 외에는 달라진 건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조금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네가 본다는 세계가 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성과야.”
“얻은 것은 있었나이까.”
“적지는 않다. 고맙다.”
“아….”
“그리고 검은색 세계에서의 일도 고맙구나.”
“주, 주인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지.”
“예.”
“이건 별건 아니다만… 검은색 세계에서 네가 본 미래는 정말로 나와 함께 있는 미래가 맞았나?”
“확인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지만 아마 검은색 세계의 아둔한 카스가노는 주인님을 붙잡기 위해 거짓을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런가.”
“네. 틀림없사옵니다. 주인님의 역린을 건드릴지는 몰랐던 것이겠지요. 아, 어쩌면 일부로였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음?”
“주인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검은색 세계의 저는….”
“무슨 말인지 알겠군.”
정리해 보자면 그녀가 이기영을 붙잡기 위해 날렸던 거짓말이 스위치를 켜버린 셈이다.
카스가노 유노의 말대로 검은색 세계의 나와 헤어지기 싫어 일부로 스위치를 눌렀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가 정황상 맞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제법 나쁘지 않은 상황.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떠올렸을 때 뭔가 한 가지 잊은 것 같은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을 때 들려온 것은 거대한 폭음.
‘슈바….’
뭘 잊었는지에 대해서 깨닫는 것은 순식간 내 생각이 맞았다는 듯 바깥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미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방에 재워놓고 왔던 정하얀의 존재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
콰직! 콰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는 정하얀이 마법까지 사용해 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내가 위험할 것 같아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아니면 내가 누군가와 접촉했다는 걸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됐든 이 상황을 보이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 것이다.
“유노.”
“네. 주인님.”
이 사태를 어떻게 정리하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에 있는 벽면이 무너져 내리며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어처구니없는 양의 마력을 온몸에 두르며 손을 뻗고 있는 정하얀의 눈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담겨져 있었다.
한바탕 눈물을 흩뿌렸는지 부어 있고 붉어있는 눈은 가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카스가노 유노를 노려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찔리는 게 있는 나는 그녀의 표정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개슈바….’
도가의 사상에 커다란 관심은 없지만 지금 나에게 카스가노 유노가 달라붙어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업보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불과 몇 분 전이다.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정하얀에게 이런 식으로 시달리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도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괜스레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는 거다.
“이이이익!”
주먹을 꽉 쥐고있는 손에는 피가 흘러나왔고 마찬가지로 꽉 깨문 입가에서도 피가 흘러나온다.
덜덜 떨려오는 정하얀의 얼굴은 제대로 마주치기에도 조금은 무섭게 느껴질 정도.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
말도 안 되는 개소리,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한 치의 거짓 없는 투명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