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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93화 (192/1,590)

# 193

회귀자 사용설명서 193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1)

김현성의 뒤에서 계속해서 훌쩍이고 있는 정하얀을 보니 괜스레 양심이 찔렸다.

그리폰을 타고 린델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울고 있는 게 보일 정도니 가슴 한편에 죄책감이 드리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살짝 뒤를 돌아보니 깜짝 놀란 얼굴.

그렇지만 여전히 무거운 표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하얀아.’

제대로 화가 났다는 걸 계속해서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실제로 화가 날 상황이기는 했다.

카스가노 유노의 방에 갑자기 들이닥쳤을 뿐만 아니라 요조라 길드의 길드원들에게도 해를 끼쳤으니까.

심지어 왕성 안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화력이 높은 마력은 아니었지만 성을 부술 정도의 위력은 가지고 있었으니 모두가 깨어나 들었을 것이다.

주변 귀족 입장에서는 이토 소우타 사건 이후에 터진 꽤 굵직한 사건이었고 당연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요조라와 파란 사이의 혈맹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들어댔고 최대한 뜬소문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리.

왕성 안에서 일어난 사고였으니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조라 길드와 파란이 동맹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사고.

카스가노 유노가 요조라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파란과 요조라의 사이가 틀어졌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었다는 거다.

‘슈바….’

물론 나 개인에게도 커다란 사건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정하얀을 납득시켜야 했지만 납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논리적으로는 납득시킬 수 없을 정도로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결국 내가 취한 선택지는 역으로 성을 내는 것.

일단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곧바로 잡아뗀 것은 물론, 곧바로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호통을 친 것으로 사건은 간단하게 마무리됐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이쪽은 정하얀이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둘이 한 이불을 덮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기는 했지만 절대로 정하얀이 생각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명 아닌 해명.

알몸과 비슷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주술을 해주하기 위한 의식이었다고 변명.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논리가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던 그때의 내게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완전히 쓰레기였어.’

잠깐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틀림없이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을 능가하는 쓰레기였다.

변명 이후에 보인 모습은 더욱 가관.

정하얀의 뇌가 의문을 느낄 틈도 없이 몰아붙인 것이다.

‘실망했다.’

부터 시작한 것은 물론.

‘예의가 없다.’

또는.

‘반성해야 한다.’

라는 것을 빌미로 요조라 길드원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고 카스가노 유노에게도 곧바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눈치가 빠른 카스가노 유노 역시 이쪽의 장단에 맞춰버리니 정하얀이 순식간에 역적이 되어버린 셈.

그때부터 쭈욱 차가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결과가 바로 이거다.

‘미안해… 하얀아.’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더 좋아하는 쪽이 항상 약자라고 했던가.

그 말이 옳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민망한 반, 죄책감 반, 정하얀의 돌발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방 안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당연하지만 정하얀과도 만나지 않았다.

물론 카스가노 유노와도 일체 연락하지 않았다.

서임식이 끝난 뒤에는 아무 말 없이 그리폰 위에 올라 타버렸다. 당연히 내 뒤쪽에 붙을 줄 알았던 정하얀이 김현성의 뒤에서 그리폰을 타고 있는 이유였다.

이 정도로까지 매정하게 정하얀을 밀어붙인 것은 이후에 이런 사고를 일으키지 않기 위함.

김현성은 사이좋은 우리가 그저 사랑싸움을 한 것 같이 여기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많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거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처음에는 이걸로 진정이 될까 싶었지만 정하얀의 뇌는 결국 나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미움 받지 싶지 않다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사이에 내 방문 앞을 서성였고 카스가노 유노에게 이를 갈면서도 그녀에게 혼자 찾아가 사과했다.

‘주객전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간 쓰레기였다.

정하얀의 눈에는 단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화이트 폴에 살짝 탄 상태로 다시 한번 돌아보니 역시나 계속해서 한 손으로 슥슥 얼굴을 닦고 있는 모습.

지금까지는 그나마 잘 버텼지만 여기서부터는 나도 한계다.

“조금 쉬었다 가시죠.”

바람 소리 때문에 소리가 뭉개지기는 했지만 오감이 뛰어난 김현성은 알아들었다는 듯 그리폰의 기수를 틀었다.

나 역시 화이트 폴을 데리고 근처의 절벽에 내린 것은 당연지사. 자리에 내리자마자 어색한 침묵이 펼쳐졌다.

사실상 나보다 더 어색해하는 것은 김현성이다.

‘이 자식.’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둔감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하얀과 내 눈치를 필사적으로 살피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 묘한 침묵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질 것이다.

파티원 간에 일어난 실수였다면 어떻게든 중재하려고 하겠지만 나와 정하연의 개인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 만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어차피 기대도 안 하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이쪽을 못 본 척하고 있는 꼴은 가관이다.

“잠깐 식사라도 하고 이동하도록 하죠.”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기영 씨.”

슬그머니 나와 정하연과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튼 간에 대충 자리를 만든 이후에는 왕성에서 챙겨온 음식을 꺼내들기 시작.

정하얀은 열심히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하얀의 흘리는 눈물의 무게만큼 내 죄책감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입맛이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우물우물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가끔 끄윽끄윽거리며 눈물을 일발장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고 있는 모습.

정하얀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김현성은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기묘한 식사가 펼쳐지고 있다.

“날, 날씨 좋군요.”

“아… 네.”

별로 좋은 날씨는 아니다.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다시금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김현성.

꾸역꾸역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고 있는 정하얀.

내가 만든 분위기인 만큼 수습하는 것도 이쪽의 몫. 결국에는 정하얀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애초에 화해의 손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잘못은 나 혼자 다 하고 나 혼자 화가 난 척했던 것뿐이었으니까.

내 몫에 있는 고기를 무심하게 정하얀의 반합통 위에 올리자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닭똥 같은 눈물이 뚜욱 뚜욱 떨어지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내가 자신을 챙겨주는 게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모양이다.

“끄윽… 끄윽… 히끅….”

“많이 먹어.”

“네엣…. 끄윽….”

“천천히.”

“네엣. 끄으윽… 제… 제성합니다.”

“울지 말고.”

“제성합니다…. 끄윽….”

“체하겠다.”

상당히 불편하다.

‘이건 아닌데….’

최근에 조금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은 있었는데 왠지 이번 일로 그 정점을 찍은 듯한 기분에 괜스레 나도 침묵을 지키게 된다.

정하얀과 나는 사실 공식적으로 연인이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내 마음에 조금은 거짓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고 은근슬쩍 둘만의 스킨십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있다.

간혹 데이트도 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밀어를 속삭인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일단은 연인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거다.

정하얀 역시 그 사실을 대충은 깨닫고 있는 상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정황이 의심이 간다면 두발 벗고 나서는 것은 정상적인 여자 친구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지구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배경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의 특수성과 정하얀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사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토 소우타와 잊힌 미친 늙은이를 골로 보낼 때도 하지 않았던 합리화다.

정하얀과 내 관계는 연인관계이면서도 팽팽한 줄다리기를 필요로 한다.

저주 받은 신단 사건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감이 온다.

일부한테는 쓰레기처럼 들리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둘의 관계에서는 내 쪽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맞아.’

아직도 끄윽대며 눈물 젖은 고기를 먹고 있는 겉모습은 내 마음을 약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이후에는 다시 한번 그리폰으로 탑승.

김현성의 뒤로 가야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다시 내 쪽으로 붙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슬그머니 손을 내미니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등에 착 달라붙는 정하얀이 보였다.

“헤… 헤헤.”

그새 또 기분이 좋아진 모양.

사실 나도 이게 편하다.

“꽉 잡아, 하얀아.”

“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 어느 정도는 용서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연구도 했어야 했으니까.’

정하얀과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걸 참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기 이전에 린델에 돌아가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쯤에서 서로 타협하는 게 맞다는 거다.

‘박덕구 개조 계획.’

그리고.

‘전직.’

잘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 연구가 조금 힘이 들기야 하겠지만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이미 확정되어 있는 이야기다.

‘왜?’

린델에는 지식의 보고가 있으니까.

시간이 없어 자세히 연구해 보지는 못했지만 디아루기아는 살아 있는 표본이다.

용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표본.

물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디아루기아를 이해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것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별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촉매 자체가 전설 등급 이상.

박덕구를 캡틴 린델로 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혈청.’

가장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박덕구 강화 계획이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자유 도시 린델.

쌓인 피로를 풀고 싶었지만 여러모로 바빠질 만큼 곧바로 연구를 시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왠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은 건물 하나가 시야에 비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건물이라고 볼 수 없다.

“어?”

마치 동굴처럼 보이는 건축물. 문제는 그 건축물을 구성하는 물질에 있다.

‘미스릴?’

건물 자체를 미스릴로 뒤덮은 듯한 느낌. 심지어는 처음 들어본 금속들이 계속해서 눈에 띄기 시작.

전부다 평범한 금속들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웅 등급 이상의 자재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은 디아루기아의 몸을 전부 우겨놓고도 남을 만한 정도의 크기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린델을 떠나기 전 디아루기아에게 건넸던 한마디.

둥지를 만들 계획이니 지르고 싶으신 대로 지르시면 됩니다.

‘미친! 미친!’

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 미친!’

하고 싶으신 건 다 하셔도 됩니다.

“이 미친 여편네가!!!”

경제관념이 없는 것에게 통장관리를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례. 서둘러 돌아가 내 금고를 확인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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