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회귀자 사용설명서 199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 (7)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너무 다르다.
신나서 헐레벌떡 달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해하지 못할 오기가 느껴진다.
괜스레 섭섭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강화의 혈청을 만들기 위해서 들인 시간을 생각해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차피 연구야 하긴 했었겠지만 이건 박덕구 전용으로 만든 물건이었으니까.
‘이… 돼지….’
어째서 이걸 거절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예상이 가는 이유는 있다.
내 기준에서는 조금 보잘 것 없이 느껴지는 이유.
자기의 힘으로 강해지고 싶다느니, 이런 물약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보잘 것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 새끼….’
‘절박함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다면 절대로 저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녀석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배경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에 어이가 없어질 정도.
만약에 박덕구가 파란이 아닌 어디 중소 길드에서 구르고 굴렀더라면 당장에라도 이 혈청을 받아들였으리라.
당장 이 물약이 시중에 풀린다면 한계를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갈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이건 녀석 같은 이들에게는 영약이나 다름없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이쪽의 눈에서도 불꽃이 튄다.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뭐?”
“마음은 고맙지만 안 먹을 거요. 정말로 이것 때문에 부른 거요?”
“그거 때문에 부른 게 맞아.”
“나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는 거요.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거 없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소.”
녀석 역시 굉장히 불편하다는 표정이다.
애초에 녀석과 함께 다닌 이래 저놈이 나를 저런 눈으로 쳐다본 것 자체가 처음이다.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을 건드렸단 느낌이었지만 어쩌면 열등감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달려 나가고 있는데 이런 물약을 제안 받았으니 동정 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걸 종용할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고집이야.”
“고집이 아니요.”
“너만을 위한 게 아니라 파티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잘 생각해라.”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오. 더 강한 전위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그럼 다른 사람을 쓰면 되는 거 아니요. 아무튼 난 이건 안 받을 거요.”
“너!”
“안 받는다고 말했잖아!”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려는 녀석을 한 손으로 붙잡은 순간 녀석이 화를 내며 내 팔을 쳐냈다.
능력치가 꽤 오르긴 올랐지만 내 유약한 몸이 튕겨져 나가는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랐다는 박덕구의 표정이 순간 스쳐지나간다.
실수했다는 녀석의 표정과는 다르게 내 몸은 여전히 근처에 있는 책상으로 나가떨어지는 중.
‘개….’
불행인지 다행인지 왼손에 쥔 강화의 혈청은 품에 꼭 안아 지켜낼 수 있었지만 내가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는 건 변함이 없다.
등 뒤로 작은 충격이 느껴졌고 혈청의 안위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 돼지 새끼!”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느껴진 것은 거대한 마력의 유동.
‘아.’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고개를 돌리자 박덕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전설 등급의 특성이 열린 것이 성공적이었는지 느껴지는 마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
그 커다란 마력에는 나도 모르게 침을 넘어갈 정도였다.
단순히 마력만으로 녀석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주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박덕구가 밟고 있는 땅바닥이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파이고 있다.
녀석은 부들부들 떨며 버티려고 하고 있지만 바로 위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압력에는 저항할 수 없는 모양.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모습으로 땅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으으으윽….”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하고는 있지만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구가 높아 공격을 버틸 수 있다는 의미와 마력의 압력을 견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
근력과 마력 수치가 낮은 녀석으로서는 저 정체 모를 마법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하얀이 내 안전에 민감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박덕구에게까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과해요.”
“후으으으윽!”
“사과해요!”
콰지지지지지지직!
“으득!”
다시 한번 힘을 주자 박덕구가 더 깊게 땅을 파고들기 시작.
저러다가 애 잡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급하게 정하얀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워낙 튼튼하기는 하지만 저런 압력을 정면으로 받은 뒤에 대미지가 남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정하얀, 그만.”
“아….”
“다치지도 않았고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니까.”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덕구한테 해.”
“…….”
정하얀이 손을 내리자 곧바로 마력의 압력이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 주변을 잠식하던 마력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한결 편해진다.
45의 마력으로도 정하얀의 마력은 견디기가 힘든 모양.
박덕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땅에 박혀 있는 녀석이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어주는 것은 당연지사. 혹시라도 다친 곳은 아닌지 마음의 눈으로 확인해 봤지만 큰 대미지는 없다.
정하얀의 마력에 저항하기 위해 마력을 지나치게 끌어올려 내부가 조금 망가진 것 같긴 했지만 충분히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상처.
녀석이 전력으로 정하얀에게 저항하려고 한 흔적이 몸 곳곳에 보인다.
조용히 손을 뻗으며 녀석이 내 손을 잡기를 기다렸지만 돼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얼굴에 드리운 것은 지독한 패배감.
정하얀의 마법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이다.
‘아….’
일이 조금 더 꼬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가 정말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김예리를 통해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던 김현성 파티와 자신과의 괴리를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본 계기가 된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괴물들의 파티를 따라가기가 힘이 들 지경.
비전투직군으로서 어떻게든 비비고는 있지만 당장 내가 보기에도 주변에 있는 이들이 괴물이라는 게 느껴진다. 아마 직접 전위에 서 있는 녀석은 나보다 더욱 절실히 느낄 것이리라.
결국 녀석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마법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는 패배감을 얼굴에 실고 혼자서 몸을 일으킨 뒤에는 아무 말 없이 둥지의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아까는 미안했소, 형님.”
“아니다. 조금 흥분해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나도 미안하다, 덕구야. 내가 조금 급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천천히 해보자.”
“아니요. 형님은 잘못 없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을 잡을 수가 없다.
‘짜증 나….’
자꾸만 짜증이 치솟는다.
대놓고 ‘너 재능 없으니까 닥치고 쳐 마시기나 해. 어차피 너는 한계가 있고 이대로 있다간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더 벌어지기만 할 거야.’라고 일침이라도 놔주고 싶은 심정.
그렇지만 녀석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녀석이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윽박 지르는 것보다는 어린아이 다루듯이 살살 말해주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하얀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았는지 조용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는 디아루기아는 지금 이게 뭔 상황인지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왜 갑자기 일이 꼬인 건지 제대로 알고 싶다. 그리고 있던 그림은 분명히 이게 아니었다.
‘개 답답하네, 슈바….’
‘나를 통해서 얻은 힘은 자기 힘이 아니다’라는 물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녀석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에는 다시 한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길드에 다녀올게.”
“네… 오빠.”
녀석을 보고 오든 김현성과 이야기를 하고 오든 간에 뭔가 다시 해결책을 만들어야 했다.
‘진짜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다.’
내가 녀석을 케어해 주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다. 어떻게든 한 번만 녀석을 끌어준 이후에는 다시 떨어졌을 때는 잡아주지 않을 거라고 굳게 다짐하며 서둘러 파란으로 돌아갔다.
굳이 화이트 폴을 타고 가지는 않았다. 박덕구가 어떤 상태인지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폰을 타고 내가 나타났다고 광고하면서 등장하면 상태가 좋지 않은 녀석은 방 안에 틀어박힐 거라고 생각했다.
둥지에서 크게 떨어지지는 않은 만큼 파란의 길드 하우스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에 있는 주점에서 술이라도 퍼마실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 혹시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이곳에 있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저번에 김예리와 함께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정하얀과 함께 박덕구를 훔쳐보던 곳에서 자리를 잡자 역시나 김예리와 함께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심지어 김예리는 이쪽을 발견했는지 티가 안 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모습. 이쪽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박덕구는 나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지만 김예리는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굳이 박덕구에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쪽의 사정을 대충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슬그머니 나에게 시선을 뗀 김예리는 박덕구에게 입을 열기 시작.
곧바로 그 말에 대답하는 녀석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표정. 안 좋아. 아저씨. 억지로 훈련해 봤자. 별로 효율. 안 좋아. 쉴 때는 쉬어야 돼.”
“아니, 오늘은 훈련이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대련.”
“대련이라면 매일 하던 거. 훈련 맞아.”
“아니. 그거 말고.”
“뭔데.”
“실전처럼 해달라는 뜻이다.”
“봐주지 말라는 뜻? 아저씨 다쳐.”
“괜찮으니까.”
박덕구의 얼굴은 초조해 보인다.
아무래도 아까 정하얀에게 손가락 까닥 하지 못한 게 정말로 충격적이었던 모양.
지금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싶은 것 같았다.
김예리는 박덕구에게 대답하는 대신 슬그머니 내가 있는 쪽으로 눈알을 돌렸다.
진짜로 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표정.
왜 이런 일에 내 의사를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도 녀석에게는 필요한 일일 테니까.
박덕구는 자세를 잡았고 김예리는 곧바로 녀석을 향해 쇄도했다.
‘김현성?’
꼬마가 누구를 모델로 근접전을 연습했는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김현성보다 조금 더 가볍고 스타일리시하긴 하지만 언뜻 언뜻 움직임에서 녀석의 그림자가 비친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
박덕구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검을 바로 잡았지만 김예리는 이미 근처까지 와 있다. 순식간에 주변에 피가 뿌려진다.
차희라와 싸울 때 대충은 느꼈었지만 저 꼬마의 전투 능력은 거의 조혜진에 필적한다.
싸움이라도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밀리는 녀석을 보니 정말로 가슴이 아파온다.
선천적인 내구 능력치로 버티고는 있지만 녀석으로서는 김예리를 잡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박덕구가 약한 것이 아니다.
‘괴물 꼬맹이.’
덕구가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반 박자 더 빠르게 움직인다.
멀리 떨어진 이후에는 던진 투척용 단검은 녀석의 몸에 박히고 단검으로는 온몸을 헤집는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찰 지경. 어째서 그녀가 박덕구를 상대로 봐준다고 표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만할래.”
“어?”
“이제 그만. 더 이상 하면. 위험하니까. 사제 불러올게.”
“조금만 더… 후우… 후우….”
“싫어. 왜 나랑. 싸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
“아저씨 역할은 나랑 싸우는 거. 아니야. 인정?”
“…….”
“아저씨는 어차피 조혜진 아줌마나 현성이 오빠처럼 못 해. 받아들이는 게 좋아.”
꼬맹이는 조용히 박덕구를 바라보다 곧바로 몸을 돌려버렸다.
아마 사제를 부르러 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박덕구는 땅바닥에 철푸덕 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저번처럼 금방이라도 일어나 검을 휘두를 것 같아 녀석을 살펴봤지만 다시 일어나 검을 휘두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끄윽끄윽거리는 정체모를 울음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