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회귀자 사용설명서 200화
이기영의 몰래카메라 (1)
절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녀석은 그 누구보다도 절박할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훈련에 매달리는 모습만 봐도 녀석이 얼마나 구석에 몰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마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일 수도 있고 자신의 힘으로 옆에 서고 싶다는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녀석이 이러고 있는 이유보다 녀석을 조금이라도 성장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멍청한 놈이니까.’
녀석은 자가진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있다. 본인의 문제가 뭔지 본인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것이 당연.
애초에 김예리나 김현성, 조혜진 같은 천재들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으려고 한 것부터가 무리수.
김예리의 말이 맞다.
녀석에게는 녀석만의 역할이 있고 박덕구가 이 혈청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김현성 파티의 천재들을 따라갈 수 없다.
나 역시 녀석과 비슷한 경우다. 처음부터 천재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 노선을 변경한 것.
내가 마법에 큰 뜻이 있고 근성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정하얀 같은 이들을 따라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는 천 년을 수련해도 정하얀에게 닿지 못할 거라는 걸 내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물론 박덕구는 게으른 나보다는 저들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이 방법이라는 건가요?”
“그래.”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이거 잘못하면 사람 하나 완전히 망가뜨리는 게 될 수도 있다고요? 저도 튜토리얼 때부터 그 사람 많이 보기는 봤었지만 정신력이 그렇게 강해보이지는 않던데요? 오히려 의존적이고… 솔직히 말하면….”
“응?”
“솔직히 말하면 기영이 오빠가 없었으면 이 사람은 튜토리얼에서 죽었을 거예요.”
박덕구가 들으면 슬퍼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검은백조에서의 일이 조금 힘들기는 한지 한눈에 봐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당당한 표정과 여유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지혜 누나가 할 소리는 아니잖아.”
“어머. 글쎄요. 저는 기영 오빠랑 현성 씨가 없었어도 아득바득 살아남았을 것 같은데. 뭐, 이미 지난 일이니까 예전 일은 그만 들추자고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리고 왜 자꾸 누나라고 부르는 거예요, 오빠?”
[플레이어 이지혜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이지혜]
[칭호 - 검은백조의 머리.]
[나이 - 29]
[성향 - 이기적인 야망가]
[직업 - 지휘관]
[능력치]
[근력 - 16/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 - 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 - 27/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 - 67/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 - 1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 - 4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 - 13/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총평 -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혼의 단짝이네요. 항상 말씀드리지만 너무 깊은 사이가 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날 2세가 너무나도 불쌍하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그야 네가 누나니까.’
이쪽이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인 것 같았기 때문에 총평의 2세 드립을 속으로 곱씹으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도 아닌데… 아무튼 신기하기는 신기하네요.”
“뭐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거든요. 조금 더 냉정한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예전부터 함께한 사이라 쉽게 쳐내기는 조금 어려웠던 건가?”
“비슷한 이유이기는 해.”
“그게 의외라는 거예요. 현성 씨 현성 씨 현성 씨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덩치 큰 아저씨에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주시는 것 같고…. 왕성에서 카스가노 유노랑 같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으면 기영이 오빠가 호모가 아닌지 의심이라도 한 번 해봤을 거라니까.”
“뭐?”
“농담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라도 남자가 더 좋은 게 맞다면 저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셔야 되요. 도전 의식을 불러들이는 건 좋지만 만약 그게 정말이라고 하면 너무 슬퍼지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만큼 오빠가 덕구 씨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한번 던져 봤어요. 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계속해서 품에 안고 가려는 생각이 눈에 보이니까. 타 길드에서나 파티에서도 말이 많은 거 알죠?”
“아니. 최근에 연구 때문에 제법 바빴거든. 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고 있는 거야?”
“비슷해요. 대륙 8좌의 김현성과 이기영이 있는 파란의 파티에서 쓸 만한 전위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요.”
“헛소문이야.”
“입이 가벼운 사람들한테는 그게 헛소문처럼 들리지 않을 수도 있죠. 외부에서만 봐도 보이는 게 있는 법이예요. 덕구 씨가 더 이상 그 파티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어떻게 봐도 사실인 부분이고 파란의 전위를 맡기기에는 여러 가지 불안한 점이 있는 것도 맞잖아요? 능력 있는 전위를 구한다는 소문에 이적시장이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고요. 프리랜서 탱커들도 혹시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설레고 있는 모양이고….”
“…….”
“물론 오빠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서는 쳐내는 타이밍도 잘 생각해 봐야 된다고요.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이런 것까지 제가 판단할 위치에 있는 건 아니죠. 그냥 우리 지아비 걱정되는 마음에 주절거려 봤다고 생각해 주세요.”
“아냐. 네 말도 일부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해.”
“정말요?”
“실제로 현성 씨가 나한테 2파티를 신설하자고 운을 띄어 본 적은 있으니까. 덕구를 버린다기보다는 지금 보다 더 위험한 곳으로 발을 들였을 때 녀석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있기는 했지. 실제로 다른 탱커를 영입하거나 새로 키워보려는 생각도 있는 것 같고….”
“안 됐네요… 덕구 씨. 키워본다고 한다면 이번 튜토리얼 던전에서 구해볼 참인가….”
“아마 그렇겠지. 은퇴하기는 했지만 이상희가 아직도 파란의 고문으로 있으니 사실 그렇게 급한 상황도 아니야. 다만 준비하기는 준비해야 된다는 거지. 내가 박덕구를 돌봐주는 건 딱 여기까지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네.”
“솔직히 강화의 혈청을 만드는 데 시간과 재화를 쏟아붓기도 했고 이런 짓까지 하면서 녀석을 케어해 주기에는 너무 바빠졌거든. 위치도 위치고 길드에 있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이번 신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뿐만이 아니거든.”
“하긴… 파란은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았으니 괜찮은 신입을 많이 데려가고 싶겠네요. 이해는 가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뭔가 성과가 없거나 녀석이 달라지는 게 없으면….”
“길드에서 내보내기라도 하게요?”
“설마. 2파티를 맡기거나 훈련교관으로 빼거나 행정직으로 빼는 게 적당하겠지.”
“역시 정이 많다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누나.”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벙글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표정.
날 관찰하는 모습은 조금 찝찝했지만 일단은 도움을 준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니 목적은 완료된 거나 다름없다.
“바쁠 텐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 누나.”
“주식을 몇 개 사놨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요. 나중에 돌아오는 게 있겠죠. 뭐.”
“조만간 검은백조에서도 콩고물이 떨어질 일이 있을 거야.”
“연주 언니가 좋아하겠다. 아. 그리고 현성 씨한테 언제 시간 좀 내달라고 해주세요.”
“응?”
“우리 길드 마스터가 계속 보자고 하는데도 반응이 없지 뭐예요?”
“박연주 님이?”
“네. 뭐 들은 거 없어요?”
“아예 없는데….”
“아무래도 우리 언니가 현성 씨한테 꽂힌 것 같은 거 있죠? 저보고 자리 좀 만들어 달라고 난리예요. 이것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사람 고자 아니죠?”
“아닐…걸….”
조혜진과 뭔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입장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였다.
설마하니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와 묘한 열애설에 휩싸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당연하지만 이건 파란에 도움이 된다. 내가 모르는 것을 보면 김현성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희소식이야.’
이런 소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최근에는 틀어박혀서 연구만 한 모양이네요. 뭐 공식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것도 덕구 씨 관련 소식처럼 은근슬쩍 돌고 있는 이야기 였는데….”
“어떤 이야기?”
“파란 길드가 지금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가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의 여성편력 때문이라는 소문이요.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김현성은 몰라도 이기영한테는 완전히 들어맞는 소문이죠. 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렇게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무슨 매력을 보고 여자들이 자석처럼 달라붙는지….”
거기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지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내가 연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긴 많이 쓴 모양.
혹시나 다른 소문이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밖에 내가 들어보지 못한 소문은 있어?”
“글쎄요. 뭐 붉은용병이 이번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올 신입들에게 사활을 걸고 있다든가. 왜 용병여왕님 아직까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잖아요? 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세간에는 그렇게 보이고 있는 모양이에요.”
‘정답이야.’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조만간 대륙 8좌를 공식석상에서 발표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고요. 아마 이 소문은 신성 제국 쪽에서 퍼뜨린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헛소문이라기보다는 오피셜로 봐야죠.”
“좋네. 안 그래도 공식발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타이밍도 맞아. 아마….”
“튜토리얼 던전이 열린 이후가 되겠죠? 아! 또 파란의 이기영이 마를린 영애와 약혼해 캐슬락을 집어 삼킬지도 모른다는….”
“그건 헛소문이야.”
“그럴 줄 알았어요. 정보 출처가 마를린 쪽이었거든요.”
“별걸 다 알고 있네.”
“검은백조의 정보력이야 제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오빠 있잖아요?”
“응?”
“오빠네 길드의 김예리.”
“왜?”
“최근에 우리 길드 애랑 친하게 지내는 건 알죠?”
“난 걔에 대해서는 잘 몰라. 김예리를 케어해 주는 건 현성 씨 쪽이라서….”
“검은백조에 그만 들락날락거리라고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뭐 사고라도 치고 있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라… 사실 예리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가 제 직속인데… 그렇게 질이 좋은 아이는 아니거든요. 물론 나쁜 짓을 하는 건 않지만 여러모로 너무 요즘 애들 같아서…. 예리가 검은백조에 피해를 끼친다기보다는 저희 애가 그쪽한테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돼서요. 저희 쪽에서도 통제하기 꽤 애를 썩고 있어서….”
“뭐, 사이코패스라도 돼?”
“아뇨. 인성은 착해요. 재능도 있고 능력도 있고 실제로 앞으로 검은백조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만한 인재로 평가되고 있으니까요.”
“그 정도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히려 좋구만, 뭐. 파란의 미래와 검은백조의 미래가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정치적으로도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우리 길드의 꼬맹이는 항상 외톨이였거든. 오히려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될 지경인데 뭐. 현성 씨도 좋아할 거야.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석에 가까운 대사를 내뱉자 이지혜가 커다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시라야? 채시라?”
물론 커다란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니가 내가 필요해서 부르는 부분? 린정? 어 린정. 대륙 8좌로 내정된 이기영 오빠와의 만남에서 나를 불렀다는 건 드디어 지혜 언니가 나를 인정해 줬다는 부분! 오지고요. 지리고요. 고요 고요 고요한 밤에 나를 부르는 각이고요! 혹시나 셋이서 함께 놀아보자는 말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각이지만 의외로 설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요. 아앙!”
“아니야. 들어올 필요 없어.”
“…….”
문 밖에서 커다랗게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김예리의 검은백조 길드 출입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필사적으로 막을게.”
“네…. 아무튼 던전은 곧 들어가시는 거죠? 오빠가 주문한 건 전부 준비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시나리오대로 착착 잘 진행시켜 놓을 게요.”
“고마워, 누나.”
“뭘요. 우리사이에…. 아무튼 간에 잘해보세요. 그 덩치 큰 아저씨 그래도 사람은 좋았는데 이번 기회에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네요.”
“진심이야?”
“당연하죠. 본래 권력자한테는 그런 충신이 한두 명쯤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굳이 배웅은 안 할게요. 내 사랑.”
“응. 다음에 또 봐. 내 단짝.”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다.
제1차 박덕구 각성 및 강화 계획.
캡틴 린델 계획은 이후로, 일단은 녀석과 함께 던전에 진입하는 게 첫 번째다.
물론 그전에….
‘현성이한테 경고 한번 해줘야겠어.’
파란의 미래를 저런 식으로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