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회귀자 사용설명서 201화
이기영의 몰래카메라 (2)
“정말로 괜찮은 거요?”
“물론. 이제는 언제 또 이렇게 모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면 이런 식으로 붙어 다닐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 거야. 당장 신입들만 들어와도 정신없어 질 거고… 현성 씨도 그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던전행을 허락해 준 것 같다.”
“그렇지만….”
“조용히 머리라도 식히자는 의미도 있고… 간만에 나들이 간다는 생각으로 한번 돌아보자. 그 동안 여유부릴 시간이 없었으니까. 사람한테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거든.”
“형님….”
왠지 모르게 이쪽에 고마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박덕구의 표정이 보였다.
아마 이 던전행이 기획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
녀석의 입장에서 저런 표정을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런 시기에 갑작스럽게 던전행이라니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웠으니까.
이쪽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내가 던전 탐험을 기획하게 된 이유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정하얀은 아직도 박덕구와 불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이 원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 전까지 나도 녀석에게 별 말을 건네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잠깐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화해의 원정이라는 거다.
‘그렇지.’
아마 그 누구라도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게 당연하다.
자신이 생각한 방향과 전혀 다른 쪽으로 이 모든 일을 계획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거다.
제1차 박덕구 각성 및 강화 계획.
감독 이기영, 각본 이기영, 도움 이지혜.
김예리에게 무참하게 깨진 뒤에 질질 짜고 있는 녀석을 위해 준비한 진짜 선물이었다.
아니, 선물이라고 하기에도 조금은 잔인할 수도 있겠지만 녀석이 원하는 걸 얻게 해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조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기는 하지만 현재 박덕구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 가장 커다랗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4차 전직.’
파란의 파티원 들 중에서 아직까지 4차 전직을 하지 못한 채 희귀 등급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녀석 혼자다.
몬스터 웨이브에서 이미 차고 넘치는 경험치를 얻었으리라고 판단되는 녀석이 어째서 전직을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뭔가 심리적인 방벽이 녀석을 막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녀석은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고 뚜렷한 해결책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위기가 닥칠 때.’
박덕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별 것 아닌 추론이지만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였다.
녀석은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다.
김현성 파티는 천재들로만 이루어진 규격 외의 파티였고 박덕구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도 김현성이라는 규격 외의 존재에 의해 항상 모든 일이 해결되곤 했다.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정하얀의 보호 마법은 박덕구보다 먼저 후위를 막아줬고 파티원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천재들이 녀석을 위기에서 구출해 냈다.
율리에나와 결전을 치렀던 저주 받은 신단에서도 영웅 등급 이상의 몬스터였던 율리에나를 단독으로 처리 한 것은 김현성이었고 몬스터 웨이브에서도 녀석은 특출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묻어갔을 뿐이라는 거다.
‘경험치는 전부 채운 것이 맞지만….’
시스템이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녀석에게 어떤 직업을 부여할지 이 시스템이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그렇지만 실험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여러 가지로 캥기는 게 많았으니까.
굳이 이번에 직업이나 특성을 개화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만약 이번 원정에서 녀석이 부족함을 느낀다면 혈청을 받아들이게 하는 게 조금 더 쉬워질 거고 이번 일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메인 파티가 아닌 다른 쪽에 자리를 만들어 주면 된다.
그렇지만….
‘그럴 확률은 없어.’
만에 하나라도 녀석이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이 모든 게 그걸 전제로 만들어진 계획이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한번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돼. 아무리 희귀 등급의 던전이라고는 해도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둬야 되니까.”
“응. 기영이 아저씨 말이 맞아.”
“그건 알고 있소. 이번에는 현성이 형씨도 없으니까. 더욱더 긴장을 늦추면 안 되지.”
“물론 너무 힘을 주라는 소리는 아니다. 일부로 난이도가 낮은 던전으로 구입했으니까. 긴장할 때는 긴장 하되 너무 급하게만 움직이지 않으면 돼.”
“끄응… 굳이 던전을 사올 필요는 없었는데….”
“다른 길드들은 지금 튜토리얼 던전이 열린 이후의 일을 준비하느라 바빠. 싸게 구해왔으니까 부담 느끼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요.”
간만에 보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아니, 원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티를 안 내려고 하는 만큼 실실 잘 웃고 다니기는 하지만 조금은 여유로운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뭔가 초탈한 것 같은 느낌.
나름대로 소심하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저번 같은 모습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아.’
녀석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
당장은 나와 정하얀과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것 같은 느낌.
특히나 정하얀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쪽이 말해준 행동강령을 속으로 곱씹고 있는 정하얀의 표정이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쯧. 미련한 놈.’
저번 일에 대한 미안함을 사과해야 되는 건 오히려 정하얀이다.
어째서 녀석이 사과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솔직히 귀엽게 느껴진다.
괜스레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자 이번에 원정을 함께 할 파티원들 다섯 명이 시야에 비쳤다.
나, 박덕구, 정하얀, 김예리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과 여러모로 활약을 해주시게 될 사제분이 한 명.
본래는 선희영을 빼오고 싶었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
박덕구와 제법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황정연 역시 파란 행정 측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
사실 황정연은 이 계획에 중심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형편없는 연기력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율리에나 때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황정연은 드라마를 좋아하긴 했지만 연기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재능이 없다.
물론 나를 제외한 나머지도 마찬가지.
벌써부터 어색한 손짓과 몸짓으로 박덕구를 불안하게 하는 정하얀과 말이 없어 속내를 알 수 없는 김예리도 연기와는 거리가 멀다.
‘발연기.’
그래서 영입한 것이 붉은용병에서 차출해온 사제 안기모였다. 어떻게든 김예리와 정하얀의 만들어 놓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타이밍 좋게 덕구 녀석이 입을 열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사제님이랑 인사를 안 했던 것 같은데… 괜찮으면 소개 좀 해주쇼, 형님.”
“덕구는 처음인가?”
“뭐, 그렇소.”
“만나서 반갑습니다. 덕구 씨. 안기모라고 합니다.”
“아아아. 기모 형씨였구만.”
“하하. 네. 붉은용병 길드 소속으로 어쩌다 보니 연이 닿게 되어 이번 원정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희영 씨가 많이 바빠서 인맥의 힘을 조금 빌렸지.”
“아아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만.”
안기모의 합류도 조금 달가운 모양이다. 덕구 녀석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의외로 좋아하기도 했고 겉으로 보기에 안기모는 호감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모 씨.”
“아닙니다. 기영 씨. 파란은 붉은용병의 우방이기도 하고 마침 저도 굉장히 지루했던 참이라서요. 요즘 린델을 들썩거리게 만든 파티와 함께 하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클리어한 던전이라고 해봤자 영웅 등급의 던전 하나와 희귀 등급의 던전 하나가 전부고요.”
“몇 개의 던전을 클리어 했는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하하하….”
‘이 자식 자연스러운데….’
그럴 만했다.
듣기로는 연극을 전공했었고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대학로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는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었으니까.
원래는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 전투성직자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몸 어디를 봐도 근접 직군을 병행했었다는 흔적이 없다.
본인이 힘을 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겉모습은 일반 사제의 모습.
이미 저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이곳에 합류할 자격이 있다.
파티원들은 제법 떠들썩한 이야기를 나누며 던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걸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게 더 좋을 거라 판단해 피크닉스러운 분위기도 연출.
정하얀이 연기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박덕구를 묘하게 피하고 있어서 덕구 녀석이 불편해한다는 것만 빼면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좋아.’
애매하게 합류할 바에야 차라리 저런 포지션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김예리는 조용히 있다가 몇 마디를 던지는 것이 전부였는데 다행히 친구의 영향을 그리 많이 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친화력이 좋은 덕구 녀석이 안기모와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
길을 걷다가 앉아서 쉬는 시간이 많아졌고 하룻밤 자려고 지은 캠프에도 꽤 많은 공을 들였다.
술은 많이 마시지 못했지만 식사를 하며 목을 축이는 느낌으로 분위기를 즐겼다.
지금까지는 거의 모든 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
신경 쓸 게 많은 나 역시 간만에 여유를 즐길 기회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좋은 경치와 좋은 분위기.
좋은 음식을 이렇게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거나 다름없다. 재미있었던 것은 의외로 김예리가 요리를 잘했다는 것.
“신부 수업.”
어째서 이렇게 잘하느냐는 말에 짧게 대답한 그녀의 대답에는 조심스레 김현성 쓰레기 설을 곱씹어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파티는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점점 던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도시가 멀어져 쉽사리 돌아갈 수 없게 됐을 때 즈음에 안기모에게 슬그머니 눈치를 보냈다.
화기애애한 휴식시간은 여기에서 끝.
이쯤에서 운을 띄우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신호를 받아들였는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네. 기모 씨. 내일 오전 즈음에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희귀 등급의 던전이라고 말씀하셨죠?”
“네.”
“파티 구성을 보면 커다란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 같군요. 여기 계신 분들 정도라면 틀림없이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거 당연한 거요. 형님이랑 하얀이 누님도 있고….”
“대신 이 부근에 들어가시면 조금 긴장하셔야 될 겁니다.”
“아아아…. 그 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네. 이기영 님은 알고 계셨군요.”
나와 안기모의 대화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보였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 녀석의 얼굴을 본 안기모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아 덕구 씨는 모르고 있나 보군요.”
“무슨 소리요?”
“사실 몇 년 전에 이 부근에서 클랜 하나가 완전히 몰살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형 길드에 가입되어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사건이죠.”
거짓말이다.
“이 근처에서 말이요?”
“예. 당시에 린델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 알고 있는 이들은 전부 알고 있을 겁니다.”
“뭘 말이요?”
“살인여단.”
괜스레 장내가 차분해졌다.
조금은 달라진 분위기에 덕구 녀석이 침을 삼켜 넘기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미소 짓고 있던 안기모도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조금 긴장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자식.’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에 데려오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꽤나 수준급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
저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도 왠지 분위기 때문에 긴장되기 시작한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두 손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살인여단이라는 녀석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은 표정. 호흡이 살짝 거칠어진 것은 물론 표정 연기도 완벽에 가깝다.
혼을 실은 연기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자식… 영입하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연기 혼을 터뜨린 녀석이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신성 제국으로 넘어온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만든 머더러 클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고인이 되 버린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미래에 만들 클랜.
‘오늘도 신세진다, 진호야!’
녀석에게 고마운 마음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