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회귀자 사용설명서 212화
불길한 느낌 (4)
저런 표정은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 이후로 제법 오랜만.
나도 모르게 살짝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정하얀이 그때와 달라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최근에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고 이쪽이 싫어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많이 얌전해진 것은 당연지사.
그녀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건 거의 확신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다.
아무튼 간에 정하얀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한소라를 바라보고서는 잠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
이윽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는 모습은 의외로 귀엽게 느껴졌다.
“끄… 윽… 히끅.”
‘나중에 달래줘야지.’
가학적인 성향이 없다고 생각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귀엽게 보인다.
정하얀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라의 뒷모습은 제법 기뻐보였다.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간다고 느낀 것이 틀림없으리라.
대충 생각해 봐도 저 멍청한 여자의 시나리오는 무척이나 간단.
이쪽을 성추문으로 보내버린 이후에 조건을 올려 파란으로 입단하고 싶다는 개수작이겠지만 저런 방법이 먹힐 리가 없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상대가 나빴다는 거다.
대기업의 오너들도 성추문에 시달리는 지구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저런 발상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나 역시 기업의 오너가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 같은 포지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끄윽… 히끅….”
조금 복잡해 보이는 정하얀의 표정.
카스가노 유노 동침 사건 때 엄하게 혼난 게 자꾸만 기억에 남는 모양인지 자꾸만 머뭇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또 혼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에는 고개를 숙인 이후에 반대쪽으로는 우다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건 칭찬해 줘야겠다.’
카스가노 유노 사건 때 한번 단단히 혼낸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
정하얀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눈앞에 있는 멍청한 여자가 뒤를 돌아본 것은 당연하리라.
“후회할 거라고 말씀 드렸었죠? 이제 누가 당신을 지켜줄라나.”
“…….”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걸 느끼게 해줄게요. 저도 이렇게까지 하기 싫었다는 건 알아 두시고요.”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나가.”
“정하얀 교관을 찾아갈 거예요.”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정하얀 교관한테 달려가서 당신한테 성추행 당했다고 말할 거고 그 다음에는 붉은용병의 교관들에게 알릴 겁니다.”
“너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제가 당신한테 묻고 싶은 말입니다. 아무튼 간에 마음껏 발버둥 쳐보도록 하세요.”
“그래. 기왕 찾아가는 김에 하얀이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꼭 전해주고.”
“끝까지 허세는….”
“바쁘다니까? 빨리 나가.”
나름 비릿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뒤에 눈물을 머금은 연기는 봐줄 만했다.
안기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한 70점 정도….’
문이 쾅 닫힌 뒤에는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았는데 귀중한 시간을 버린 것 같아 기분이 더럽기는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마침 본인이 알아서 정하얀을 찾아간다고 말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다지 나쁜 계획은 아니었나.’
만약에 그녀의 작업 대상이 내가 아니라 타 길드의 일반 교관이었다면 조금은 그럴 듯하다고 박수를 보내줄 만했다.
정하얀이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시간을 노린 것도 그렇고 조금 치졸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약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당돌하기도 하고….’
어느 중견 기업에 일반 교관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겠네.”
적어도 결과가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같이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도….
‘제대로 건드렸지.’
정하얀은 의외로 영악하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힘의 차이를 제법 잘 이해하고 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를 처리할 때와 비교해 보면 제법 많은 게 달라졌다는 거다.
본인의 사회적 위치도 아주 잘 알고 있고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
누가, 어느 정도로 나한테 중요한 사람인지도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 이지혜와 디아루기아 같은 경우에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미 분류를 마쳐놓았다는 것.
강한 사람, 오빠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 조금 싫지만 해를 끼치면 안 되는 사람.
정하얀의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다 보니 알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녀의 성향이 아예 바뀐 것은 아니다.
정하얀은 여전히 질투심이 심하고 가끔 서늘한 표정을 보내올 때가 많다.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강한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도 아니다. 쓸모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위치도 굉장히 낮다.
단순한 추측이지만 이번에는 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체적 접촉이 없었다는 건 정하얀이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반응을 보니까 까먹은 것 같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장의 충격에 모든 걸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상관없지, 뭐.’
괜스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정하얀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에 이번 일을 제대로 하면 제법 큰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위로는 누구를 데려오지….”
* * *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는데….’
여러 가지로 많은 계획을 짰지만 생각보다 타이밍이 더 좋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베스트는 정하얀 교관과 이 상태로 마주치는 것.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좋은 상황은 그 멍청한 연금술사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놈은 이쪽의 손길을 거부했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에 혹시 이쪽이 모르는 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지.’
모든 게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그쪽만 숨기는 패가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오산. 어떻게든 교관들을 통제해서 소문이 확산되는 걸 막으려고 하겠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준비한 것이 많다.
여기에서 조금 더 확실하게 가는 것은 정하얀 교관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것.
아까 전 오열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평범한 여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성폭행, 추행하는 현장을 보는 게 얼마나 충격적일지는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본래는 붉은용병부터 찾아가려고 생각했었지만 나라 잃은 표정의 정하얀 교관을 떠올리자 이쪽이 조금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 지금 찾아가 사실을 알리고, 조금 구슬리다 보면 그 여자가 이기영의 적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는 거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정박아 하나 설득하는 건 일도 아니지.’
붉은용병에서 찾아가 여러 가지 조사를 받기 전에 그녀를 이쪽 편으로 끌어 들이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이기영 교관과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 있다.
그게 중요하다는 거다.
정하얀이 달려간 곳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몇몇 시선이 꽂힌다.
이런 건 확실한 증거가 되니 기쁜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애써 비집고 눈물을 흘리며 정하얀의 방문을 두들겼지만 대답이 없다.
“들, 들어갈게요, 교관님. 흐흐윽….”
“…….”
눈물 일발 장전 이후에 곧바로 문을 열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정하얀 교관이 시야에 비쳤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실례인 건 알지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 오해하실 것 같아서….”
“끄윽… 히끅….”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교관님… 저는 그냥 이, 이기영 교관님이 잠깐 임시 집무실로 오라고 하셔서… 그냥 영입 제의를 하실 줄로만 알았는데….”
“히끅….”
“오해예요, 정하얀 교관님.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오해?”
“네. 이기영 교관님과 그런 사이라서 그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
“말, 말씀드리기 굉장히 힘들지만… 이기영 교관님이… 흑….”
“…….”
“조용히 하는 말을 들으면 길드에 잘 말해주시겠다고… 저, 저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만….”
“히끅… 오빠가 그랬어?”
그렇지.
“네.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막무가내로….”
“만, 만, 만… 만졌어?”
“네….”
“어… 어디 만졌어?”
“말씀 드리기가….”
“어디 만졌냐고 묻, 묻, 묻잖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는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하얀은 훨씬 흥분한 상태였고 심적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게… 가슴이랑….”
“흐… 흐어어어어어어엉… 히끅… 어으아으으어어엉….”
‘이건 끝났네.’
지금쯤 멍청한 연금술사는 붉은용병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있겠지만 저 정박아를 끌어들이면 반쯤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오빠가… 히끅… 뭐라고 그러면서… 만졌어?”
“말씀드려도….”
“빨, 빨… 빨리 말해!!”
“매력적… 이라고 하시면서, 저는 물론 계속 안 된다고….”
“매력적?”
“네. 교관님이 있어서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자꾸 성적으로… 흐으윽… 끌린다고 하셨어요. 강제로 입을 맞추시고.”
“…….”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치마를….”
“아, 아, 아래도? 히끅….”
“네.”
“흐… 흐으으으윽… 히끅… 어으어으어으어아앙….”
‘진짜 엄청 질질 짜네.’
충격적인 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불로 온몸을 꽁꽁 감싼 뒤로 저렇게 울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울음소리에 정말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정도였다.
그만큼 심적 충격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쪽에 조금 더 유리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부분도 떠올려 보기는 했지만 아예 말을 나눌 상태까지 치닫는다면 곤란하다.
‘증언해야 되는데… 쯧. 귀찮게 됐네….’
“흐으으으으윽… 싫어… 싫어어어… 히끅.”
“충격이 크시겠지만… 정하얀 교관님.”
“죽, 죽여 버릴 거야….”
“그러면 안 돼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히끅… 끄으으윽… 어으어어엉… 죽, 죽, 죽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미친년. 이거 진짜 미친년인데?’
“일단 붉은용병에 가서 상황을 설명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그렇게까지는 정하얀 님도 곤란하실 테고…. 사건이 커지니까 일단은 증언을… 물론 이기영 교관님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이시면….”
“죽, 죽여도 될 거야. 쓸, 쓸모없으니까. 이번에는… 그렇지? 딱 이번 만 하는 거야. 정말로 마지막이야….”
“네?”
“안, 안 된다고… 그러면 안 돼! 오빠가 화낸다니까. 엄청 혼날지도 몰라. 이번에는 진짜야. 이번에도 접근 금지하면 어떡해?”
“뭐…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렇지만 쟤는 아무것도 없잖아? 빨강머리랑 장님처럼 오빠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야! 오빠가 따로 주의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고! 아직 말하지 않은 거 아니야? 아니야! 다르다고! 이번엔 그, 그, 그렇게 크게 혼나지 않을지도 몰라!”
“정하얀….”
“그래도 될까? 딱, 딱, 이번만 해도 되는 걸까? 응… 재능도 없는 걸… 오빠가 이번에는 착각한 거야. 아직 영입 제의도 안 했으니까. 으으응! 저건 쓸모없는 쪽이야!”
“교관… 님?”
“그래! 역, 역, 역시… 역시 죽이자! 안 돼…. 죽이면 안 된다니까. 죽이면 오빠한테 들킬 거야.”
“어?”
철컥.
“죽이지만 않으면… 그래! 죽이지만 않으면! 그럼 그렇게 하자. 그렇게!”
방 문이 잠기는 소리.
“히히힛….”
영문은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작은 단검이 가슴에 꽂혀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흘러나온 혈액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입에서는 고통 때문이 아닌 공포 때문에 튀어나온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