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회귀자 사용설명서 216화
귀여운 복수 (1)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가치로 둔다.
나 같은 경우에는 생존이었다.
김현성 버스에 올라타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없는 재능으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였다.
목숨을 걸고 차희라를 찾아가 주사위를 던져보기도 했고 성향이 맞지 않는 미친 늙은이를 한 큐에 보내버리기 위해 하루 종일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해 하루 종일 고민하고 생각했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을 폄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른 가치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내게는 유아영의 고민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이해는 되지만….’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20대 초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온갖 괴물이 사는 곳에서 마음을 둘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히 메리트가 있으니까.
일단 연인이라는 약속 자체가 서로의 정신적인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유아영의 생각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튜토리얼 던전에서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정신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김현성에게 투영해 보면 되는 건가.’
당연하지만 나 역시 따뜻한 회귀자의 품에서 엄청난 심신의 안정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
유아영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김현성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걸 생각해 보면….
‘이제야 이해가 가네….’
지금 나와 그녀가 시도해 보려는 실험 카메라의 예를 들어봐도 무척 재미있다.
혹시나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3자가 있고 이 제3자가 나에게서 김현성을 뺏어가려고 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눈알이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뭔가 초조해 보이는 유아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오빠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덕구 오빠 말을 들어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어서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요.”
“유아영 교육생 입장에서는 조금 충격 받으실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그보다 이제는 정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대화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들리지 않는 건가요?”
“네. 확실합니다. 물론 마력에 민감한 이들이나 감각이 예민한 전사들한테는 통하지 않겠지만 여기는 훈련소니까요. 저희 모습을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교관들이 전부일 겁니다. 공략조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대단하네요. 마법이라는 건. 몸을 투명하게도 만들 수도 있다니. 아니, 이 경우에는 정하얀 교관님이 대단한 건가요?”
“아마 다른 사람은 이 정도로 완벽하게 이런 마법을 다룰 순 없을 겁니다.”
공격 마법 말고도 정하얀이 잘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을 꼽으라면 당연 이런 종류의 스토킹 마법들이다.
정하얀은 위치 추적, 투명화, 수면 마법 같은 종류의 마법에 독보적일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스폐셜리스트다.
오죽하면 마도 길드에서는 정하얀 학파를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아마 내가 모르는 마법도 개발해 놨겠지.’
단순한 가설일 뿐이지만 그녀가 내 심장 박동까지 체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천천히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잡담이라도 하면서 기다려 보죠.”
“올, 올까요?”
“유아영 교육생은 그 사람이 오지 않는 걸 바래야겠죠.”
수업이 끝난 이후 빈 강의실로 찾아온다는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불합격이다.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본 이후에 구석진 자리로 향하려던 때였다.
강의실의 문이 드르륵 열리기 시작한 것.
실험녀나 실험남 둘 중에 하나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모습을 보인 것은 네 명의 여성.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세 명의 얼굴. 그녀들에게 붙잡힌 한 인형을 보니 곧 등장한 여성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소라 시녀들이네.’
물론 이제는 한소라를 괴롭히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녀들에게 붙잡힌 여자가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팔과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고 안대를 쓴 채로 다리를 쩔뚝이고 있는 한소라였다.
‘허미….’
이런 꼴을 보려고 투명화 마법을 받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강제 이벤트가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유아영이 알면 안 되는데….’
대외적으로 한소라는 정하얀의 마법 실험실로 부주의하게 들어갔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쪽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벌을 받았다고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한소라의 꼴을 보면 그렇게 발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희롱인가 뭔가 지껄이기에 화끈하게 폐인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누가 봐도 후자로 발표하는 것보다 전자가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상으로 아무 죄 없는 정하얀은 마법 실험실을 부주의하게 관리한 죄로 교관 자격을 박탈.
정하얀의 마법을 훔치려고 한 도둑 한소라는 소정의 위로금과 함께 정하얀의 실험실을 무단 침입한 죄를 묻지 않기로 하며 파란의 넓은 아량을 교육생들에게 보여줬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저들이 여기 들어오든지 들어오지 않는지는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시녀1, 시녀2, 시녀3이 성희롱 사건이니 뭐니 지껄이는 것을 유아영이 듣는다면 충분히 난처해 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100골드씩이나 받아 처먹었으니 아마 입은 다물고 있을 거야.’
시녀들도 한소라를 보고 느끼는 게 있을 테니 입은 다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시녀들과 한소라가 이곳에서 이벤트를 벌이는 건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쪽이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강제 이벤트가 벌어지기 시작.
끌고 온 한소라를 밀어버리니 그녀가 비틀거리며 강의실 끝의 구석에 쳐 박혔다.
당연하지만 이죽거리는 시녀들의 목소리도 귀에 들려온다.
“꼴좋네. 여왕인 척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장애인 다 됐네, 한소라 씨. 풉.”
“그렇게 깝치고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이기영 교관님 말이 딱 맞았지. 원래 가장 설치고 다니는 애들이 가장 빨리 엿 되잖아.”
“…….”
“표정 봐라. 표정 봐.”
“표정 풀어. 애꾸년아.”
“왜. 우리가 마음에 안 드나 보지.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자기한테 알랑방귀나 끼던 시녀들이 이제는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충분히 짜증날 만하잖아? 속으로는 우리 욕 무지하게 했을 거야. 그런데 소라 씨, 이제는 주제 파악 좀 하실 때도 됐잖아요!”
“…….”
본격적으로 한소라를 쥐어 패는 시녀들을 보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물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도가 조금 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야. 너무 심하게 때리지는 마.”
“괜찮아. 티 안나. 붕대로 감고 있는 곳 위주로 조지면 되거든.”
“아니, 저러다 죽으면 안 되잖아. 안 그래도 몸도 안 좋은데. 걷는 것도 힘들어 하는 년인데….”
“걱정 마. 원래 이런 독한 년들은 맞을 체력이 따로 있어.”
이건 좀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비명 한 번 안 지르네. 진짜 독하다니까. 저기요, 소라 언니. 말 좀 하세요. 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우리들이 더 화나는 거라고 생각 안 해봤어요?”
“…….”
“야. 그거 가져와.”
“아… 알겠어.”
물론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어째서 저들이 한소라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는 줄 알 수 있었다.
‘열등감 때문이구만.’
공교롭게도 네 명 다 연금술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다.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마력 회로가 박살 나 어쩔 수 없이 연금술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나머지 세 명의 학생들은 연금술 과정을 이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거다.
재미있는 부분은 저들 중에 가장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는 게 한소라 그녀라는 것.
애초에 나름대로 똘똘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이해력도 빨랐고 필사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하긴 독하지.’
재능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누가 봐도 필사적이다.
아마 저 시녀들은 그게 아니꼬울 것이다.
완전히 망한 줄 알았던 여왕이 슬금슬금 기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리가 없다.
유아영도 저들을 그냥 두고 보기가 쉽지 않은지 이쪽에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말, 말려야 되지 않을까요? 이기영 교관님?”
“아니요. 일단은 지켜봅시다. 물론 세 명의 교육생은 징계 처리할 거고 한소라 교육생은 나중에 따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투명 마법을 쓰고 숨어 있었다는 게 들켜서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아!”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한소라와 시녀들에게는 우리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귓속말은 왜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일단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 중 한 명이 가방을 들고 오며 이죽거리는 게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이게 뭐게?”
“…….”
“어디서 많이 본 물건 아니에요? 소라 언니?”
“내… 내놔.”
“우리 소라 언니가 드디어 아가리를 활짝 열었네. 풉. 왜 그렇게 무시하더니 이제는 이게 소중해지기라도 했나 봐요?”
‘히야… 진짜 악마들인데 저거….’
시녀 중에 한 명이 꺼낸 건 다름 아닌 개인 연금키트. 실습용으로 학생들에게 분배한 싸구려 연금키트였다.
“내놓으라고!”
저항하지 않던 한소라가 몸을 일으키며 쩔뚝거리며 달려들었지만 정상적인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손에 있는 물건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나 조금은 가슴이 짠해진다.
“내… 놓으라구!”
“성대모사 개 웃겨! 푸하하핫!”
“내놓으라고 했잖아!”
“내놓으라구 했잖아아아! 싫은데? 안 내놓을 건데? 야, 받아!”
“응!”
어린애를 놀리는 것처럼 연금키트가 든 가방을 서로 던지고 노는 꼴은 가관.
한 사람이 개인 연금키트를 놓치자 한소라가 쩔뚝거리며 다가가 연금키트를 꽉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시녀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쥐 잡듯이 잡기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놓지 않는 모습은 꽤나 강단이 있다.
“우리 소라 언니 진짜 독하단 말이야. 야, 저거 부수자.”
“어? 정말? 실습용으로 나온 비품인데?”
“뭐 어때. 지가 알아서 하겠지, 뭐. 다시 받아오든 말든 그건 지 책임이고 우리는 알 바 아니야. 어디까지나 지 부주의로 지가 부순 게 될 테니까.”
“하지 마….”
“뭘 하지 마? 소라 언니, 이거 부수지 말아달라고요? 싫은데 어떡하나? 언제는 생산직 주제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있네. 야, 잡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하기에는 늦었어요, 소라 언니. 풉.”
장담하는데 저 세 명은 미래에 훌륭한 악당이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
나도 꽤나 쓰레기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저들이 하는 모습을 보니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해 볼 정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쓰레기 삼 자매는 어떻게든 가방을 발로 밟으려고 했고 한소라는 필사적으로 가방을 끌어안으며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호하고 있다.
마치 박덕구가 나를 보호해 주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모양새.
그렇지만….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두 명이 한소라를 직접 붙잡고 나머지 한 명이 신명나게 연금키트를 밟기 시작.
싸구려이기 때문에 가방 안에 있음에도 키트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희들!”
“싫은데? 싫은데? 푸훕….”
“내가 잘못했으니까 하지 말라고!”
“싫은데? 야. 소라 언니 운다.”
“흐으윽… 하지 마….”
쓰레기 삼 자매의 쓰레기력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타인을 보며 쓰레기라고 느낀 것은 꽤 오랜만이다.
부서진 가방을 부여잡으며 끄윽 끄윽 울고 있는 한소라를 바라보니 저들도 흥이 식기는 식은 모양.
결국에는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소라야. 이제 주제 파악 좀 되지? 적당히 나대라고. 알았어? 괜히 열심히 하는 척하면서 동정 사는 거, 그거 역겹거든…. 애들아 이만 가자.”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소라 언니,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
“퉤! 아스가르드로 꺼져! 애꾸 오딘년아!”
“푸하하하핫 개 웃겨. 오딘이래!”
당연하지만 한소라는 저들을 따라 나가지 않았다. 가방 안을 확인하고는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해진다.
“흐어어어어엉….”
다시 한번 강의실의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수 교체인가.’
씁쓸한 표정으로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던 유아영의 표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1번 선수 쓰레기 삼자매가 나간 이후 2번 쓰레기가 등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