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회귀자 사용설명서 222화
성장한 똘똘이 (3)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딱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다.
정이 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쓰레기 삼 자매들 같은 이들은 그다지 곱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정이 가기는 했다.
‘대단한 정은 아니지만….’
당연히 학생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종류의 감정은 아니다.
힘들 때 찾아오면 밥 한 끼 사줄 수 있고… 별것 아닌 조언 한두 마디 해주는 것 정도.
딱 이 정도가 교관과 학생 사이의 적당한 거리라는 말이다.
사실 조금 다그쳤던 것과는 다르게 이들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걱정도 들지 않았다.
‘다들 지 밥벌이는 하겠지.’
라는 생각이 깔려있었기 때문.
실제로 한소라를 포함한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육생이 중견 길드나 대형 길드에 들어갔다.
애초에 이번 교육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무척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쓸 만한 연금술사들을 육성하는 게 이번 교육의 목적.
좋고 쓸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연금술사들을 각 길드와 클랜에서 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성적이 조금만 특출해도 대형 길드에 오퍼를 받았고 마력 능력치가 높거나 지력 능력치가 높은 이들 역시 여기저기에서 밀려들어오는 제안에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물론 전투직만큼의 계약금과 연봉을 챙겨갈 수는 없었지만 생산직치고는 과분할 정도의 계약금을 받고 새 출발을 시작한 셈이니… 마법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반쪽짜리 마법사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은 셈이다.
여담이지만 첫날에 조언을 무시한 채로 전투직을 선택한 이들은 대부분이 비참한 꼴을 당했다.
마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 이해력도 딸리는 마법사들은 갈 곳을 잃었고 재능이 없는 전사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 밥이 되거나 구걸을 하고 다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린델에서 연금술 붐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길드가 성적이 상위권에 위치한 한소라를 영입하지 않은 이유는 뻔할 뻔자다.
아마 정하얀의 연구실로 몰래 침입해 성과를 빼돌리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민감할 테니까….”
보통 이런 성향을 가진 이들은 집단에서 배척받는다.
물론 진실은 어줍지 않은 계략으로 내게 부딪쳤다는 것이었지만 쓸데없는 성희롱 모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이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
만약에 진실 그대로 외부에 발표되었다면 파란에게 밉보이기 싫은 모든 길드와 클랜이 그녀를 쳐내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보다는 이게 낫겠지.’
교육 기간 내에 오퍼를 받진 못했어도 아마 본인이 직접 입단 지원을 하고 면접을 받는다면 어딘가에 들어갈 확률은 높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쓰임새가 있는 셈이니까.
“한소라라….”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 들려온 것은 똘똘이의 비명.
“끄에에에에에에엑!”
곧바로 큰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쓰읍! 조용히 있어야지!”
“키엑….”
이런 경우는 무조건 단기간 내에 제압해야 된다.
정하얀을 보면서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런 성향이나 행동들은 초반에 강하게 억제하는 것이 옳다.
‘책으로 써도 되겠는데….’
그만큼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이해하게 됐다는 거다.
조금 얼굴을 찡그리자 역시나 이쪽의 눈치를 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다. 괜스레 죄책감이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아버님.’
이라는 정체모를 목소리가 속 안에서 울려 퍼졌다.
“디아루리아.”
“헥…헥….”
“둘이 같이 있을 때나 엄마랑 같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때는 조심해야 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빠도 디아루리아랑 같이 다닐 수가 없어요.”
“키엑!”
“똑똑하니까 아빠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거라 믿는다. 알았지?”
“키에에에엑!”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유아영… 그리고 김기철….’
혹시나 다시 게거품을 물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렁그렁거릴 뿐,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 모습.
이쪽이 보인 강경한 태도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좋은 시험대가 된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를 발견한 유아영이 입을 열며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기영 교관님!”
옆에 있는 남자 역시 뭔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다.
그렇지만 녀석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의기양양함이 서려 있었다.
“끄… 끄에에!”
“쓰읍!”
한 번 경고를 해주니 역시나 조용해진다.
“아, 유아영 교육생. 그리고… 김기철 교육생이군요.”
제법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
‘얘도 은근히 잔인해.’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 연기라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이지만 소름이 돋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김기철이야 다시 한번 자신의 여자 친구의 마음을 돌려놨다고 생각했겠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다.
“교관님. 저….”
“생각은 많이 해보셨습니까?”
“아니요. 아직은….”
“그거 아쉽게 됐군요.”
“수료식까지 대답을 미뤄도 될까요?”
‘이미 계약 했잖아, 너.’
연기력 역시 상당한 수준.
안기모에 비견될 만한 연기력이다.
“네.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이….”
“안녕하십니까, 이기영 교관님. 김기철이라고 합니다. 유아영의 남자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아아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그동안 아영이가 꽤 많이 신세졌다고 들었습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유아영 씨 같은 인재는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하하하…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군요.”
“예. 최근에 서로 오해가 조금 있어서….”
슬그머니 이죽거리면서 시동을 걸자 이쪽에 묘한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다.
감정의 정체는 열등감이다.
내 뒤에 매달려 그릉그릉거리고 있는 똘똘이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고 내가 입는 옷이나 풍기는 분위기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쯧쯧.’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남자의 질투가 추한 이유가 뭔지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 정도.
슬그머니 유아영에게 시선을 돌리자 입꼬리를 계속해서 올리고 있는 게 기분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얘도 이상해지지는 않겠지.’
이쯤 되면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그녀 같은 경우에는 아직까지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는 귀여운 복수라는 타이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거다.
조금 불안했던 것은 그녀에게 시선이 고정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위험한 것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키에에에엑….”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똘똘이 역시 그녀의 흉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유아영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저번에 말씀하신 디아루리아가 이 아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유아영 교육생.”
“귀, 귀엽네요.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슬그머니 가슴을 밀착시켜오는 것은 물론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누가 봐도 내게 이성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혹시나 똘똘이가 발광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몸을 부들부들 떨기는 했지만 공격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똘똘이보다 더 흥분한 것은 김기철.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는 누가 봐도 적개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사람 손을 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후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괜찮을 겁니다. 금방 친해질 수 있거든요.”
“정말인가요?”
“네. 말이 나온 김에 내일 저녁은 어떻습니까?”
대답을 한 것은 김기철.
“이기영 교관님, 아영이는 내일은 시간이….”
“네! 물론이에요! 교관님.”
그 말을 짜른 것은 유아영이다.
“아영아….”
“시간 괜찮아요. 물론 괜찮죠. 교관님.”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저… 교관님! 기왕 시간을 내는 김에… 이번에도 그… 부탁드려도 되나요?”
‘부탁하긴 뭘 부탁해, 이 여자야.’
정확히 뭘 부탁한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내뱉을 때 나오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왠지 모르게 상기된 표정과 흥분한 것 같은 떨림.
이상한 쪽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으니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천재.’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야릇한 상황이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연기는 누가 봐도 안기모 이상이다.
유아영은 능숙한 연기를 선보이는 안기모에 비견될 정도의 인재였다.
‘얘는 진짜 영입해야겠다.’
아마 자신도 자신에게 이런 재능이 있다는 걸 자신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장담컨대 안기모에게 제대로 된 지도를 받는다면 린델 여우주연상은 이미 따놓은 거나 다름이 없다.
“그… 저번에 알려주신 거 굉장히 좋았어서….”
‘뭐가 좋았는데… 아무것도 안 했잖아. 우리….’
갑작스러운 설정에 조금 당황한 것도 아주 잠시.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종류의 연기에는 호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아영 씨.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고… 아영 씨와 함께 있는 건 저로서도 즐거운 일이니까요. 저번에 미처 알려드리지 못한 것도 성심성의껏 지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다만 그 기철 씨도 있는데….”
“아뇨. 오빠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이기영 교관님이 더 잘 가르쳐 주시니까요. 그럼 그때 봬요, 교관님.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네.”
물론 내일 밤에는 식사를 하고 조금 더 늦게 돌려보내는 정도겠지만 김기철은 그렇게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
“무… 무슨 일인데? 내일 꼭 만나야 돼?”
“아아아… 오빠는 알 필요 없어.”
“뭐? 그게 할 말이야?”
“아니, 왜 그렇게 사람 하는 일에 이것저것 참견하려고 그래? 그거 집착 아니야? 쿨하게 지내자고 한 건 오빠였잖아. 내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아영아… 그래도….”
천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요물이네.’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누가 봐도 김기철의 목소리는 초조하고 유아영의 목소리는 여유롭다.
대놓고 바람 피냐고 물어볼 용기조차 없는 모양.
처용가의 처용은 딱 저놈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완전히 갑을 관계가 뒤바뀌어 버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다.
혹시나 내가 유아영과 조금 진한 애정표현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 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하기 싫은 상상을 할 것이 뻔할 뻔자.
내가 한 가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어?’
이쪽에도 한 명 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아니, 드래곤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어어?’
“끼이잉…. 끼에에엑….”
누가 봐도 구슬프게 들리는 똘똘이의 울음소리는 가관.
방금 나온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작스레 등 뒤가 서늘해진다.
물론 똘똘이가 이 묘한 분위기를 알아챌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녀석이 웬만한 사람보다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닭똥 같은 눈물이 계속해서 한쪽 어깨를 적시고 있는 것은 물론, 아무데도 가지 말라는 듯 허리와 다리로 나를 꼬옥 껴안고 구슬픈 울음소리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
“아… 아빠 바람 피는 거 아니다? 정말이야….”
정황상 쓰레기가 된 듯한 기분.
“아빠는 똘똘이밖에 없어요. 엄마 두고 바람 피는 거 아니에요.”
아니, 이미 쓰레기였다.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