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242화 (241/1,590)

# 242

회귀자 사용설명서 242화

잠깐의 휴식(1)

‘이거 안 좋은데… 아….’

정하얀과 상당히 오랜 시간을 붙어 다니며 그녀가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쓰레기 루트를 밟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하얀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간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순수했던 정하얀과는 다르게 죽이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는 거다.

당연히 지금껏 정하얀이 보여주는 음모는 귀여운 수준.

이를 테면 라이벌이 될 것 같은 여자의 나쁜 점을 은근슬쩍 이야기 한다든지 내가 자신의 눈물에 약하다는 걸 이용한다든지 따위의 어린애 장난이었지만 정하얀이 처음과는 달라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번 눈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건 여전하지만….’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녀 역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

힘의 차이, 권력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물론 본인이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 있다는 것도 그 누구보다 더 실감하고 있다.

차희라를 처음 만난 이후에 마법에 미친 듯이 열중한 것도 그런 이유.

강자라고 생각되는 이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도 어찌 보면 그런 이유였다.

물론 내게 중요한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지를 구별하는 분별력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녀가 훈련소에서 한소라를 넝마로 만들어 버린 배경에는 뒤탈이 없다는 생각 이전에 자신이 포식자의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기 때문이리라.

단순한 추측일 뿐이었지만 나는 정하얀의 행동 패턴을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데….’

정하얀이 강해지는 것은 물론 반갑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사고를 치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마력 능력치가 97….’

주요 능력치가 90대 후반에 들어선다는 건 대륙에서 강자로 들어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차희라가 특성을 이용해 근력 능력치를 뻥튀기하기 전에 97의 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봐도 설명이 된다.

이토 소우타도 민첩 능력치가 90대 후반이었고 지금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박연주 역시 90대 후반의 스펙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능력치로만 강함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아주 조금의 경험만 채워진다면 적어도 제국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제 본인도 그걸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애초에 이미 인식하고 있다.

본인한테 필요한 건 시간이나 능력치를 뻥튀기 할 수 있는 아이템의 존재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김현성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아이템을 선점한 것이다.

능력치를 얻은 이후에 헌신짝 버리듯 지팡이를 내버려 둔 걸 보니 한 번 더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바로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히히.”

자꾸만 히죽히죽 웃는 것은 전설 아이템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내 예상 때문일 터.

지금 당장에야 문제가 없지만 초반에 확실히 잡아놔야 한다.

던전에서 나간 이후에 언젠가 다시 한번 재교육을 할 필요가 있으리라.

‘얘는 꼭….’

주기적으로 멘탈을 잡아줘야 된다는 게 무척 귀찮기는 했지만 지고의 대마법사를 소환수로 부릴 수 있는 것치고는 싼 대가.

혹시 지금부터 사고를 치진 않을까 무척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아직도 내 팔을 붙잡고 검은백조의 여성진을 경계하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니 다시 한번 한숨이 튀어나왔다.

박덕구가 커다란 목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형님! 누님! 밥 드쇼!”

“오빠! 식사 준비됐나 봐요!”

“벌써 그런 시간이네.”

“네. 헤헤헤.”

“크으…. 거, 진짜 음식 맛이 기가 막힌다니까! 그 연주 누님이 직접 만들었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눈깔이 띠용 튀어나올 뻔했다는 거 아니요!”

“그래?”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연주 누님이 우리 길드 마스터 형씨를 좋아한다는 것 같다니까! 그래서 솜씨 한번 부려본 것 같소. 이건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의 촉이요. 냄새가 나. 냄새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마치 자신만 알고 있는 듯 내뱉으며 바닥에 철푸덕 앉는 꼴이 가관이다.

슬그머니 김현성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박연주에게 붙들려 이곳으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조혜진의 얼굴이 괜스레 뾰로통해졌다.

‘얘도 질투하네.’

내 앞에서는 항상 딱딱한 모습만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모양이다.

“아직 원정 중입니다, 덕구 씨.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혜진 누님도 그다지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우리 형씨가 박연주 누님이랑 꽁냥꽁냥하게 분위기 좋으니까 기분이 조금 다운된 거 아니요?”

“무슨….”

“큼. 굳이 밝히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연애 박사의 눈에는 전부 보인다니까.”

“쓰,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

“다른 길드 사람한테 홀랑 뺏기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가보는 게 좋을 거요. 저쪽 지금 분위기 좋은 것 같은데… 사랑의 전도사로서 그래도 조금 더 가까운 쪽이 우리 형씨와 잘되는 걸 응원하고 싶으니까. 이게 말이요. 같이 밥 먹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사실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아니요.”

“아….”

“원래 밥 먹다가 누나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는 거요. 벌써 검은백조의 누님들이 밀어주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가보라니까. 안 그러면 후회할 거요.”

“그런….”

“빨리 여보되기 전에 달려가 보는 게 좋을 거요.”

“굳이 그런 이유 때, 때문은 아닙니다만… 갑자기 길드 마스터께 보고드릴 게 생각이 나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

“네. 혜진 씨. 힘내세요.”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창을 챙길 여유도 없는 모양.

허둥지둥 대며 식판을 들고 일어나 김현성과 박연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귀엽네.’

저런 게 풋풋하고 예쁜 연애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다가오지 말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정하얀이나 선희영과는 뭔가 다르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선희영이 검은백조의 길드원들과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는 것.

아무래도 사제인 만큼 나름대로 자유분방한 면이 있는 저쪽과는 잘 맞지 않는 모양인 것 같았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오히려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그걸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내 눈에는 그게 보였다.

‘얘랑도 면담 한번 해야 되는데….’

그동안 방치하고 있기는 했지만 선희영도 주요 관리가 필요한 대상 중에 하나다.

그나마 그녀에게 신경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정하얀과는 다르게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한 생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래 왔다.

김현성이 조혜진을 부관으로서 신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선희영을 신뢰한다.

‘일 처리 확실하고… 이성적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외모도 이쪽 타입에 가깝다.

뭔가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 성당 누나 같은 스타일을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선희영의 외관은 이쪽의 이상형이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몸이 피곤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 모양.

잠깐 선희영에게 시선을 뺏기자 정하얀이 내 팔을 꽉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거 아니야, 하얀아. 흥분하지 마….’

정하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박덕구가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거, 형님.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요.”

“응?”

“지금 정말로 기분 좋게 쉬고 있기는 한데… 정말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소.”

“뭐가?”

“큼. 너무 편하게 쉬고 있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이 듭디다….”

“아아아아.”

사실 조금 그런 분위기이긴 하다.

어차피 영웅 등급의 아이템을 분류해야 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캠프를 차렸고 곧바로 식사를 준비한 이후에는 모든 원정대원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레인저들이 로테이션으로 주변 수색을 해야 했지만 그 이후의 시간에는 정말로 프리하게 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조용히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양반.

아예 캠프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고 검은백조의 몇몇 길드원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연금술사와 천재 검사가 사랑하는 법? 3권?’

나도 모르게 책의 제목에 시선이 향하자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 시야에 비쳤다.

확실히 린델을 강타한 소설이기는 한 모양이다.

‘저건 한번 읽어봐야겠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읽는 걸 보면 재미있기는 한 모양.

아무튼 간에 모두가 저렇게 마음 놓고 쉬고 있으니 녀석이 녀석답지 않게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벌려놓은 일을 완전히 모른 척하고 있는 걸로 보일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아….”

선희영이 작게 입을 열어왔다.

당연하지만 그 말에는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희영 씨 말이 맞아. 당장은 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금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애매하게 쉬는 것보다는 아예 대놓고 쉬는 게 나을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신의 파편인가 뭔가도 잠잠해 보이고 아무튼 정신 놓고 쉬어도 돼. 참고로 오늘 하루는 여기에서 야영할 생각이다. 물론 짧은 시간이겠지만….”

“정말이요?”

“응.”

‘일단은 쉬는 게 맞아.’

나라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갑자기 박물관이 무너져 내리고 고대신의 파편이 발광하기 시작하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걱정되는 게 당연하다.

사실 지금 상황은 내가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했으니까.

그렇지만 정말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

촉수를 막아내느라 무리하게 출력을 뽑아낸 디아루기아는 회복에 집중하고 싶은지 입을 닫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정대 내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현성과 박연주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제법 망가져 있는 상태.

물론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얻어 스펙 업을 한 김현성에게 기대를 거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녀석의 몸 상태가 정상일 경우의 이야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마음의 눈으로 녀석이 어느 정도의 대미지를 입었는지가 눈에 보인다.

그야 그 폭발 속에서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며 검을 휘둘렀으니 저렇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원정대원들에게는 웃으며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제법 절박한 상태라는 거다.

이쪽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가 발광을 언제 할지 모른다는 게 가장 불안한 일.

또 관리인 막스가 이쪽을 제거 대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일단은 푹 쉬어, 덕구야. 레인저들도 계속 돌리고 있고 위치만 확인하면 당장 움직인 다음 처음부터 수습하기 시작할 거야.”

“나는 괜찮소. 나보다는 형님이 걱정이지. 지금도 안색이 창백한 게 얼굴 정말 안 좋아 보인다니까.”

“이건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종류니까 괜찮아.”

위기의식이 없던 박덕구가 저런 말을 해오니 괜스레 내가 더 불안해 진다.

이쪽도 회복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될 것 같은 느낌.

슬그머니 디아루기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대신의 파편.’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디아루기아가 유일.

타이밍 좋게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것을 보니 본인이 만족할 만큼 회복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다.

마침 이쪽도 식사가 끝난 상황.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녀 역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박덕구는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고 정하얀도 함께 일어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으니 결국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모양.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없는 게 대화하기 더 편하다.

‘일단 먼저 들어야지.’

세상 멸망 어쩌고가 연관되어 있는 만큼 정보를 제한해서 푸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이기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그 방아쇠는 내가 당겨야 할 테니까.

어느 정도 원정대원들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예상대로 디아루기아가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그녀 역시 무척 급해 보이는 느낌. 확실히 상황이 심상치 않기는 한 모양이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디아루기아.”

“대륙이 부서질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수습을….”

“앞으로 3만 년 이후에… 대륙이 붕괴할 겁니다.”

“수습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어떻게 선조들을 뵈어야 좋을지…. 이 일을 해결하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수습할 필요가 없겠군요.”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세상이 무너진다느니 붕괴한다느니 하는 소식에 벌벌 떨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내가 죽은 이후에 일이 터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디아루기아는 내 대답에 다소 황당하다는 반응.

그렇지만 자꾸만 기분이 업되기 시작한다.

‘3만 년이면! 슈바!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거잖아!’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못난 조상을 둔 후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죽은 이후에 세상이 멸망하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일단 기분 좋게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욜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