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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43화 (242/1,590)

# 243

회귀자 사용설명서 243화

잠깐의 휴식(2)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황당하다는 표정의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쳤다.

수습할 필요 없다는 말과 너무나도 기뻐 보이는 표정에 할 말을 잃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너무 티를 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기분 좋은 걸 굳이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3만 년이면 응? 인류가 멸망하고도 남겠다.’

사실 인류가 멸망하든 멸망하지 않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자꾸만 고대의 어쩌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대륙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아니 실제로도 오래됐겠지.’

디아루기아만 해도 4천 년을 살았고 드래곤 로드라는 양반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 대륙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곳 인류의 역사가 오래됐다고 가정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하다.

확률은 낮지만 3만 년이 지나도 이곳의 문명이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다는 거다.

‘용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느낌이 또 다른 건가….’

디아루기아와 생명을 공유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도 제법 오래 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삼만 년이나 살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디아루기아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왔다.

“수습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꼭…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군요. 아니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신 겁니까? 고대신의 파편은 서서히 대륙의 생명을 흡수할 겁니다. 대기에 퍼져 있는 마력을 빨아들이고 저희가 밟고 있는 대지 역시 좀 먹기 시작할 겁니다. 생명체는 그 위에서 하나둘씩 죽어갈 거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아! 설마 뿌리내린 촉수가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박물관의 기능도 정지하고 있는 거로군요. 저희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저희는 안 전한 게 맞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정말!”

“아니, 왜 이렇게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흥분하시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디아루기아.”

“진정할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니, 시원하게 브레스 날리던 게 방금 있었던 일 같은데 왜 제게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솔직히 봉인을 푸는 데 가장 크게 활약하신 분이 누군데….”

“그, 그건….”

“혹시 용의 수명이 3만 년 이상입니까?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의 수명은 개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만 년 안팎으로 그보다 더 오래 살아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당신 역시 용의 배우자로서 저의 수명을 따라가 앞으로 약 6천 년 정도를 더 살아가게 될 겁니다. 중간에 무슨 문제가 없다면…….”

조금 길기는 하지만 오래 산다는 건 좋은 거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3천 년 후에 무너지는 게 아니니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우리 똘똘이도 1만 년 정도 편안한 생을 보낼 수 있고…… 만약에 똘똘이가 가진다면 음…… 그래도 별로 영향이 없겠군요. 손자까지는 무리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라뇨. 방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후손들이 전부 수습해 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미래는 후손들이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내가 내뱉고도 무책임하고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디아루이가의 표정에 대놓고 혐오스러운 감정이 표현되었지만 목숨을 걸고 다시 뛰어들 생각은 죽어도 없다.

‘미래는 후손들의 것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말은 그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대륙이 부서질 겁니다. 이건 지금 수습하지 않는다면 확정될 이야기예요. 저희의 손으로 세상을 멸망시킨 것과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선, 선조들의 어떻게 뵈어야 좋을지… 아아아.”

확실히 용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니 느낌이 조금은 다르다.

300년 이후에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듣는다면 아마 보통 사람은 조금은 동요할지도 모른다.

나 같은 소시민이야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상관이 없지만, 김현성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어쩌면 큰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거다.

아마 디아루기아가 그런 종류의 드래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수습해야 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수습해야 됩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아니, 디아루기아.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집시다.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거 그게 바로 우리와 똘똘이 아닙니까.”

“아니….”

“그래서 당신도 고대신의 봉인을 푸는 데 일조한 것 아닙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만 입 꾹 닫고 모른 척하고 있으면 우리도 행복하고 똘똘이도 행복하게 살 겁니다. 솔직히 방금 전은 운이 좋았던 겁니다.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예요. 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공감할 것이다.

살아남은 건 요행이며 운이었다.

심지어 고대신의 파편은 우리를 적으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꿈틀 거릴 뿐이었고 그것을 막는 것조차 버거웠다.

“대륙을 사랑하는 마음은 뭐, 이해가 갑니다. 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균형 어쩌고 하는 걸 보니까 뭔가 책임감도 느끼시는 것 같고요. 그렇지만 적당히 이기적이어도 된다는 겁니다. 수습하려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부 죽을 거예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홀로 남겨질 똘똘이도 생각해야죠.”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지독할 정도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얘는 진짜….’

고유 기벽조차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니 아마 똘똘이가 없었다면 내 한 몸 희생해 대륙을 지키자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똘똘이가 하루라도 빨리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저라고 대륙의 운명을 모른 척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똘똘이에게 필요한 건 대륙의 운명이 아니라 부모 아닙니까. 까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똘똘이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대륙에 남겨질 사람들이 중요합니까.”

“똘… 똘똘이….”

“그래요. 똘똘이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큼….”

“이, 이게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디아루기아에게도 들리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예비 프로그램인지 뭔지가 발동이 됐고 지금 균열 박물관에서도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저들이 준비하고 있는 게 실패한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서 막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손이 닿는 내에서 말입니다.”

“네….”

어깨를 툭툭 치니 괜스레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내 말에 조금은 공감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지는 별로 상관없다.

나에게는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한 만큼 그녀에게도 똘똘이가 가장 소중하다.

‘다행이야.’

똘똘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면 대륙의 붕괴니 세상의 멸망이니 이런 소리는 괜히 원정대원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보통 인간들이야 저같이 생각할 게 뻔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을 조금 맞춰 놓읍시다.”

“어떻게 맞추라는 건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히 고대신의 파편에 대해서죠. 지금까지는 당신이 몸을 회복하고 있어서 이것저것 물어오지 않았겠지만 아마 돌아가면 몇 가지 물어올 게 있을 겁니다. 지금 원정대원의 멤버 중에 고대신의 파편을 아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고 이 촉수가 어째서 박물관의 바닥에 박혀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당신뿐입니다. 모두 궁금한 게 많을 겁니다. 제가 대충 말해놓을 테니 거기에 신뢰감을 얹혀 줄 수 있는 소스만 뿌려주시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하기 싫으면 가만히 입 닫고 있어도 별로 상관하지는 않습니다만… 나쁜 일은 저 혼자만 하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하긴 하군요. 똘똘이를 위한 마음을 보여주세요.”

입술을 꽈악 물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양새가 우습다.

뭔가 순수한 걸 물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이러는 게 최선이다.

대충 어떻게 말을 맞춰야 좋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어?’

조금 이상한 물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눈에 보인 것.

‘저건 뭐야….’

우습게도 디아루기아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주변 마력이 이상해졌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틀림없이 디아루기아도 저 물체를 보지 못했다.

마음의 눈으로 투명한 물체를 힐끔 본 것은 당연지사.

[아네모네의 눈]

[피로 물든 보석 아네모네가 전해준 고유 마법 중에 하나입니다. 아네모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냥 정하얀이네… 휴….’

고대신의 파편이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은 아닌지 긴장한 것도 잠시, 그냥 정하얀이 염탐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거… 적응했나본데….’

사실 안심한다는 표현도 웃기다.

사실은 충분히 소름이 끼쳐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내가 정하얀에게 꽤 적응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신기했던 것은 저 아네모네의 눈이라는 이기영 몰래카메라가 디아루기아의 눈까지 속일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성취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당장 고유 마법으로 전해진 지식의 마법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긴 천재인 모양.

아무리 술식이나 주문을 알고 있다고 한들, 마법을 바로 실현시키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잠깐 동안 탄성을 내지르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정하얀의 성장이 아니다.

뭘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원정대원들에게 말을 잘해놓는 것.

정하얀이야 어차피 인류나 대륙이 멸망하든 말든 그다지 상관없을 테고 내가 원정대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다면 분명히 협력할 것이다.

대충 이야기를 마친 이후에는 원정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

정하얀이 만들어낸 아네모네의 눈은 계속 내 뒤를 따라오다 한순간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이제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아네모네의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마법을 해체한 것이리라.

“오… 오빠!”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산가족 상봉하듯 달려오는 모습은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다.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자 똘똘이인 양 그릉그릉 소리를 내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에게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식사를 마친 김현성과 박연주가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일단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먼저 이야기를 듣고 오셨군요.”

“네.”

“안심해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박연주가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낙관적인 내 표정에 슬그머니 희망이 생겨나는 모양.

다른 원정대원들도 모두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휴식을 취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일단은 디아루기아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살짝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어오는 순수한 유부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고대신의 파편이… 휴, 휴식기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무표정의 얼굴에는 남들이 알아볼 수 없는 지독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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