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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44화 (243/1,590)

# 244

회귀자 사용설명서 244화

잠깐의 휴식(3)

“휴식기 말씀입니까?”

“네.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상태를 취하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다는 표현한다면 여러분들이 더 이해하기 쉽겠죠.”

“그거… 다행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박연주.

그리고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김현성.

다른 원정대원들도 모두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꼬여 고대신의 파편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렸을 수도 있으리라.

솔직히 상상도 하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그때 살아남은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였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혹시나 녀석이 다시 한번 지랄발광을 하지 않을지 걱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타이밍에 그 괴물이 휴식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게 하기에 충분한 소식이라는 거다.

실제로도 녀석은 일종의 휴식기에 들어간 게 맞다.

물론 본체는 예비 프로그램과 힘 싸움을 벌이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멀리 떨어진 촉수는 박물관의 시스템, 아니, 대륙 전체를 빨아들이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면 녀석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박물관에서 준비한 균열 수호자들의 안배도 있으니 일이 곧 수습… 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일이 잘 풀렸군요. 기영 씨의 선택이 옳았을 거라고는….”

“요행이었습니다. 실제로 위험했었고요. 운이 좋았죠. 조금 늦었지만 원정대에 폐를 끼친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은 도박이었습니다. 저희뿐만이 아니라… 린델에 있는 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과라뇨. 무작위로 신화 등급의 몬스터가 뜬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기영 씨가 일을 잘 수습해 주셨기 때문에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이 맞습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감사드리고 싶네요. 그때 보여준 기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몇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띄워 주시면 부끄럽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눈앞에 있는 상황만 수습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저도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일이 틀어졌다면 내 입장도 꽤 난처해 졌으리라.

솔직히 역적으로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대신의 파편이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요?”

“그건 디아루기아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아… 네. 사실 저도 자세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살아온 시간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어머니나 할머니께 들었을 뿐이니까요. 태초부터 존재해 왔고 대륙을 위험에 빠지게 할 존재라는 것 정도밖에 아는 것이 없습니다.”

“관리인 막스가 한 말이 맞기는 했군요. 정말로 황당하네요. 저희가 있는 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대신이니… 파편이니… 신화적 존재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로 실감이 안 나요. 아마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태였다면… 더욱 실감나지 않았을 거예요.”

“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4천 년이 넘게 살아왔지만 그런 존재들은 이야기로나 들어 왔습니다. 물론 이런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봉인된 채로 말입니다.”

디아루기아가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을 때 옆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봉인하지 말고 죽이면 되는 거 아니요? 왜 이 박물관에서는 이런 귀찮은 짓을 한 건지 모르겠소.”

“고대신의 파편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격을 얻은 이라기보다는 신 그 자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니까요. 균열 수호자들이라는 자들 역시 파편을 봉인시키는 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물론 자신들을 너무 과신한 것이 실수였겠죠. 그 봉인이 깨질 줄은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음… 그렇구만….”

“휴식기에 들어갔다면 지금 박물관에 뻗어 있는 촉수는 뭡니까?”

안기모의 질문에는 내가 대답해도 상관없으리라.

지금까지는 잘해내고 있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말하는 게 불안불안한 느낌이 있었으니까.

물론 충분히 만족스럽기는 하다.

평소에도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니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말하는 내내 죄책감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눈이 별로 좋지 않은 대중들은 그녀의 죄책감을 캐치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기존에 했던 추측이 맞습니다. 아마 박물관의 시스템을 다운시키려고 하는 거겠죠. 지금까지 자신을 묶어두고 있던 봉인이었으니…. 휴식기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녀석의 본체는 예비 프로그램인가 뭔가와 힘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마저도 얼마 걸리지는 않겠죠.”

“아아아아. 그렇구만….”

“그렇군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모두를 향해서였다.

“정리해 보자면 커다란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비 프로그램은 휴식기에 취한 녀석을 봉인할 거고 아마 높은 확률로 봉인하는 데 성공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네. 그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봉인이 완료되기 전에 고립된 이들을 구출한 이후, 박물관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시스템에도 구멍이 생겼으니 굳이 박물관 탐험을 완료하지 않아도 던전을 나가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퀘스트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겠죠? 봉인이 완료된다면 다시 박물관이 시스템의 영향 아래 놓일 수도 있으니까….”

박연주의 대답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 막스가 정말로 파편을 봉인하는 데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본체가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은 없다.

지상으로 튀어나와 촉수로 세상을 후드려 까며 멸망시키는 종류가 아니라, 얌전히 대륙의 생명력을 빨아먹기만 하는 녀석이라면 굳이 힘들게 봉인에 한 손을 보탤 이유가 없다.

만약에 녀석이 봉인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원정대가 봉인됐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

뒤탈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무튼 간에 결론을 말하자면… 최소한 저희들은 고대신의 파편의 영향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네. 대륙 역시 안전합니다. 지금 당장은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네.”

“…….”

“대륙은… 대륙은….”

“…….”

“대, 대륙은… 안전합니다!”

디아루기아가 눈을 꽉 감으며 마지막 말을 쥐어 짜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탄성을 냈다.

작게 주먹을 꽉 쥐는 사람들도 보였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인원들도 보인다.

박덕구 녀석도 여성진과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된다.

“물론 기뻐하시기에는 이른 게 사실입니다. 아직 던전 공략 자체가 완료된 게 아니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고립된 생존자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암 그렇고말고!”

“사실 이 넓은 지역에서 고립된 이들을 찾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파티는 박물관의 관리실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을 잇자 김현성이 입을 열어왔다.

경험이 많은 녀석인 만큼 어떻게 그쪽으로 들어가야 할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파편의 촉수를 타고 들어가면 박물관 관리인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겠군요.”

“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촉수를 타고 들어가 박물관 관리인 막스를 찾아내고….’

생존자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관리인 막스의 행동에 따라 녀석을 메인 빌런으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해봐야 될 것 같았다.

순순히 위치를 알려준다면 고맙겠지만 아마 이쪽에 받은 빅 엿이 있으니 우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녀석이 이쪽의 호의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토해내게 될 거다.’

장담컨대 지금 녀석은 이 원정대의 깽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금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사태를 정리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이다.

관리인 실만 찾아 녀석과 마주친다면 이쪽이 갑이 될 확률이 높다.

‘아니면 그냥 해치워도 되고….’

사실 관리인 막스는 이 던전에 숨겨진 히든 네임드 몬스터.

대충 들어도 아름답게 들려오는 울림. 행복 회로를 풀가동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상황을 정리하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야지.’

혹시나 원정대에서 입지가 적어질 녀석을 배려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 빠르게 내가 열어준 길로 훅 들어오는 것을 보니 능숙하기는 능숙하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

내가 한 번 긴장을 풀어줬으니 이번에는 녀석이 한 번 꽉 조여 줄 차례다.

“지금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모두들 긴장을 늦추시면 안 됩니다. 파편이 휴식기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이 던전이 위험하다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관리인실로 가는 방향에 박물관을 지키기 위한 다른 프로그램이 있을 수도 있고… 파편의 영향을 받은 다른 몬스터들도 깨어났을 확률도 있습니다.”

“…….”

“관리인실을 찾아 들어간다고 해도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박물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지금은 한숨 돌린 것뿐이지 공략을 완료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자식이 너무 조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

“휴식을 취하는 것도 공략에 꼭 필요한 임무 중에 하나죠. 출발은 4시간 뒤에 하겠습니다. 모두들 전력으로 몸을 회복시켜 주세요. 꼭 아무도 죽지 않고 린델로 귀환했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히 회귀 전에 이런 던전 공략을 많이 참여하긴 한 모양.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좋네.’

아마 내가 같은 말을 해도 이런 신뢰감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외관도 대중에게 신뢰감을 주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고양감을 심어주기에 적절한 셈.

굉장히 마음에 든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박연주와 조혜진, 심지어는 검은백조의 몇몇 역시 녀석에게 묘한 시선을 보내는 중.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의 반응이라는 인터넷 게시물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 저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 게시물 보다 더하다고 생각했다.

‘반했네. 반했어.’

별것 아닌 연설에도 눈을 빛내는 이들을 보니 황당함을 넘어 당황스러울 지경.

아무튼 간에 김현성의 말대로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세 시간만 쉬고 이동할 생각이었는데 녀석도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말로 하면 4시간 안에 완벽하게 몸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안 그래도 쏟아지는 잠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와 같이 몸의 회복이 절실한 이들은 알아서 캠프를 차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다시 한번 저마다의 휴식으로 방법을 취하고 있는 모습.

간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꽤나 안락한 공간이 나를 반겼다. 당연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물론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나와는 다르게 시종일관 불편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디아루기아는 마음 놓고 쉴 수 없을 것이다.

‘쯧….’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어울리지 않게 중얼거리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디아루리아를 위해서였어….”

“…….”

“사랑하는 내 딸을 위해서였어요. 어머니… 할머니, 죄송해요.”

양심이 쿡쿡 찔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디아루리아를 위해서였어요. 흐윽.”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 역시 죄책감이 엄습해 잠을 자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을 감은 순간 달콤하기 그지없는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쓰레기 같네.’

다시 한번 내 인성에 대해 의심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솔직히.

잠은 달콤했다.

후기

디아루기아: 4천 년간 살면서 한 첫 거짓말이었어…. 더럽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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