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
회귀자 사용설명서 266화
제1황녀 샤를리아(3)
“길들이기네요.”
“…….”
“그러니까 그 늙은이는 적당히 구워삶았어야죠. 누가 봐도 황제가 지나치게 호의적인 것 같던데, 황녀 입장에서 경계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대충 봐도 어떤 스타일인지 알 것 같고… 누가 봐도 오빠랑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싫어하는 것 같던데. 이해가 안 되네. 오빠 같은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눈앞에 있는 인간에게는 호감형이겠지만 그 반대는 다르다.
“이번에는 오빠 실수가 맞아요. 물론 저도 황제가 그렇게까지 오빠를 좋아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요.”
“흠….”
파티가 끝난 이후에 잠깐 시간을 내준 이지혜의 말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최고 한두 달은 잡았던 계획이 하루 만에 끝장 난 상황이었으니 그녀가 나를 경계하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 입장에서도 오빠를 내치기는 어려울 테니까… 제국 8좌의 일원이기도 하고 다른 귀족들이나 교황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죠. 아마 적당한 시점에 오빠에게 접선해 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길들이기가 끝나고 나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단순히 사람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밀어낼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 같으니까. 만약에 그냥 오빠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라면 그 멍청한 1황녀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봐도 되겠죠. 뭐, 그럼 제국은 끝장이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
이지혜가 말한 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다른 귀족들과 많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역시 그 원인일 터. 집단 내에서 내 영향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기 황권 주자나 다름없는 자신마저 이쪽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기영이라는 인간주식이 폭등할 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 앞에서 황제와 친근한 관계라는 걸 보였고 교황청과도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모르는 이들이 없다.
최소한의 억제제가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자신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혹시 내가 교황청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경우다.
황권과 교황청은 기본적으로는 신성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미묘한 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만약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황제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샤를롯트가 이쪽을 개 무시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뭐,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쟁점은 이지혜가 말한 그대로다.
‘길들이기.’
단순히 자신에게 납작 엎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쪽을 입맛대로 주무르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꽤 짜증 나실 거예요. 아마 오빠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위치를 조금씩 깎아내릴 거고….”
“손발을 잘라내겠다는 거네.”
“글쎄요. 그 정도까지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밟아 놓겠죠. 그리고 그 이후에 접선. 솔직히 지금의 오빠는 황녀가 먹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크거든요. 적당한 사이즈로 줄여놓은 이후에 한 입에 삼켜 드시겠죠?”
“이거 짜증 나는데…. 그 작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나를 갉아먹으려고 한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교황청 쪽이나 카트린 공작부인 같은 확고 세력이야 별문제 없겠지만….”
‘그 이상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
“그 이상 잃어버리는 걸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맞아.”
내 생각을 알아차리는 게 귀신같다.
“글쎄요. 아마 그 정도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시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지금 양보하면 이후에 더 큰 걸 얻을 수도 있고… 한 번 접고 들어간 이후에 천천히 황녀를 구워삶으면 되는 거 아닌가? 미지근한 곳에 던져놓은 개구리처럼. 오빠 그런 거 잘하잖아요. 같은 편인 척했다가 뒤통수 치는 거.”
“칭찬으로 들을게.”
하고 있는 생각이 무척 비슷하다.
물론 나 역시 이 부분에서는 이지혜와 의견이 일치한다.
한 번 접고 들어가면 오히려 황녀를 이쪽에 입맛에 맞게 바꿀 가능성도 있다.
황녀가 쳐냈던 지지 세력도 다시 돌아올 거고 오히려 전보다 더 힘을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기에는 오빠가….”
“맞아. 난 의심이 많거든….”
빼앗아 가거나 밟아 놓으려는 것이 내 소신이나 자존심이라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지만 그게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면 양보하기 꺼려진다는 거다.
“난 이런 부분에서는 절대로 양보 안 해.”
“황녀랑 한 판 해보게요?”
“아무리 그래도 차기 황권 주자한테 밉보이는 건 조금 그렇긴 한데… 방법은 생각해 봐야지. 아직 시간은 조금 있으니까.”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네요. 제가 준비해야 될 일이라도 있나요?”
“아직은 없어. 이쪽에서도 생각해봐야 될 게 많으니까. 이 이야기는 잠깐 접자. 나중에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줄 테니까. 누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줘. 안 그래도 머리 아픈 타이밍인데 짜증 나네. 아, 그보다 식사는 어땠어?”
“무슨 식사요?”
“왜 그때 우리들이 황제한테 접선하러 들어간 다음에 수행원들끼리 따로 밥 먹었었잖아.”
“아… 뭐가 궁금해요?”
“하얀이가 잘 적응했는지가 궁금하지.”
“나쁘지는 않았어요. 말도 잘했고… 오빠랑 떨어져야 한다는 소리에 조금 짜증이 올라온 것 같기는 했었는데… 엄청 저기압이었죠.”
“뭔 문제 있었어?”
“다완에서 온 수행원 중에 한 명이 하얀 씨한테 꽤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뭐?”
“식사 시간까지는 괜찮았는데, 끝나고 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그 남자가 살짝 어깨를 건드렸나….”
“그래서?”
“뭐, 그대로 으스러지더라고요. 저야 마법이니 뭐니 모르지만 공간이 그대로 일그러지면서 그 남자 팔도 같이 우두둑거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비명 막 지르고 어깨까지 마력이 타고 올라가는 게 보이는데… 같이 온 수행원 중에 사제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불구가 될 뻔했다니까요.”
“그걸 왜 지금….”
“당연히 묻어 버리기로 서로 합의했으니까죠. 저야 오빠 만날 시간도 없었고요. 일 저지르고 나서 조금 당황한 게 보였는데… 오빠한테도 이야기 안 했을 거라는 제 예상이 잘 맞았네요. 이건 누가 봐도 문제가 될 수 있어서 그냥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어요. 남자 쪽에서도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니까.”
“잘도 합의시켰네.”
“숙녀의 몸에 손을 댄 게 잘못이죠. 뭐, 일이 커지는 건 그쪽도 원하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린델의 세력이 가장 크니까. 이래서 권력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정하얀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붙어 있을 때는 티를 잘 안 내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불만이 쌓인 모양.
이지혜가 그나마 옆에서 수습을 해주고 있다는 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돌봐줄 시간이 없으니까.’
수행원으로 이지혜를 데리고 올 박연주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얘도 잘 적응하는 것 같고….’
대부분의 수행원들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무척 잘 적응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본인이 더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지혜는 이지혜다.
이쪽이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의식했는지 한쪽 머리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것 외에는 별 사건 없었어요. 분위기가 조금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정작 윗대가리들은 친한데. 아마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그쪽도 하얀 씨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언질 받은 것 같고, 태도가 달라진 것만 봐도 척이죠.”
“그렇다면 다행이네. 혹시라도 커지면 이야기해 줘.”
“그럴 일 없어요. 직접 나설 필요도 없고… 다만 하얀 씨한테는 잘 말해주세요. 수습하는 건 상관없지만 솔직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요.”
“응. 경고는 해둘게.”
“그거 잘 됐네요.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죠?”
“고마워, 누나.”
“뭘요. 나도 받은 게 있는데. 혹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줘요. 아, 그리고 황녀 관련해서는 꼭이요. 오빠가 노선을 정해야 나도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내 사랑.”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혜는 살짝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후다닥 나가버렸다.
평소처럼 몸의 대화 어쩌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하얀이 은근히 신경 쓰였던 모양.
최근에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랄 만했겠네.’
아마 멍청한 남자의 으스러진 손 보다는 정하얀의 표정이 더 기억에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짜증이 머리까지 치솟았을 때 정하얀이 보여주는 표정은 항상 같이 다니는 나도 적응이 안 된다.
‘한마디 해야겠어.’
이쪽이 물어봤을 때는 분명히 별일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수습되었다고는 해도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경고를 주는 것이 맞으리라.
안 그래도 요즘 너무 풀어준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앞으로는 떨어져야 할 시간이 더 생길 수도 있는 만큼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때마침 문이 철컥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
누구인지는 뻔하다고 생각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리 와서 앉아.”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선보이는 것은 당연.
시작부터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걸 보여 줘야 효과가 있다.
애매한 태도는 이미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정하얀에게는 약발이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쯤 자신이 실수한 것을 되새김질하며 들어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리라.
“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
확실히 고민하고 있는 느낌.
아마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다. 차라리 오지 말고 문 앞에 서서 대답해. 지금은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눈물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약해진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지금쯤 닭똥 같은 눈물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기영 씨.”
“어….”
찾아온 손님은 정하얀이 아니라 김현성.
순간적으로 얼굴이 빨갛게 변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
혹시나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표정을 보고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
그렇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들어와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와서 앉으시죠. 하얀이인 줄로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죄송하군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괜스레 서로 민망해지는 상황.
시선을 고정시키기가 어렵다.
이럴 때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다.
김현성도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 조금…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네. 뭐라도 말씀해 주세요.”
‘시키면 해야지.’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이쪽에 직접적으로 뭔가를 해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었다.
이유 모를 뿌듯함과 함께 궁금증이 몰려들기 시작.
녀석이 뭘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부탁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뭐지?’
김현성은 꽤 진지한 표정.
민망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다.
말을 이으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녀석의 입이 열렸고 나는 조금 당황스럽게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2황녀 샤를롯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