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회귀자 사용설명서 269화
그 아버지에 그 딸(1)
누가 봐도 창백해져 있는 샤를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물론 당황스러울 것이다.
내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맞지도 않은 가면까지 썼는데 이런 식으로 본성을 들키니 여간 당황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시녀 둘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은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저들로서는 벌벌 떨고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듯이 샤를리아가 입을 열어왔지만 제대로 된 변명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누가 봐도 정황은 명백했고 한마디로 빼도 박도 못 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굳이 설명하실 필요도 없고요. 생각해 보니 마침 딱 식사시간이라 저녁이라도 함께하면 어떨까 싶었을 뿐입니다. 일단 이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뭣하니 장내를 조금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문 밖도 부탁드립니다. 들어오기 전에 조금 거친 방법을 사용해서….”
“아….”
“그리고 좀 전의 무례는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아무래도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조금 더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 아니….”
“황녀 전하는 제가 모실 테니 만찬을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까지 엎드려 있는 시녀 둘을 일으키자 머뭇거리는 모습들이 눈에 보였다.
샤를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니 도망치듯 바깥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차는 맛있었습니다.”
“다, 다행이군요.”
“샤를리아 황녀 전하, 그렇게 민망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방금 그건….”
“다 알고 있습니다. 아래 것의 실수를 바로잡고 계신 중이셨지요.”
“아… 네. 네.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손님 응대의 차질이 생겼으니 화가 나실 만합니다. 만약 제가 황녀님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충분히 화가 났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본래 한 번 말해서 되는 인간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는 법입니다. 황녀 전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았으니 저들이 벌을 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만….”
“이기영 명예주교님은….”
“네?”
“정말로 저를 이해해 주시는군요.”
“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동류라고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가 악의는커녕 호의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더 솔직해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의 대화까지 용인이 되는지 그 선을 간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조금 부족한 이가 많습니다.”
“그야… 황녀님과는 다른 이들이지요.”
“대부분이 멍청하고….”
“아, 그렇습니까?”
“그 태생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한 번 말하면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저들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조금 호응해 주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오는 것이 보였다.
신나서 입을 여는 것을 보니 황녀의 표정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저 황녀와 오랜 친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 정도야 쉽다.
“음음. 그러실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가슴이 아픕니다만, 아무래도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필요하지요.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내숭을 완전히 버리기는 힘든 모양이다.
‘기강을 바로 잡는다’라는 걸 주제로 물타기를 해보려는 것 같지만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솔직하다.
그사이에 만찬이 준비되기 시작.
식당이 아니라 이곳에서 식사를 할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놨기 때문에 테이블을 세팅하는 동시에 에피 타이저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녀들은 극도로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까 이 방에 있던 이들과는 다른 이들이 들어왔지만 그들 역시 손을 덜덜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황녀가 함박 미소를 짓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모양.
내가 생각해도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후후훗. 사실은 아버님께 이기영 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지 궁금하군요. 황제 폐하께서 또 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걱정이 됩니다.”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번에 있었던 일로… 그… 제 실수에 대해 변호해 주셨다고….”
“하하. 변호라는 말은 어울리지는 않는 말입니다. 맞는 말을 했을 뿐입니까요.”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께서 몇 번이고 당부하시더군요.”
“어떤….”
“이기영 명예주교님께 꼭 사과하는 시간을 만들라고…. 물론 아버님 때문에 이기영 님을 이 자리로 모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 제 실수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말씀 드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커서….”
“아하….”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불길하게 울리는 대목이긴 했다.
특히나 황제가 샤를리아를 먼저 움직였다는 소리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혹시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어떤 호기심을 품고 계셨을지 궁금하군요. 이해는 됩니다. 대부분의 귀족들 역시 저희 소환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특히나 제국 8좌로 임명된 지금은 더욱더요. 혹시 모험일지 같은 것도….”
“그렇지 않아도 어제 잠깐 동안 파란 길드에서 내놓은 일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하. 그건 참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우연이로군요. 사실은 저도 샤를리아 전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지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닿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식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잠깐 말을 멈추고 시녀를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오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계속해서 뭔가를 말할 타이밍을 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도움을 준 모양이다.
“저… 황녀 전하 스테이크는.”
“레어로.”
“저도 1황녀님과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디저트는 한 시간 이후에 가져다 주셔도 됩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아서.”
“네. 알겠사옵니다.”
사실은 웰던이 취향이지만 황녀와 같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거의 익히지도 않은 시뻘건 고기가 나오자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익숙하게 칼질을 하는 황녀의 접시에 핏물이 고였다.
기분 탓인지 괜스레 슥슥거리는 소리와 질감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 놓은 샤를리아는 시녀들이 나간 이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썰어놓은 걸 입가로 가져가지도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눈앞의 음식보다는 아까의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 실례지만 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지 들어도 되겠습니까.”
“하하. 별건 아닙니다. 사실 이 황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네?”
“오해하지 않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샤를리아 님, 일개 소환자가 황실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평가하거나 대담을 나누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2황녀 샤를롯트 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듣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의미이신지….”
“현재 이 신성제국을 좌지우지 하는 비선실세가 제2황녀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누, 누가 그런 망발을!!!!”
“위대하고 지혜롭기 그지없는 황제폐하의 건강이 안 좋아지고 난 이후에 폐하께서 여러 가지 일을 2황녀 전하께 맡기신 거 같더군요. 유력귀족들 역시 제2황녀와 함께 움직이시는 분들이 많이 보였고 실제로도 능력이 출중하시기는 하시지만, 아니, 혹시나 제가 황실을 모독하는 것 같이 들릴까 두렵습니다.”
“아닙니다, 명예주교님. 계속해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큼…. 실은 저희에게도 여러 제안이 온 적이 있어서….”
당연히 거짓말이다. 제안 같은 것은 온 적 없다.
“조,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희라고 하신다면….”
“아. 8좌의 몇몇 인원에게만 은밀히 전한 이야기입니다만 후에 황제폐하가 붕어하신 이후, 자신의 편에 서주길 바라시는 것 같더군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황녀님을 적대시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뿐이다.
실제로 이쪽을 길들이려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줄을 타라 간접적으로는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눈앞에 있는 황녀 역시 진실이 뭔지 밝혀낼 생각은 없는 모양.
사실 진실이 뭔지 궁금해하기 이전에 밝혀낼 능력도 없을 것이다.
‘샤를롯트… 샤를롯트’라며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동생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들어 찬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은….”
“아직까지 보류해 두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희 제국 8좌 같은 경우에는 신성제국의 정치에 밀접하게 들어서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의 삶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샤를롯트 황녀 전하께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저희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세간에 들려오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성정이 나쁘신 것 같지는 않지만 요새 하도 날조된 이야기가 많다 보니 제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제2황녀 샤를롯… 아니, 그 비열한 창녀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날조되어 있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모두 속고 있습니다.”
“네?”
“드리기 민망한 말이기는 하지만 되먹지 못한 년입니다. 제 어미의 비천한 핏줄을 잡아먹고 태어난 서녀를 정식으로 황녀로 들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우려하던 일이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 욕심이 하늘에 닿을 듯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황실의 일원이 되자마자 아버님을 홀리며 그 야욕을 드러내더군요.”
“으음….”
“짐짓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말하고 다니지만 궁으로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끌어들이는지 그년이 기거하고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들려오는 교성에 귀가 아플 지경입니다. 피는 속이지 못하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앞에서는 항상 미소를 짓지만 뒤로는 얼마나 더러운 짓거리들을 많이 일삼는지… 차마 말로 다 설명 드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샤를롯트의 이야기가 한 번 튀어나오자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2황녀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에는 짧은 식사시간이 모자란 것이 당연했다.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험담을 토해내는 샤를리아를 바라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찢어 죽일 년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황실을 더럽히고 황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선황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님도, 아버님도 아버님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더러운… 저보다 더 소중히….”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은 물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표정은 가관이었다.
아까의 즐거웠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심지어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저 눈물은 진심으로 황가를 걱정하는 순수한 눈물이 아니다.
단순한 질투.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샤를롯트를 향한 아집과 독기와 분노.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비천한 핏줄에 대한 열등감.
그 억울함 때문에 흘러내리는 피눈물이리라.
슬그머니 손수건을 가져다 댄 것은 당연지사. 눈물을 닦아 내리자 깜짝 놀랐는지 뒤로 몸을 젖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쳤다.
“아…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은… 상냥하시군요.”
‘어라?’
왠지 모르게 위험하게 들리는 대사.
이대로라면 눈에 보이는 쇼파에 함께 드러누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팔을 슬쩍 빼며 황급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세간의 말이라는 건 진실보다는 거짓이 많은 모양입니다. 하하.”
“네?”
“사실 제1황녀님에 대한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네. 분명히 안 좋은 평가가 대부분이었죠. 그렇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황가를 생각하시고 총명하시며, 아름다우시고 여리면서도 강한 면모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지혜로움과 언행이 마치 베니고어 여신님의 현신을 보는 듯하니….”
“아….”
“감히 말씀 드리건대….”
“네….”
“그야말로 차기 황제에 가까우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썰어놨던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자 제대로 익히지 않은 생고기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 말을 듣고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간 샤를리아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있는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중.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첨 때문인지, 아니면 식은 고기 맛이 생각보다 좋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쾌감이라도 느끼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샤를리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