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회귀자 사용설명서 270화
그 아버지에 그 딸(2)
그녀가 말하는 비천한 핏줄과 황가의 피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 한 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제1황녀는 황제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았다.
별것 아닌 아첨이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리는 모양.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건지 달콤한 말을 던질 때마다 몸을 부들거리는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런 표정은 굳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으리라.
‘얘로 진짜 괜찮을까.’
수많은 칭찬과 아첨 중에서도 제1황녀는 샤를롯트보다 자신을 띄워주는 말에 제일 격하게 반응하곤 했다.
예상대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제2황녀님보다’로 시작하는 말이었다.
거의 마법의 문장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
제2황녀님보다 더욱 아름다우신 것 같습니다.
더 총명하십니다.
세간에서 들려오는 말과는 정반대이십니다.
물론 황실 모독죄로 잡혀가고 싶지 않은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대놓고 샤를롯트의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둔한 샤를리아는 웬일인지 내 장황한 칭찬 속에서 제2황녀보다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다는 걸 귀신 같이 캐치해 내고는 했다.
‘이런 건 잘 알아듣네.’
입꼬리가 찢어갈 듯이 올라간 표정은 마치 약이라도 한 것 같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이런 종류의 칭찬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겠지.’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많다.
일단은 제2황녀의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었다는 게 첫 번째.
영특한 제2황녀 덕분에 1황녀가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게 두 번째다.
‘이해는 돼.’
어느 날 갑자기 평민의 핏줄이 2황녀로 추대되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심지어 그 2황녀는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영특했고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단다.
1황녀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것이 당연.
그녀의 스탯 재능이 거의 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2황녀는 영웅 이상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니, 그녀가 어린 시절 얼마나 자신을 자책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기초 검술 지식 습득]
[기초 마법 지식 습득]
[기초 체술 지식 습득]
[기초 수양 지식 습득]
[기초 군사 지식 습득]
[기초 교양 지식 습득]
[기초 연금 지식 습득]
[기초 정령 지식 습득]
그녀의 상태창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수 없이 길게 이어진 기초 지식 습득이었다.
사실 이 외에도 습득한 지식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단언컨대 유년 시절의 1황녀는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본인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구르고 굴렀던 것이 눈에 보인다.
검술로 안 되면 마법으로, 마법이 안 되면 군사 지식으로, 그것도 안 되면 정령술로.
그렇지만 그녀의 여러 노력은 2황녀의 재능 앞에 모래성 무너지듯 허물어져 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 어린 소녀가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일을 계기로 제1황녀는 제대로 삐딱선을 타게 되고 결국에는 1황녀 궁에 머물러 술이나 퍼마시며 시녀들이나 괴롭히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
물론 앞서 말한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샤를리아의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장담컨대 샤를리아, 그녀의 기벽이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제2황녀의 인생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으리라.
‘엄청 집요하게 괴롭혔겠지.’
단순하게 괴롭힌다는 수준을 뛰어 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을 수도 있고 뺨에 불이 나는 것은 일상이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표독스러운 악녀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2황녀 역시 피눈물 나는 유년 시절을 헤쳐 나가며 성장했을 거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밟히고 밝혀도 일어서며 강해진 여주인공 샤를롯트와 그녀를 아득바득 밟으려고 하는 악녀 샤를리아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기승전결의 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래. 내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잡초 같은 샤를롯트는 어느 순간부터 황실을 휘어잡을 정도로 성장, 유년 시절부터 먹어왔던 고구마를 사이다로 뻥 뚫어버릴 타이밍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제1황녀 샤를리아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샤를롯트가 그녀의 손과 발을 잘라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들을 좀먹었다.
우둔한 1황녀는 아마 목 끝까지 칼에 들어올 때까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정통성이 제1황녀에게 있다는 건 그나마 기분 좋은 이야기다.
샤를리아는 아직 출발도 하기 전이지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빵빵 터지고 있는 샤를리아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후후훗. 오늘처럼 많이 웃어본 게 얼마만인 줄 모르겠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네요.”
“하하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황녀 전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고….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로 방을 내어 드릴 테니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명예주교님과 더욱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 마음 같아서는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아마 1황녀 전하께는 누가 되는 행동일 겁니다. 세간의 시선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아아아….”
“아마 여기저기에서 멋대로들 떠들어 댈 겁니다. 제 이미지가 깎이는 거야 상관없지만 황녀님께서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세간의 시선은….”
“신경 쓰셔야 합니다. 대중이라는 건 원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족속입니다. 황녀님과 함께 제국에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몇몇 더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의 만남이 그런 식으로 비치지 않을 겁니다. 저는 황녀 전하를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아….”
“아마 이런 부분 말고도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황녀 전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이 많을 거라는 겁니다. 제2황녀님과 샤를리아 님의 차이점이 뭔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인간은 앞과 뒤가 달라야 대중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법입니다.”
“…….”
“물론 순수하고 거짓을 모르시는 샤를리아 황녀전하의 꾸밈없는 모습도 저는 이해합니다만… 좋은 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대중에게 전해지는 정보 역시 어떻게 요리하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야 황녀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황녀님의 마음씨가 얼마나 넓으신지 알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촌부들이 어떻게 감히 바다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감사드립니다.”
“우둔한 자들 역시 황녀님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교양을 가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황실의 기강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아마 막장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같은 성정이 안에서 올라오는 화와 아집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지요. 아둔한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 누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네. 때로는 대중들에게 맞는 가면을 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저는 샤를리아 님과 같은 배를 타고 싶습니다.”
“아!”
“사실은 조금 더 시간을 지켜보자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샤를리아 전하와 대화를 나누니 제 고민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인지 깨닫게 되더군요. 저 역시 제국민에 입장에 있는 만큼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제국민들을 위하시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물론… 샤를리아 황녀 전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다는 것은 굳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아아아아….”
“황녀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네….”
“저와 같은 배를 타시….”
“물론! 물론입니다! 물론이고말고요! 이기영 명예주교님! 물론입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은 마치 잔뜩 굶은 아귀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손을 살짝 내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 손을 잡는 것이 보였다.
본인 역시 깜짝 놀랐는지 내 손을 놓아버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등불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무 쉬워….’
구워삶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월했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도 찾아주지도 않았던 상황.
그 가운데 떨어진 유일한 아군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다 못해 헛기침이 나온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핫.”
“제, 제가 너무 부끄러운 모습을….”
“아닙니다, 샤를리아 님. 그런 모습을 보여주셔서 오히려 더 기분이 좋습니다. 큼… 그럼 오늘은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요. 아무래도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아… 네. 그렇게 하시지요.”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 이 방에 있다가는 정말로 정체모를 구설수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 같이 활동할 거라면 그녀의 행동을 교정해 주는 게 필요하겠지만 오늘 뺀 진도도 너무 급하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실제로 그녀의 일정이나 행동 방식을 조언해 주는 것은 조금 더 사이가 가까워지고 난 이후에야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다.
슬그머니 자리를 일으켜 밖으로 방문을 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에 서 있는 샤를리아의 표정을 확인한 것이 분명.
황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떠나보냈고 그녀와 같은 표정을 하는 건 나를 안내해 주는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목욕 시중은 되었다. 내 혼자 알아서 할 터이니 당분간 방 안으로는 아무도 들이지 마라.”
“네. 황녀 전하.”
“그리고 이기영 님께서 또 언제 방문하실 것인지 꼭 여쭙거라.”
“네. 알겠사옵니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샤를리아의 목소리가 굉장히 따뜻하게 들려온다.
심지어 시중도 되었단다.
‘느낀 게 있네.’
돌아가는 발걸음이 굉장히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으면 사소한 잘못 정도는 용서해 주는 아량이 생긴 모양.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지만 저런 부분은 확실히 나와 비슷하다.
수행원들의 식사 문제로 있었던 정하얀을 혼쭐 낼 거라고 다짐했건만 감정 잡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안내해 주는 시녀들과는 별개로 황녀의 말을 전해들은 시녀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돌아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말을 해보라는 듯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오는 이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기영 명예주교님.”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 혹시 언제 또 방문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글세…. 조금 더 생각을….”
단번의 어두워지는 시녀단의 얼굴.
“아니지…. 그럼 내일 점심은 어떠신지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아, 알겠습니다!”
시녀단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왜 저러는지 알겠네.’
내가 미친 여자를 얌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평소에 얼마나 미쳐 날뛰었으면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변화를 느낀 것은 단순히 시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제1황녀가 달라졌다.”
그 날로부터 정확히 삼 일이 지난 시점, 왕성을 강타한 훈훈한 소식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