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회귀자 사용설명서 275화
한계가 있는 사람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마련이다(1)
모든 게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불안한 말을 한마디 남기고 떠난 샤를롯트 측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조용했다.
실제로 귀족이나 대중에게도 이쪽이 퍼뜨렸던 날조된 정보가 우후죽순 퍼지고 있었던 타이밍이었다.
제국 8좌에 대한 견제세력이 불어나고 있었던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다완 측에 있는 8좌가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다.
물론 몇 가지의 불안요소는 존재했다.
내 생각보다 샤를롯트 캠프가 더욱더 거대했다는 것이 그 이유.
실제로 그들이 집결하는 속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용의주도했다.
그들이 딱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던 것이 문제.
개망나니나 다름없던 샤를리아를 지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잃을 게 크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샤를롯트 캠프는 단순히 그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있었고 실제로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듯했다.
당연하지만 구성원들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샤를롯트의 품에 있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해 캠프에 남아있는 인원도 있었지만, 적어도 핵심멤버들은 대부분 제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걸 실천하는 이들이었고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력 역시 결코 적지 않았다.
바닥에 깔려 있는 이들을 포섭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사이가 돈독하던 귀족들의 얼굴까지 보기가 힘들어 졌다.
같은 사교회장에서 이야기정도는 나누었지만 핵심 귀족들은 나와의 일대일 만남을 기피하고 있었고 알게 모르게 소외되는 일이 많아졌다.
샤를롯트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넓었던 것이다.
이쪽 역시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
적어도 비슷할 정도로 덩치를 키워야 했다.
그래야 애매모호하게 서 있는 이들을 확실하게 끌어들일 수 있다.
샤를리아가 가지고 있는 정통성.
‘황제의 핏줄을 제대로 이어 받았다’라는 프레임을 계속해서 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1황녀에게는 뻥튀기 홍보를 제2황녀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네거티브한 소문을.
그 결과 내가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사람들이 모였고 세력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렇게 모인 귀족들은 대부분 쓰레기 같은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력은 결코 작지는 않지만… 샤를리아 캠프에 있는 이들은 구태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설호 같은 늙은이들.’
젊은 피나 혁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영감탱이들의 적폐축제.
그것이 바로 현재의 샤를리아 캠프였다.
물론 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엘리제 백작부인 그리고 이쪽에 갚을 빚이 있는 캐슬락 백작과 마를린 영애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오고는 있었지만 그들 역시 한 가문을 이끄는 입장에 있는 만큼 결단을 내리기는 힘들어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샤를리아를 포장하는 것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귀족들에게는 그녀가 직접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번 일에 이쪽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마치 공주 키우기 게임을 하는 것처럼 오만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물론 이지혜 역시 열심히 갈려나가고 있었지만 그녀보다는 내가 더 피곤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샤를리아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되는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밀착해야만 했으니까.
‘슈바….’
말하자면 그녀가 흘리는 똥오줌을 전부 치워줘야 되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
다 큰 어른을 어르고 달래고 칭찬해 주고 띄워주는 것으로 모자라 복장부터 체크해 줘야 하니 피곤한 것은 당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업무 외에 사적인 행동이나 질문 같은 대화들도 길어지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이쪽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고 한다는 게 종종 느껴지고는 했다.
이를 테면 차희라나 정하얀과 무슨 관계냐고 물어본다든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다든가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고유기벽을 가지고 있는 이쪽은 혹시나 또 어떤 미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와 내가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것.
아마 그게 샤를리라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가의 핏줄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만약 샤를리아가 그것까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황제의 핏줄을 진하게 이어받은 셈이다.
아무튼 간에 샤를리아는 독하게, 또 군소리 없이 이쪽의 스케줄을 잘 따라오는 중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그녀의 행동에 탄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샤를리아의 대외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제1황녀는 차곡차곡 자신의 인지도를 쌓았고 적폐축제의 한가운데에 있기는 하지만 나름의 세력도 일궜다.
‘제일 중요한 시기였어.’
그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다.
아직도 한참 모자르기는 하지만 이제야 이 무능한 1황녀는 샤를롯트와 동일한 출발선상에 선 것이다.
나름대로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는 그쪽의 세력과는 다르게 샤를리아 쪽은 적폐 늙은이들의 밥그릇 싸움이 내부에서도 진행되는 중.
그나마 샤를리아가 나를 제일 신뢰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적폐축제에 가담해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결과물이긴 했다.
조금 불안했던 점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것.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샤를리아에게는 너무 급진적인 변화처럼 느껴졌겠지만 본인도 본인의 주제를 알고 있다면 크게 나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본인의 세력이 생겨 콧대가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이제 막 출발 지점에 선 만큼 적어도 주제파악은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실수였다.
‘제기랄. 제기랄!’
이 멍청한 여자에게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을 본 게 내 실수였다.
제1황녀 샤를리아, 늘 만나던 카트린 공작 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마를린 영애와 함께 작은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도중.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일어난 일은 너무 현실성이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
‘멍청한 년. 멍청한 년!’
샤를롯트가 말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 뜻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까지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 오래.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혼란으로 가득 찬 장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은 채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를린 영애와 그녀를 챙기고 있는 카트린 공작 부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샤를리아는 뭐가 그리 분하고 짜증 나는지 씩씩거리며 마를린 영애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문을 열고 난 이후에 기대한 장면은 4명의 여자가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우애를 다지는 모습이었건만 이렇게 개판을 만들어놨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마를린 영애가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작은 주전자를 들고 있는 멍청한 샤를리아.
그녀가 들고 있는 주전자 안에 있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 샤를리아가 마를린 영애에게 가지고 있던 차를 그대로 뿌려 버린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워 잠깐 동안 멈칫했다.
그렇지만 다시 들려온 마를린 영애에 고통에 찬 비명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아아악!!”
“마, 마를린 영애!”
“이, 이기영 명예주교님! 저… 저것이! 감히!”
그 와중에 샤를리아가 마침 잘 왔다는 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지금 중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이후에 곧바로 마를린 영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상태를 본 나는 곧바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아리스 시녀, 사제를….”
“이, 이미 전해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녀보다 무능한 년.’
말 그대로 시녀보다 무능한 년이다.
무척 절박한 내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저 구겨진 표정의 의미가 제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구긴 것이라면 용 숨결 물약으로 뚝배기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리라.
“이, 이기영 님…. 아파요. 아픕니다! 흐으으으윽…. 아파요.”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마를린 영애. 아니, 아리스 시녀님! 제 가방에 포션이 있습니다. 일단 그걸로!”
“아! 네!”
“카트린 공작부인 그리고 엘리제 백작부인은 잠깐 마를린 영애를….”
“아… 네. 알겠습니다. 명예주교님.”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얼굴 전체에 뜨거운 차를 뒤집어썼으니 아픈 것이 당연하다.
상처 치료는 가능하지만 혹시라도 눈을 다쳤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니, 흉터라도 남는다면 이 사태를 수습하기가 더 힘들어 질 것이다.
아리스 시녀는 헐레벌떡 이쪽의 가방을 가져오기 시작.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울먹거리고 있는 엘리제 백작부인과 입술을 꽉 깨물며 어떻게든 마를린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카트린 공작부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픕니다. 이기영 님…. 흐으윽…. 눈앞이 깜깜합니다. 아으어허헝….”
“마를린 영애,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사제님도 곧 오실 거고 다 괜찮아질 겁니다.”
멍하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샤를리아와는 다르게 아리스 시녀는 마치 메스라도 건네는 간호사처럼 이쪽에 포션을 건넸고 이쪽은 곧바로 뚜껑을 따 마를린의 얼굴에 고급 포션을 콸콸 쏟아 붓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항상 포션을 들고 다녔던 것이 유효했다.
“한 병은 상처 부위에 뿌릴 거고 한 병은 천천히 마실 겁니다. 진통효과도 있을 테니 틀림없이 괜찮아지실 겁니다.”
‘괜찮아져야 돼.’
“네… 네… 네….”
“천천히 눈을 떠보세요.”
“네. 이기영 님….”
‘제기랄.’
의사가 아니었지만 지금 마를린 영애의 눈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으리라.
아직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만큼 분명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따끔할 겁니다.”
“꽉, 꽉 안아 주세요, 이기영 님. 흐으으윽….”
“네. 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손을 꽉 잡아주자 마를린 영애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느껴진다.
겁을 집어 먹는 것이 당연하리라.
천천히 눈에 포션을 집어넣자 갑작스레 온 몸에 힘이 들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
“아아아아아악!”
“괜찮을 겁니다, 영애. 조금만 참으세요. 다 회복되고 있습니다.”
“네…. 끄으으으윽….”
다시 한번 마를린 영애의 몸을 들어 올린 이후에는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카트린 공작부인은 그대로 나를 따라 나섰고 엘리제 백작부인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아리스 시녀는 사제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중.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던 마를린 영애는 탈진했는지 추욱 늘어져 버렸다.
급한 불은 꺼졌다.
그제야 조금 상황이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일단은 마를린 영애가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남은 치료는 그쪽에서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제가 폐하께 하사받은 방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예주교님.”
“감사합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명예주교님, 마를린 영애는 괜찮은 건가요?”
“아마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도 남을 것 같지 않고 눈도 회복될 겁니다. 그보다 갑자기 어째서….”
“설명을 드리려면 깁니다만… 샤를리아 그 미친, 아니, 황녀 전하와 영애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전하께서 갑작스레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마를린 영애에게 집어 던졌습니다. 마를린 영애가 샤를리아 황녀 전하께 어떤 무례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이기영 명예주교님과의 친분을 말하고 있었을 뿐인데….”
“아….”
“너무 갑작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셔서… 저도 도대체 뭐가 뭔지. 혹시나 마를린 영애가 황녀 전하께 누가 되는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봤지만… 제대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씨발.’
예상은 했지만 마를린 영애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황급히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사제가 신성력을 쏟아 붓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계속해서 복잡해진다.
따라온 두 사람 역시 굉장히 초조한 모습으로 마를린 영애의 모습을 바라보는 중.
아마 가장 놀란 것은 저 둘이었을 것이다.
잘 보니 두 사람에게도 뜨거운 물이 튀었는지 화상을 입은 것 같은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라 자신을 챙길 여유는 없었던 모양.
양해를 구한 이후에 곧바로 그녀들의 상처도 봐주기 시작했다.
‘망했어.’
완전히 말아먹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고생 모두가 헛짓거리가 되어버렸다.
어째서 샤를롯트가 그간 적극적으로 응수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가장 가까이서 자신의 언니를 봐온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1황녀 샤를리아가 구제불능에 멍청이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자멸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제기랄! 제대로 망했어. 제대로 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