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회귀자 사용설명서 277화
원하지 않은 설계(1)
용 숨결 물약을 던져버리는 상상을 자꾸만 하게 되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샤를리아는 잠깐 동안 벙어리가 된 내 모습에 더욱더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한번 말을 이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근거도, 논리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다.
“소, 소리를 질러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괜히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기영 님. 문제가 얼마나 크든 전부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네?”
“지금까지는 가진 바 세력이 없어 조용히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제 이름 아래 모여 있는 귀족들을 보세요. 샤를롯트와 비교해도 절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게 뭔 개똥같은 소리야.’
“정당하고 정통성 있는 핏줄의 아래에 모인 분들입니다. 저와 뜻을 같이해 주실 분들이지요.”
‘그거 아니야….’
“아, 아버님께서도 저를 다시 봤을 겁니다. 제가 황제가 된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아마 조만간 누가 정말로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실 겁니다. 분명히 올 겁니다. 이기영 님, 그때가 오면….”
“네?”
“이기영 님을 제국의 재상에 앉힐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그딴 거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어.’
대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한 것인 양 말하는 표정이 우습다.
마치 ‘깜짝 놀랐지? 내가 너를 준비한 선물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당연하지만 지금 상황은 무슨 이야기가 나오던 현실성이 없다.
후계자로 선택을 받은 이후에 저런 소리를 해도 아직 흥분할 때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공 들여 쌓은 모래성을 발로 뭉개버린 직후에 저런 소리를 하니 믿음이 가는 게 이상하다.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슬그머니 태세전환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당연지사.
장담컨대 충무공 정도의 충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선회를 생각해 봄직한 타이밍이었다.
샤를리아의 배는 이미 가라앉고 있다.
그 위에 올라타 있는 내가 누구보다도 그걸 잘 느끼고 있다.
어떻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불가능하다.
줄타기 외길 인생을 걸어왔던 내 감각이 이토록 비명을 지르기는 처음.
내가 아무리 설득하고 난리를 친다고 해도 샤를리아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빨리 빠져나와야 해.’
물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대놓고 같이 행동하는 건 그만둡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대충대충 수긍하며 살길을 찾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지사.
온갖 욕을 하고 있는 속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렇군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실 줄은….”
“네. 계속해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명예주교님.”
“물론, 지금까지처럼은 해드리겠지만… 오늘 같은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나면 곤란합니다.”
“네. 제, 제가 조금 성급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마를린 그 정신 나간 계집이….”
“네. 네.”
무슨 말을 하든지 일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더 이상 그녀에게 목을 매고 있다가는 이쪽이 화병으로 먼저 쓰러지게 생겼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내 기분이 풀린 줄 아는 모양인지 열심히 수다를 떠는 모습은 가관.
이것저것 조잘대면서 함박웃음을 짓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며칠 동안은 보지 못하리라.
카트린 공작부인과 엘리제 백작부인 그리고 캐슬락 백작이 황제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한다면 황제의 입장에서도 그녀에게 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게 자기 생각대로 될 것 같겠지만 채 삼일도 지나지 않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제대로 깨닫게 되리라.
물론 내 예상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분노한 캐슬락 백작이 다음날 아침이 되기도 전에 곧바로 황성 문을 두드렸고 황제와의 대담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위 귀족을 건드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황가를 위해 열심히 싸워준 캐슬락 백작이었기 때문에 황제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하위 귀족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안 그래도 황권의 강화를 위해 제국 8좌라는 걸 만들어 놓고 쇼까지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는 황제인 만큼 캐슬락 백작의 항의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무슨 이야기인지 듣진 못했지만 결국 황제는 샤를리아를 방 안에 구금하도록 명했다.
물론 적폐 연합 쪽에서도 마를린 영애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한다거나 하는 쇼맨십을 취하기는 했지만 이 좋은 기회를 샤를롯트가 두고 보고 있을 리가 만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론을 흔들어대며 정통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몸소 증명했다.
적폐 연합 최후의 저항 때문인지 샤를리아 황녀는 구금 기간 동안 최소한의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는데, 그중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녀가 직접 이쪽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다.
카트린 공작부인을 포함한 동부 귀족에게는 샤를리아 쪽과 거리를 둬야겠다고 넌지시 밝힌 타이밍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입장이 조금 더 난처해졌다.
다른 이들과는 거리를 둬도 상관없지만 그녀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맥 중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잘해준 덕분인지 처음 말했던 대로 이쪽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해 주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그녀들이었더라도 나를 좋게 보기만은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만에 분위기가 급변했고 다시 또 며칠 만에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잘 오르고 있었던 주식이 갑자기 폭락해 버린 셈.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 캐슬락 백작의 마를린 영애가….”
“아. 물론 들었습니다. 샤를리아 황녀가 펄펄 끓는 차를 그대로 영애의 얼굴에 뿌려 버렸다고…. 소문이 사실인가요?”
“네. 제가 명예주교님이 마를린 영애를 안고 뛰어가는 모습을 우연히 봤답니다. 창문 너머로 보여 자세히 보이지가 않아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뭐예요?”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마침 자리에 있으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시력을 잃을 뻔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상상하기 어렵네요. 캐슬락 백작이 많이 심란하시겠어요.”
귀족부인들은 밤이고 낮이고 이번 일에 대해서 떠들어 댔고 주류에 있는 귀족 남성들도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들을 주고받았다.
“쯧. 아무리 황가의 핏줄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지금까지 황가를 위해 묵묵히 캐슬락을 지켜온 백작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지….”
“설사 마를린 영애의 태도가 불손했다고는 하더라도 어떻게 펄펄 끓는 차를 그대로…. 사실 저희끼리라 하는 이야기지만 샤를리아 전하의 시녀들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평소 행실이 어떠실지 눈에 보입니다. 제국민이 있어야 제국이 있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아랫사람들에게 막대하실 수 있는지….”
“황제 폐하께서도 많이 심란하실 겁니다.”
“실제로 어젯밤에는 잘 드시지도 않던 와인을 드셨다고 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실지…. 제1황녀님이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차라리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더 좋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심지어는 나만 믿고 움직이고 있던 제국 8좌들까지 문의를 해올 정도였으니 내 입장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긴데… 이거 괜찮은 거 맞죠? 대충 봐도 분위기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나 한 발 빼더라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차희라 님에게는 잘 설명해 주실 거라고 믿을게요. 아, 물론 지금 발을 뺀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안심해 주시고요.”
“혹시라도 다른 계획이나 무언가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완의 위란과 천관위가 저런 식으로 말해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는 거다.
이쪽이 힘들어 하는 와중에 김현성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신경이 거슬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사랑스러운 우리 회귀자는 나에게 모든 일을 맡겨버리고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종적을 찾기 힘들었다.
처음 기반을 다질 때는 이것저것 지원해 주었지만 뭔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인 것 같았다.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
확실히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들은 이 건이 실패해도 그다지 타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만에 하나 샤를롯트가 무난하게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물리적으로 어떤 해를 입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반역죄로 목이 달아나지도 않을 것이고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줄을 한 번 잘못 탔다는 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미 이쪽을 적이라고 인식한 샤를롯트는 내 팔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고 나는 다시 한번 긴 싸움을 시작해야 될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숨만 부지하면 됐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
갈 땐 가더라도 하나라도 더 챙겨가야만 했다.
‘독한 년.’
물론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다시금 샤를롯트에게 접선해 보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제2황녀는 이쪽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대놓고 적대하며 뒤통수를 노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황녀 캠프에 있는 귀족은 이쪽에 경고의 말을 전해오기도 했다.
‘원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지만… 이기영 명예주교님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부에서 무언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귀족들과의 커넥션은 점점 끊겨가고 있었고 남은 것은 처음에 친분을 나눴던 이들이 전부.
당연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물론 제국 8좌를 보고 움직이고 싶어 하는 세력은 있었지만 그 마저도 조심스러우니 대놓고 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비빌 수 있는 곳이라고는 오늘내일 하고 있는 황제밖에 없었다는 것.
정말로 엘릭서라도 개발해야 되나 같은 생각을 하며 황제의 방으로 출근을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제 폐하.’
잠깐 동안 샤를리아에게 향했던 충심이 다시 한번 황제에게로 옮겨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모든 사건이 가라앉고 내가 기반을 다시금 다질 때까지 황제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
황제의 시녀가 이쪽에 인사를 해오니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자주 봐왔던 얼굴이었건만 어제보다 더 힘들어 하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니 건강에 무리가 오는 것이 당연.
제1황녀의 미친 행동이 오늘 내일 하는 황제의 하늘나라 편도 티켓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내가 자신감 있게 비빌 수 있는 유일한 구석인 만큼 황제의 존재는 내게 소중하다.
솔직히 최근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오오… 왔구만.”
“황제 폐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야 항상 그대로지…. 괜찮네….”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하하… 나야 항상 건강하네… 그보다 이기영 명예주교.”
“네… 폐하.”
“오늘은… 샤를리아를 만나고 온 겐가?”
자신이 싸놓은 똥을 이쪽으로 패스하려는 낌새가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