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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79화 (278/1,590)

# 279

회귀자 사용설명서 279화

원하지 않은 설계(3)

황실의 세 명이 작정하고 차례대로 나를 돌아버리게 하려는 듯한 느낌.

이 자식도 갑작스럽게 미워지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준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도 슬그머니 원망스러워진다.

황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속으로는 이미 제2황녀를 황제로 내정하고 있는 것 같았던 느낌.

물론 제1황녀에게도 희망이 없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이번 사건이 결정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대로 최소한 제1황녀를 안전하게 생활하게 하겠다는 생각일 터.

문제는 저 늙은 사이코패스의 계획이 나의 희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있으면 그딴 거랑 살림 차리고 싶겠냐고.’

내가 저걸 받아들이는 순간 최소 몇 명은 목이 날아갈 거다.

요즘 얌전히 있어주는 정하얀을 말리는 것도 일이고 차희라 역시 불편해할 가능성이 크다.

장담컨대 내가 제1황녀와 함께 북부에 살림을 차린다면 그 다음날 제1황녀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것이리라.

그 책임이 누구한테 갈지에 대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아니, 애초에 그녀와 함께 북부로 간다는 것은 중심 권력과 멀어진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외곽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여생을 마무리하는 그림이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눈앞에 있는 황금을 두고 떠나갈 생각은 없다.

‘무조건 거절해야 해.’

당연하지만 이건 무조건 거절해야 하는 이야기다.

나는 젊은 나이에 보트를 타고 싶지 않다.

“폐하.”

“허허허.”

“그…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아아아. 매번 함께 다니는 마법사 수행원과 붉은용병의 용병여왕은 용인할 수 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만남을 가지고 있는 이들까지 만나지 말라는 건 너무 과한 처사지. 허허허. 샤를리아 그 아이가 질투가 워낙 심해서 아마 이기영 명예주교가 고생 좀 할 것이야. 아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웃으면서 할 이야기가 아니야….’

저딴 소리를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눈앞에 있는 늙은이가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든 모양이다.

그 박덕구도 이 정도의 설계를 준비하지는 않으리라.

대놓고 나를 엿 먹이려는 그림에 정신이 멍해진 것은 당연지사.

황제의 기분이고 나발이고 생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한 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폐하.”

“그렇지. 중요한 문제니 이기영 명예주교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 이해할 수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는 부담스러운 제안이고 이야기라… 물론 황제 폐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솔직히 제가 샤를리아 황녀전하에게 어울리는 사람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걸세. 허허허. 이기영 명예주교는 부족한 것이 없네. 아암. 그렇고말고. 그 누가 우리 사위를 부족하다고 하겠나. 한번 잘 생각해 보게. 물론 시기상조인 만큼 오늘 우리끼리 나눈 대화는 다른 이들이….”

“네. 아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많이 늦었구만. 이만 들어가 보게나. 아 그리고…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대답은 최대한 빨리 해주는 것으로 해줬으면 좋겠군.”

“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심사숙고 후에 대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암. 그래야지.”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폐하.”

“그래. 들어가 보게, 이기영 명예주교.”

‘제기랄.’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래도 이 황실 집단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내 인생을 박살 내려고 모의라도 하는 모양.

지금까지 머리가 아픈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왔지만 그중에서도 황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시 제2황녀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황제로 만들든, 그도 아니라면 내 몸을 위탁할 제3세력을 찾아보든 교황청을 대놓고 황실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리라.

애초에 김현성이 제2황녀를 황제로 만들면 안 된다고 한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만큼 움직임이 제한적인 게 골치 아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녀석의 주문이 너무 과했다는 거다.

내 능력을 높게 사주는 것은 고맙지만 미치광이 1황녀를 황제로 만드는 것은 무슨 개짓거리를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샤를롯트를 완전히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는 제한까지 붙어있으니 포와 차를 떼고 장기를 두는 듯한 느낌이다.

샤를리아라는 거대한 짐을 들고 싸우기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

‘스트레스 받아.’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치솟는 상황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자연스럽게 회귀자를 찾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일단 방 안에서 한 번은 들려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걸어 들어가 문을 열자, 뭔가 이상한 자세로 쇼파에 누워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어처구니없게도 얼굴에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얀이야?”

“오, 오… 오빠? 오… 오셨어요?”

“응. 오랜만인 것 같은데….”

“네… 네.”

당황스럽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얼굴을 감싸고 있던 겉옷을 황급히 옆으로 쑤셔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답지 않게 무척이나 민망해하는 표정.

정하얀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화재를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에 적당한 주제를 잡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린델은 여전하지?”

“네. 그… 연구도 성과를 내고 있고요. 또… 덕구 오빠로 잘 지내고 또… 새로 들어온 한소라랑… 유아영이랑… 그… 안기모 씨, 창렬 씨 모두 다 희귀 등급의 던전을 공략완료했대요.”

“그거 다행이네. 아, 밀린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 지금은 볼 일이 있어서. 혹시 현성 씨는….”

“오늘은 늦게 들어오시는 것 같았어요. 요, 요즘 현성 씨도 많이 바쁘신 것 같아요. 혜진 씨가 그러는데… 최근에는 혜진 씨도 현성 씨 얼굴을 보기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혜진 씨는 지금 방에 있나?”

“네. 같이 밥 먹고 들어갔으니까요.”

“괜찮으면 불러다 줄 수 있을까?”

“무, 물론이죠!”

김현성이 자리를 비웠다면 그 부관인 조혜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정하얀은 후다닥 밖으로 나갔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혜진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린델에 볼일이 많은 정하얀도 오랜만이기는 했지만 멀지 않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조혜진의 모습은 그보다 더 오랜만이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는 말해주는 것 같아 괜스레 입맛이 씁쓸해졌다.

나와 조혜진을 이 방에 둘만 두고 갈 생각이 없는지 정하얀은 한쪽에 은근슬쩍 자리를 잡았고 조혜진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쪽에 꾸벅 인사를 한 뒤에 테이블 앞에 앉았다.

뭔가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혜진 씨.”

“네. 오랜만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최근에는 현성 씨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냥 던져본 말에 조혜진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졌다.

아마도 이게 마음고생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분명히 수행원으로 수도에 함께 왔건만 녀석이 혼자만 싸돌아다니고 있으니 책임감 강한 그녀가 자괴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쪽의 예상이 맞았는지 조혜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네. 그렇습니다. 길드 마스터께서 요즘 조금 개인적인 업무에 집중하시고 있는 듯해서….”

“그렇군요.”

“네. 그러고 보니 길드 마스터께서 기영 씨께 전해달라고 한 전언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바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 힘들겠지만 부탁한다고…. 이번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돌아와 합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당연지사.

뭔가 솔루션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염없이 기다리라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이 나쁜 새끼.’

물론 아직 황제가 죽거나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도 건강이 악화된 것은 아니다.

김현성이 황제가 언제 하늘나라로 가는지 대충 알고 있다면 이 싸움을 조금 길게 보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기영이라는 인간의 정치적 입지가 갉아 먹히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다.

겁이 많은 이쪽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일어날 일에 대비하고 변수를 생각해 놓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안 그래도 황제의 말에 궁지에 몰린 타이밍.

제2황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나를 포함한 제1황녀의 적폐세력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어쩌면 샤를롯트가 대놓고 1황녀와 이쪽의 만남을 추진할지도 모른다.

보기 싫은 두 사람을 동시에 유배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비춰질 테니 내가 샤를롯트였더라도 우리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을 것이다.

아까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은 당연지사.

내가 느끼기에도 목소리에서 은근슬쩍 짜증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현성 씨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예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네. 저 역시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네.”

“뭔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이요?”

“예. 사람입니다. 길드 마스터 역시 자신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특이하게도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이라도 가면무도회 같은 사교 파티에는 꼭 참석 하셨는데…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

“혹시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어 제안을 해봤지만 고개를 저으시더군요. 혼자 움직이는 게 더 편할 것 같다고 말씀하신 뒤에는….”

“혜진 씨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으로 다니기 시작했군요.”

“네. 그렇습니다. 제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조금 더 힘이 될 수 있는 수행원이 됐어야 했는데….”

“아뇨. 아뇨. 혜진 씨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따로 뭔가를 위해 하고 계시는 일이 있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중요한 일인 건가.’

녀석이 놀고만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애초에 이쪽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해놓고도 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김현성에게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이 급하게 느껴지는 모양.

가면무도회는 왜 나가는 건지, 사람은 또 뭔 사람을 찾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앞으로의 미래에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해해야 돼.’

이해해야 된다.

그게 맞다.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짜증나고 열이 오르지만 지금 김현성이 하고 있는 일은 겨우 정치적 입지를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 가능성이 크다.

‘이쪽은 아직 시간도 많아. 그래. 이해하는 게 맞아.’

앞서 말했던 대로 황제의 건강은 정상이다.

녀석도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더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지금 당장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더 중요한 일부터 해결해야지.’

그렇지만 점점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

녀석도 힘든 것은 당연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이쪽을 내팽개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이 집안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는데 집안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안사람은 당장 너무 힘들어 허리와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데 호강시켜 주겠다며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바깥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위로와 따뜻한 말 한마디건만 바깥 놈은 뛰어다니기에 여념이 없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런 장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씨….’

고개가 끄덕일 만하건만 괜스레 마음속으로는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상황이라는 거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왠지 모르게 이 분한 느낌은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쪽을 아예 버려두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게 더 중요하다 이거지. 그래 그렇다 이거지.’

황실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김현성에게도 섭섭해지기 시작.

‘다 뒤집어 버릴까….’

제2황녀가 황제가 되면 안 되는 조건.

그것만 맞춘다면 일이 어떻게 되더라고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재기하지 못할 정도만 아니면 된다고 했으니 다소 거친 방법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뒤집자.’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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