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회귀자 사용설명서 280화
원하지 않은 설계(4)
‘샤를롯트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하는 걸로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봤어야 했습니다. 그래요. 그랬어야 했습니다.’
‘제국민을 위해 내리신 결단이었습니다.’
‘그 제국민을 위해 다른 무고한 제국민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겁니다. 제국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도, 그리고 폐하만 바라보고 있는 많은 선량한 이들 역시 모두 죽어갔을 겁니다. 그 역병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증상이 일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대기로 오염되어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오염된 땅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작, 그들은 아직 언데드가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인간이었어요. 고통에 찬 그들의 비명은 언데드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아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아니, 똑똑히 들립니다.’
‘무슨….’
‘그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게 들립니다. 이 우둔한 황제에게 배신당해 죽어간 제국민들이 저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폐하.’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틀림없이 정상입니다.’
‘폐하….’
‘아주 어렸을 때….’
‘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직 돌아가시기 전이셨을 때 해주신 말이 기억이 납니다.’
‘…….’
‘모나지 말라고 하셨지요. 조용히, 쥐 죽은 듯이 평범한 생활하며 순간순간을 즐기라고 하셨습니다. 황실과 떨어져 중심이 아닌 바깥에서 평화롭게, 남들처럼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역시 비슷한 말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저는 많이 어렸지요.’
‘폐하….’
‘어머니가 이곳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제국에서 특권 계층이 아닌, 힘없는 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 누구보다 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네. 그래서 황제가 되고 싶었어요. 언니를 제 손으로 내치고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심지어는 손에 많은 피를 묻혔습니다. 교황청과 싸우고, 백작 같은 이방인들과도 싸워왔습니다. 그렇게 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지요.’
‘…….’
‘그렇게 이 자리에 오르고 나니 결국 저 역시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뇨. 처음부터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등바등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피를 묻혔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습니다. 권력을 잃어버리는 게 무서워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국민을 위한 제국을 만들겠다는 다짐은 피로와 부담감에 짓눌렸고 제 어렸을 적의 꿈은 현실에 점점 마모됐습니다. 문득 거울을 봤을 때는 제가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언니의 얼굴이 비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이 자리는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왕관의 무게를 버틸 수 없는 사람이고 죄를 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힘이 듭니다. 그래요…. 너무나도 힘이 들어요. 언니의 예전에 말했던 대로… 결국에 비천한 핏줄은 이 무게를 견딜 수 없나 봅니다.’
‘폐하….’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어머니의 말대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남들처럼. 남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고 많은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살아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실 겁니다.’
‘하핫. 물론 결혼이란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백작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런 삶을 살아도 무척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시 몸을 일으켜야죠.’
‘몸을 편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나설 필요도 없으십니다.’
‘괜찮습니다. 어서 빨리 남은 일을 마무리해야지요. 제국민을 불에 태워 제국을 지켜야지요.’
‘샤를롯트 님.’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제국민을 죽여 제국을…. 그렇게 제국을…. 하… 하하핫. 그렇게 지켜야지요.’
잠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슬쩍 바닥에 있는 모래를 움켜쥐었다.
분명히 이 장소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샤를롯트와 대화를 나눴었고 이곳에서 죄 없는 제국민이 죽었다.
일반인들이 언데드로 변하는 역병이 퍼진 장소.
대륙 인구의 1/4를 죽여 버린 병이 창궐하게 된 첫 번째 지역이었다.
슬그머니 손을 펴자 쥐고 있던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눈앞에 있는 이들이 시선이 들어왔다.
너무 많은 시간을 감상에 젖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저를 알고 있군요.”
“…….”
“소문이 여기까지 닿은 모양이군요. 평범한 사람은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찌 저희 같은 사람들이 귀, 귀하신 분을 몰라뵐 수 있겠습니까. 그, 그보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 이십니까? 이 작은 마을에 혹시 어떤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조사를 나왔습니다. 제국에서 허락되지 않는 마법을 사용하는 결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찾아 왔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반응과 작금의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염려하고 있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군요. 이런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시, 실례지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잘 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비밀결사 살라단. 제국 내에 있는 흑마법사 연합. 창설된 지는 24년, 규모는 약 670여 명 정도로 제국 외곽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창설 목적과 그 존재 의의는 클랜원들의 영생. 제 말이 틀렸습니까.”
“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저희는 잘… 모, 모르겠습니다.”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네?”
“혹시 가면 쓴 남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무표정에 칙칙한 검정색 가면입니다. 가면은 마력으로 처리되어 있고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디스펠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남자의 키는 평균 정도고 여자는 조금 작은 편에 속합니다. 서로를 단짝이라고 부르고 실제로도 매우 가까운 관계일 겁니다. 아, 그리고 남자 쪽은 여러분들과 같은 흑마법사입니다. 아마 이곳에 왔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살라딘에 가입된 클랜원일 수도 있겠군요.”
“흑마법사?”
“네. 흑마법사입니다. 본 적이 있으시다면 분명히….”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 그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 하시는 건지… 저희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입니다. 살라딘이고 흑, 흑마법이고 저희는 아는 게 없사옵니다, 나리.”
“아닙니다. 제가 한 말의 의미는 당신들이 가면을 쓴 이들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이 장소에 모이신 분들이 흑마법사라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 굳이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살라딘의 흑마법사들을 만난 적 있습니다. 북부의 가르텔, 남부의 발라, 동부의 헤블, 이곳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미… 미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가면 쓴 남녀를 본 적이 없으시다면… 여러분들의 클랜 마스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번 입을 떼려고 한 타이밍에 들려온 것은 캐스팅된 주문이 발현되는 소리.
“주… 죽어!”
검은색과 녹색의 구체와 화살들이 들이닥친 것은 순식간.
몸을 숙이고 검을 휘두르자 다가오고 있던 커다란 구체가 반으로 쪼개졌다.
‘독.’
흔치 않은 마법.
구체의 파편에서 나온 이물질이 옷에 튀자 치이익 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력으로 숨을 멈추고 발걸음을 놀리는 것은 순식간.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순간 거대한 덩치를 지닌 괴물이 소환진에서 올라와 이쪽을 덮쳤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하급 악마.
검에 마력을 집어넣고 휘두르는 것으로 녀석을 처리한 이후에는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의 팔을 날리고 저주를 외우고 있던 흑마법사의 몸통을 베었다.
‘악마 소환사가 하나, 사령술사가 하나.’
사방에서 해골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쏟아지지만 검을 크게 휘두르자 병사들이 허물어졌고 사령술사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난번과 같다.
‘수준이 낮아.’
이쪽이 너무 강해진 것은 아니다.
1회 차 때 봤던 이들의 모습과는 확실히 수준 차이가 있는 느낌.
당시에 대륙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간 살라딘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네임드 악마들을 소환하는 악마소환사도 없었고 기껏해야 하급 악마나 중급 악마가 전부.
애초에 4차 전직을 마친 이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뭔가 계기가 있었던 건가.’
몇 년 뒤 이들의 수장을 자처한 가면 쓴 남자가 무슨 수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아직 만나지 않은 거야.’
정확히 언제부터 활동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기는 아닌 모양.
황권다툼이 수면 위로 드러난 시점에서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활동하는 것은 지금보다 좀 더 이후라는 이야기다.
애초에 지금 이 시기는 남자 쪽이 활동하고 있을 시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남자 쪽을 찾은 것도 아니었으니 별로 아쉽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여자 쪽도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건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면 쓴 여자는 지금 이 시점에 분명히 황성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물론 1회 차에서는 황성에 들락날락거릴 일이 없었지만, 언젠가 수도에 들어갔을 때 샤를롯트 캠프의 유력 귀족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본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숨어 있는 건가. 아니면 미래가 바뀐 건가. 만약 활동하고 있다면 굳이 모습을 숨길 이유가 없을 텐데….’
제2황녀가 정치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모종의 이유로 미래가 바뀐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면 쓴 여자가 마검사 정진호를 비롯한 살인여단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정진호의 죽음 이후, 자리 잡을 곳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이 추측이 맞다면 제2황녀를 궁지로 몰아가면 쓴 여자를 꾀어낸다는 건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2회 차에 가면 쓴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정진호의 죽음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나비효과라고 생각해도 되리라.
천천히 지하로 내려가자 살라딘의 연구 결과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
알아볼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이 연구물들을 기반으로 역병이 시작 됐다는 걸 생각해 보면 대륙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
예상했던 대로 아직 초기 단계인 듯했다.
손에서 마력을 일으키자 자그마한 불꽃이 튀어 올랐고 그들의 연구자료 위로 떨어진 불꽃은 어느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제국민들과 절규하며 미쳐 버린 샤를롯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어 나쁜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기 시작.
‘조용한 숲속에서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싶습니다. 힘이 들겠지만 시녀들이 없는 생활도 해보고 싶고요. 주점에서 들려오는 음유시인의 노래를 듣고 싶고. 네. 그렇게 살고 싶어요. 저는 당신을 조금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 제 감정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감정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백작. 다음 생에서는 조금 더 평범한 사이로 마주칩시다. 서로 웃으며, 그렇게 마주칩시다.’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긴 지하를 올라온 이후에 시야에 비치는 것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마을.
‘어?’
마을의 광장 한쪽에서 굉장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마법으로 어설프게 변장을 하기는 했지만 저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얼굴을 본 게 오래 된 파란의 원년 멤버.
‘덕구 씨?’
린델에서도,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대륙의 외곽에서 어떻게 박덕구가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 기영 씨가 무언가 심부름을 시킨 것이 틀림없으리라.
지금쯤 한참 여론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을 테니까.
‘무슨 일이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곽 쪽에 저들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지령을 받았다는 이야기.
몰려 있는 군중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덩치 큰 남자의 연설에 환호를 보내는 중이다.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을 옮기며 귀에 마력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묘하게 이끌리는 목소리에서 들려온 내용은 이쪽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있었다.
“제국민에! 제국민에 의한! 제국민을 위한 나라! 제국의 주인은 황족이 아닌! 제국민이요!!”
“뭐, 뭐야… 이건….”
분명히 1회 차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