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회귀자 사용설명서 281화
원하지 않은 설계(5)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봐도 광장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박덕구였다.
무슨 일로 이곳에 있는지도 당황스러웠지만 주먹을 꽉 쥐며 여기저기에 소리치는 모습은 그보다 더 당황스럽다.
“제국의 주인은 제국민이 맞다니까! 잘 생각해 보쇼! 제국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야 황제 폐하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소! 절대로 그렇지 않소! 여러분이 있어야 제국이 있는 거요!! 제국의 주권은 제국민에게 있는 게 맞소! 모든 권력은 제국민으로부터 나와야 바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거요! 황제 폐하가 아무리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여러분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옳… 옳습니다! 옳습니다!!”
‘이게 뭐야….’
군중 속에 섞여 열심히 환호를 보내는 사람 역시 눈에 익숙한 사람이다.
‘안기모 씨?’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제국 평민의 모습이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 마법을 벗겨내면 틀림없이 익숙한 모습이 나올 것이다.
안기모뿐만이 아니다.
얼굴만 기억하고 있는 파란의 길드 직원들도 보이기 시작.
몇 명이 이미 소리를 질러대며 주변 분위기에 고양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태초부터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이 대륙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말씀하셨다니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오! 친애하는 제국민 여러분들! 베니고어 여신님의 비호 아래 살아가는 이 제국이 정말로 평등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 배운 것 없는 무식한 놈 역시 사랑하는 가족을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악마에게 보내야 했다니까!”
“어이구….”
“저런….”
“옥수수 죽이라도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 무식한 놈의 일상일 터인데! 황궁에 자리 잡은 도둑놈들은 매일매일 술과 고기로 축제를 벌이고 있소! 대관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오!”
“그렇지!”
“제국민에, 제국민에 의한, 제국민을 위한 정치! 지금 이 나라에게 필요한 게 그거요. 우리 스스로가 계몽해야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다니까! 제국의 주인이 제국이라는 걸 우리를 멸시하는 자칭 고귀한 핏줄들에게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소!”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이요! 그렇고말고! 거두절미하고 투쟁해야 한다니까! 우리같이 배운 것 없는 멍청한 놈들이라도 제국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니까!”
“뭐,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친애하는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일단은 빨리 여기 있는 책이나 한 권씩 받아드쇼! 우리 형님, 아니, 우리와 뜻을 함께하고 있는 분이 직접 집필하신 서적이요!”
“그렇지만… 이건 황실에 대한 반역이 아닙니까.”
“황가에 대한 반역이라니! 그 황실의 핏줄들이 베니고어 여신께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지! 우리는 이런 책도 읽으면 안 된다는 말이요?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황제 폐하의 앞에 침을 뱉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우리가 반역죄를 뒤집어 쓴단 말이요. 제국은 황제 폐하의 것이 아니라 제국민들의 것이고 여신님의 것이요! 고작 책도 읽지 못하게 하는 나라가 정말로 정상으로 보인단 말이요? 그게 정상으로 보인다면 지금 당장 영주님께 달려가서 내 죄를 밝히시오! 내 떳떳하게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할 터이니!”
“민, 민주주의 만세!”
“민주투사 만세!”
“내 이름은 바크더쿠요! 민주투사 바크더쿠요!”
그 동안의 어쩔 수 없이 꽤 오래 자리를 비우기는 했다.
실제로 세상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살라딘이나 가면 쓴 남녀의 뒤를 캐는 일은 조심스러워야 했고 은밀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마치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서적에 손을 대고 있다.
목소리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늙어 보이는 노인이 입을 열어온 것이다.
“자네는 이방인인가?”
“아… 네.”
“이방인이 왔던 곳은 왕이나 황제 같은 것이 없다고 들었었는데… 그 말이 참인가?”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정말로 그런 나라가 있기는 있었구만. 아, 여기 이 책이나 한번 읽어보게나.”
슬쩍 책을 받아 들자 제법 작은 크기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숨기기 쉽게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제작된 것을 보니 아마 검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쓴 모양.
신성한 민주주의라고 적힌 책의 하단에 신원미상의 집필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오스칼?’
오스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덕구 씨가 말했던 것처럼 이걸 집필한 사람은 기영 씨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책을 펴자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이 보인다.
[제국통치에 제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제국민의 인권은 보장되어야만 하며 모든 제국민에게는 법률과 그를 이행하는 절차가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인권과 평등법칙은 제국민이 누려야할 ‘기본권’이며 이 평등법칙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에 따라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허….’
[제국은 제국민들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복지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앞서 나열한 것이 바로 국가와 국민이 맺은 계약이다. 제국은 기득권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계약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며 민중은 이것에 대해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국의 주권은 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해야 할 것이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말들을 섞어 놓은 느낌이었다.
정치학자들의 논리를 대륙에 가져와 입맛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여신 아래 만인이 평등하다는 베니고어 여신의 교리를 방패로 삼고 있는 것이 보인다.
‘확실히 기영 씨 솜씨야.’
글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이는 법이다.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길수록 책 안에서 튀어나오는 내용들은 가관.
제국의 또 다른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청은 완전히 분리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무척이나 여러 말이 적혀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만인의 평등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이다. 바로 그거요! 그게 오스칼 님이 하고 싶은 말이라니까! 거 참 이해력이 빠른 형씨구… 현, 현성 씨? 여, 여긴 어떻게….”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당황하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바크더쿠 씨, 잠깐 이야기 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씁쓸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 * *
이건 틀림없이 먹힌다.
‘먹힐 수밖에 없어.’
국민의 99.9%가 베니고어 신자라는 걸 생각해 보면 먹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이야기다.
성서에 몇 번 나오지도 않은 문장을 부풀릴 대로 부풀려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종교를 민주주의에 엮어버렸으니 이 서적이 탄력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급하게 집필했기 때문에 구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중은 이런 구멍에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신 아래 만인이 평등하다.
이 문장이 가지는 무게와 달콤함은 일반 제국민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일 테니까.
심지어 일반 성직자들에게도 무척이나 달콤하게 비춰졌을지 모른다.
모닥불에 앞에 앉은 채로 천천히 책을 덮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덕구 씨와 기모 씨가 시야에 비쳤다.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는 소리가 듣기 좋았지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명을 좀 들어도 되겠습니까?”
오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 당연.
그렇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저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 내가 먼저 말을 해야 될 것 같은데… 거, 길드 마스터 형씨는 왜 여기에 있었던 거요?”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정리가 되면 말씀드리겠지만 우선은 흑마법사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교황청이나 황실에 의뢰라도 받은 거요?”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럼 덕구 씨는….”
“뭐, 나야 우리 형님 심부름이지. 벌써 이번이 12번째요. 수도랑 멀리 떨어진 곳부터 천천히 작업하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 그 이지혜 씨 있잖소. 지혜 씨가 집어 주는 곳부터 이 책을 전파시키라는 특명을 받았다니까! 신기하게도 이 작업 하는 동안 귀족이나 기사 같은 양반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거 아니요. 그렇지 않소? 안기모 씨?”
“네. 덕구 씨 말대로 입니다. 동부 쪽으로 병력이 집중된 상황이니 지금 저희가 있는 서부 쪽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걸 겁니다. 그보다 길드 마스터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네. 일에 조금 집중하다 보니….”
“왕성에도 돌아가시지 않은 지 시간이 좀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중간에 사정이 조금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여러분을 마주친 겁니다. 그… 역시 이 책을 만든 것은 기영 씨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형님 혼자서 만든 건 아닌데… 지혜 씨랑 같이 만들었지. 희영 누님도 왕성에 종종 가서 도움을 주고 그랬던 것 같았소. 뭐, 아무렴 어떻겠소. 그보다 현성 형씨, 형님이 애타게 찾았던 것 같은데… 혹시 서로 못 본 지 오래된 거 아니요?”
“네. 사실은… 조금 지났습니다.”
“거, 형님이 그렇게 형씨를 찾았었는데… 쩝.”
“아. 그랬습니까?”
“아암. 그렇다마다! 왕성에서 조금 안 좋은 모양인지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소. 사실은 요즘에도 매일 저기압인 것 같다니까. 입이 삐쭉 튀어나와가지고 막 형님이 조금 화났을 때 하는 그런 표정 하고 다니는데, 하얀이 누님이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민주투사 바쿠더쿠까지 하고 있는 거 아니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암.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었다니까.”
“혹시 이 책은….”
“아. 그렇게 막 짜증 내면서 만든 책이요.”
“끄응….”
‘그럴 만할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일을 맡겨놓은 이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영 씨라면 잘해낼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1황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기영 씨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내가 아는 샤를롯트는 유능한 황제였고 샤를리아는 구제 불가능한 망나니.
이쪽 역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말하자면 이쪽이 실수를 저지른 셈이라는 게 된다.
평소에는 정말 믿음직한 사람이지만 가끔 이렇게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만큼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도 대충 보인다.
조혜진 사건 때도 그랬고, 그 외에도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할 것이다.
‘불만을 표현한 거야.’
덕구 씨의 말을 생각해 보면 이건 기영 씨 나름의 불만을 표출한 거라 생각하도 무방하리라.
‘고려하지 못했어.’
확실히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느낄 불안감이나 갉아 먹힐 정치적 위신을 계산하지 못했다.
문제는 단순한 불만 표출이라고 하기에는 저지른 일이 너무나도 크고 급진적이었다는 것.
옛말에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
바깥일에 치중하느라 안쪽의 상황에 너무 소홀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선물이라도 가져가는 게 좋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