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회귀자 사용설명서 283화
부디 혁명하라(2)
“신성한 민주주의.”
“네?”
“오스칼이라는 자가 집필한 책입니다. 아마 이기영 명예주교, 그 사람이 써내 유통한 것이 틀림없겠죠. 다들 읽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으로 흥미로운 서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방인들이 살던 곳에서는 이런 사상이 일반적으로 깔려 있나 보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저희 제국은 후퇴하고 있었던 게 맞았군요.”
“…….”
“이방인 한 사람이 며칠 만에 완성한 이 서적이 현 제국의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제국의 기득권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제국민을 이끌어 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요.”
“황녀 전하께서는… 이 신성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훌륭합니다. 무척이나 훌륭해요. 물론 베니고어 여신님의 교리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끌어낸다는 생각은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저희가 바라는 이상과는 상충하는 면이 있으니까요. 하나 어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라는 것에는 저 역시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 황권 체제에 익숙해져 있는 제국민을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는 여신님의 뜻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겸사겸사 교황청의 지원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어떤 면에서 본다면 여신님의 교리를 끌어온다는 것은 천재적인 발상입니다.”
“확실히….”
“네. 다소 부작용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효과적입니다. 불안해하는 제국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을 겁니다.”
“생각하고 계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전하.”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네. 지금 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호응해 오는 이들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눈 밑이 다들 퀭한 것을 보니 어제는 책을 읽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모양.
그야 그럴 게 뻔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작은 책은 엄밀히 말하면 제국의 최초로 유통된 새로운 종류의 성서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방인들의 대륙에서 온 사상과 이상의 결정체가 들어가 있는 서적이었다.
물론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제국의 현 체제를 뒤엎어 버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 아주 예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진행해 온 일이 이제야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이 옳았어.’
그를 궁지로 내몰면 체제를 붕괴시킬 거라는 판단이 옳았다.
물론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급진적이었던 터라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가 유능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 이쪽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최소한 6개월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제국 전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시민 혁명.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염원이자 꿈이었다.
생각해 보면 첫 시작은 몇 년 전 이방인 차희라와 빅터하르트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였다.
‘빅터 할아버지, 우리가 있었던 곳은 귀족이고 황제고 없었다니까. 이런 예법 같은 건 배운 적도 없어.’
딱 한마디, 정말로 딱 한마디였다.
정말로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목소리.
당시 황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이 꽉 찼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처음은 분명히 그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제가 다스리지 않는 나라.
귀족이 없는 나라.
‘그런 게 가능한가?’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 들어선 것은 당연지사.
물론 제국과 살을 맞대고 있는 공화국을 생각해 보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공화국 같은 경우에는 사정이 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수 집단에 권력이 치우쳐진 공화국은 모든 인간의 해방을 표방하고는 있었지만, 일당독재체제로 그 총통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 차희라가 말한 황제와 귀족이 없다는 의미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이방인들이 온 대륙은 예법을 배울 필요가 없는 장소다.
‘평등한 거야.’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한 것과는 달리,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우연히 들은 몇 마디에 그동안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의 대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답답함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고 결국에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은 이방인들을 성으로 초대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곳이 어딘지.
어떻게 그런 곳이 존재할 수 있는지.
황제가 없다면 어떤 이가 나라를 통치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방인들과 대화를 나눴지만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있는 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겁을 집어먹은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왕성에서 이방인의 대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졌으니 평범한 이방인이 겁을 먹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알 수 있었던 기본적인 정보만으로도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몇 년에 한 번씩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
시민이 뽑는 대표, 탄핵.
권력의 대한 국민의 견제, 이방인의 대륙의 대한 역사.
모든 것이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왕성의 초대된 이방인들로만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에는 곧바로 바깥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보는 눈이 많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틈이 나면 이방인들이 세운 자유 도시를 둘러보고는 했다.
그들의 삶은 어떤지, 그들의 어떤 일을 하는 건지, 새로운 대륙에서 들어온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것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상향이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곳 역시 가난이 존재했으며 빈민과 차별이 존재했다.
황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무력에 의해 위로 올라선 지도자들이 있었고 언뜻 보면 현 제국의 상황과 그다지 다른 게 없어 보였다.
회의감을 느끼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눈에 보였던 것이 바로 언론의 태동.
말 그대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언론의 태동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뀐 것 같은 기분.
타인의 눈으로 봐도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위 계층에 속해 있던 이방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권력자들을 보이콧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이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던 것은 마치 이야기로만 들었던 사건들의 작은 버전.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천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자유 도시 린델에 자리 잡은 거대길드 검은백조는 다른 이방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심지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검은백조의 지도자가 뒤바뀌어 버렸다.
“말도 안 돼….”
하위 계층의 이방인들은 그 어떤 피도, 그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고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무혈혁명.’
그걸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이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당시 언론이 피해자로 다루고 있었던 이기영, 아니, 언론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이 이방인을 관찰했고 심지어는 황녀의 권한까지 사용해 가며 뒤를 캐기 시작했다.
왕성에 들어와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를 색출해냈던 것.
캐슬락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던 것.
용에게 선택을 받고 교황청의 직위를 얻은 것으로 모자라 많은 귀족에게 사랑받고 있었던 것.
물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일 때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었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냐가 더욱더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가진 무기는 용이나 그가 만든 포션뿐만이 아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인맥 역시 그의 무기라 할 수 있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언론이라는 장치와 그걸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하나하나 배워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린델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새로운 희망이자 빛이 되어버렸다.
‘준비가 필요해.’
제국을 바꿀 수 있다.
‘제국민 역시 일어설 수 있어.’
뜻이 있는 이들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현 체제가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는 귀족, 깨어 있는 지식인. 분명히 존재할 거야. 분명히.’
이방인들이 역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를 움직여야 해.’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오던 것이 드디어 성과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무엇인가를 이룬 건 아니었지만 만약 누군가 기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리라.
마침 들려온 목소리에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황녀 전하.”
“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기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렵습니다.”
“저… 황녀님.”
“네.”
“죄송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죄송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말씀하셔도 됩니다, 남작.”
“다름이 아니오라. 혹시나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아아. 그야 여러분과 같을 겁니다. 아마 평범한 여생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물론 어렵겠지만 아버지도 언니도 새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예전에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신 생활을 말입니다.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하하.”
“황녀님, 그렇지만 항상 말씀드렸던 것처럼….”
“남작, 저 역시 다른 제국민과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운이 좋아 그들보다 더 교육받을 수 있었고 운이 좋아 그들보다 더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해 알아보는 동안 깨달을 것이 많습니다. 저는 남들의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대들처럼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고 평범한 연애도 해보고 싶습니다.”
“황녀 전하다운 말씀이시네요. 하하. 혹시나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하하. 그거야말로 백작부인다운 질문이십니다.”
“어쩌면… 명예주교님을 항상 지켜보시던 게….”
“하하하하하. 아닙니다. 그는 흥미가 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제 타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의 상사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조금 더 제 취향에 가깝지요. 경들 앞에서 제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집시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질 테니까요.”
“네, 전하.”
“편안한 밤 되세요, 전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보였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신성한 민주주의를 다시금 살펴보자 이전에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사상이 조금 더 명확하게 머릿속에 박히기 시작.
당분간은 이 책을 반복해서 읽느라 시간을 정신없는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주권은 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제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다른 이들 역시 지금 자신과 상황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구간에서, 또 어떤 이들은 불이 다 꺼진 학교에서, 또 어떤 이들은 작은 촛불에 의지하며 이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황성 안에서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을 피해 서적을 공유하고 서로 토의하는,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며 그렇게 민중은 계몽하고 있을 것이다.
이 작은 성서가 혁명의 시작이요, 제국민들의 빛이 될 것이다.
“그자는 천재야.”
작은 책을 꽉 껴안은 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예 혁명.”
계획대로만 된다면 제국은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은 채 한 단계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