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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84화 (283/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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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284화

부디 혁명하라(3)

“명예혁명은 개뿔.”

“틀림없어요. 노리는 게 바로 그거겠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네요. 혁명을 위해 들고 일어설 제국민을 안정시킨 뒤, 제2황녀와 단합한 귀족들이 기존 기득권을 압박해 체제를 바꾸자는 계획이겠죠. 이게 바로 제국민의 뜻이다! 같은 명대사 한 번 날려주고요.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제국민이 피를 흘리는 걸 샤를롯트 그 여자가 바랄 리가 없으니까요.”

“듣기 좋은 소리긴 하네. 무혈혁명, 명예혁명.”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역시 다시 한번 1황녀 쪽에 붙어서 2황녀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게 나으려나?”

“그건 안 할 거야. 원래 그런 멍청한 사람과는 같이 일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다른 선택지는 전부 논외. 혁명은 진행될 거야.”

“장단에 맞춰주겠다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 샤를롯트가 원하는 방향과는 조금 달라. 내가 원하는 건 명예혁명이 아니라 투쟁의 완성으로 만들어지는 혁명이거든. 애초에 혁명을 시민 쪽에서 주도한 것과 제2황녀 측에서 주도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 내가 뒤통수가 얼얼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야, 누나. 일이 그렇게 끝나면 샤를롯트는 분명 제국의 상징으로 남을 거야. 명예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공화국이 숟가락 얹는 걸 막아야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는 거지. 협상 테이블이 잡힌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는 거야.”

“그쪽에서도 무슨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그냥 기분 나빠서 뒤엎어 버리려고 하는 건 아니죠?”

“단순히 기분이 나빠서 아무 죄 없는 제국민들이 피 흘리게 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지분이 2% 정도 있기는 한데 미비한 수준이니 다른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글쎄요. 내가 생각하는 오빠는 그 정도로 쓰… 아니, 멋있는 간신이니까요.”

“제국의 상징은 샤를롯트가 아니라 오스칼이 될 거야.”

“아아아아! 끝까지 비선실세로 남으시겠다. 이건 좋은 소식이네요.”

“솔직히 웃기지.”

“뭐가요?”

“이쪽이 뭘 터뜨릴 줄 알고 제국민들이 일어서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줄게. 신성한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인데….”

“언론으로 끓어오르게 한다는 건 예상하고 있을 거예요. 대비도 다 되어 있을 거고. 제2황녀는 이미지도 좋으니 미지근한 걸 터뜨렸다가는 곧바로 수습될걸요? 뭐 좋은 거라고 가지고 있어요?”

“그건 비밀. 한번 맞춰봐. 기대해도 좋아.”

“어렵네요. 아직 상용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마력 홀로그램을 쓰실 거라는 건 예상이 가는데…. 그 안에 들어갈 콘텐츠가 문제네요. 단기간에 끝내려면 대륙 전체가 끓어야 되고 민중을 화나게 만들려면 보통 내용 가지고는 안 될 텐데…. 귀족 하나가 평민들 쥐어 패는 몰래카메라라도 찍었어요? 아니면 샤를리아 평소 행실이라도 찍었나? 사실 촬영할 시간도… 아! 하얀 씨한테 시키신 일이 그거였네요. 전에 말한 보이지 않는 눈이 달렸다는 것도 그런 의미고….”

“그건 정답. 그래도 내용은 말해주지 않을 거야.”

“악취미네요. 뭐, 오빠가 준비한 일인 만큼 콘텐츠는 따로 걱정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민주투사 오스칼 역할을 누가 할지에 대해서도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쪽에서 준비할 시간을 안 주고 몰아치는 게 중요할 것 같으니까. 아무튼 전 일어날게요, 오빠. 준비할 일도 있고. 아! 그리고 이건 덕구 씨한테 온 물건. 편지도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 광년 달래러 가기 전에 한번 읽어 봐요.”

“응. 고마워, 누나.”

“아. 그리고 마를린 영애한테 온 감사의 편지 44통도 있어요.”

“그건 나중에 읽어볼게.”

“그럼 그렇게 해요.”

슬그머니 편지를 이쪽 테이블에 두고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안 그래도 샤를리아를 만나러 가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은 타이밍.

덕구 녀석에게 최근에도 정기보고를 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마 이번에도 쓸데없는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보고 싶다. 언제 올 거냐.

정도의 내용일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두툼한 것을 보니 뭐 다른 것이라도 채워 놓은 모양.

아마 어딘가의 특산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마력으로 봉인되어 있는 봉투를 찢고 녀석의 편지를 꺼내들 때.

그동안 받아왔던 글씨체와는 조금 다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덕구 씨에게 대충의 사정은 들었습니다.]

“어?”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영 씨에게 큰 짐을 지워드린 뒤,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김현성?’

편지를 보낸 것은 김현성이다.

조금 익숙한 글씨체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얘가 왜 덕구랑 같이 있어?’

분명히 박덕구는 외곽에서 작업을 치고 있었던 걸로 기억.

민주투사 바쿠더쿠가 되어 미친 듯이 활약하고 있을 녀석이 어떻게 김현성과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연히 박덕구를 만났다는 설명이 있는 것을 보니 사람 인연이라는 게 정말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간에 녀석의 편지를 읽으니 무언가 사연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

뭔가를 굉장히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실 그런 변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구구절절 사과의 말을 적은 걸 보니 본인도 본인이 너무했다는 걸 인지하는 모양이다.

진심 어린 사과의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바쁜 일이 있었고 녀석은 그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물론 겨우 이정도로 가지고 있던 찝찝한 기분이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갑작스러운 변화와 예상하지 못한 일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기영 씨를 믿고 맡긴 만큼, 끝까지 기영 씨를 믿겠습니다. 사실은 조금 다른 방향을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기영 씨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피해를 최소화하여 안정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어느 정도 피를 흘리는 걸 감수할 수 있다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김현성 역시 완벽한 무혈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영 씨가 어떤 걸 걱정하시는지 예상이 갑니다. 아마 계획하고 계신 일들 중 가장 걱정이 되는 건 공화국의 개입이겠지요.]

‘영 맹탕은 아니야.’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의 개입은 최대한 억제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부디 이 일이 기영 씨가 그리는 그림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이건 다행이네.’

확실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쪽의 계획에 나쁘지 않게 반응하고 있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김현성이 내부의 일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기분이 좋다.

전부다 뒤집겠다고 결심했지만 민중의 성스러운 투쟁이 녀석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

솔선수범해 공화국의 개입을 막는다고 해줬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좋아!’

구구절절 써내려간 편지의 끝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문구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편지 뒤, 또 다른 봉투에 선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기영 씨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보내봅니다.]

“아니 얘는 뭘 또 이런 걸 보냈어?”

소포는 박덕구가 보낸 특산물이 아니라 김현성이 보낸 선물.

허겁지겁 녀석을 꺼내본 것은 당연했다.

나도 모르게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아니… 또 무슨 이런 걸 보내고 난리야. 나 참.”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무한의 가방-영웅 등급]

“이거 죽이네…. 키야….”

[전설적인 사냥꾼이자 가죽세공의 장인,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수세기 전에 만들어 놓은 무한의 가방입니다. 드레이크의 가죽을 장인이 직접 마감한 이 가방은 모험가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편리한 것은 물론, 방어구와도 같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의 가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장된 아공간은 그 규모가 광할하며 물품 역시 매우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습니다. 행운 스탯을 +3 올려주는 부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현성 님, 충성 충성!”

안 그래도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덩실덩실 춤추고 싶은 마음이 자라난다.

원망스러운 마음 역시 사르르 녹는 것을 보면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뇌물에 약하기는 한 모양.

심지어 튜토리얼 던전 때 김현성이 들고 다녔던 가방보다 더 좋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직업 특성상 여러 가지의 포션을 들고 다녀야만 했던 나에게는 꼭 필요했던 아이템.

이런 걸 갑자기 어떻게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박덕구와 함께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만큼 야밤에 몬스터의 보물창고 같은 것을 털었을 것이다.

슬그머니 가방을 한번 매보니 확실히 어울리는 느낌이다.

심지어 가방에 손을 넣자 뭔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센스까지!’

안쪽에 고급 촉매들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기한 소재가 많은 것을 보면 녀석 나름대로 엄선해 선별한 것 같았다.

입가가 계속해서 히죽히죽 올라가는 것은 당연지사.

필요한 시기에 딱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심지어 이쪽의 계획을 무조건 밀어준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 눈치도 조금은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제2황녀보다는 이쪽을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브레이크는 사라졌다.

김칫국 마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혁명 이후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기 시작한다.

‘곧바로 실행해도 문제없겠어.’

미루고 있었던 마지막 일.

신성한 민주주의의 저자, 이쪽의 대역 오스칼을 결정하는 게 사실상 마지막 조각이었다.

기왕이면 민주투사 바쿠더쿠처럼 밑바닥에서부터 혁명을 함께 지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방인이어서는 안 되고 귀족도 조금 애매한 것 같은 느낌.

샤를리아처럼 멍청하지 않고 샤를롯트처럼 똑똑해서도 안 된다.

다시 태어날 신생제국의 지도자, 신성한 민주주의의 저자 오스칼은 적당히 머리를 굴릴 줄 알면서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조금 대놓고 표현하자면 이쪽이 컨트롤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거다.

문제는 주변에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애초에 이기영의 인맥은 평민과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알아서 좋은 인간들과 인연을 맺다보니 자연스럽게 귀족이나 교황청의 인물들만 만나게 된 것.

밖이라도 나가봐야 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이기영 명예주교님. 화, 황녀님이 찾으십니다.”

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온 것.

반사적으로 문을 열자 최근에 꽤나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아! 아리스 시녀님!”

“아… 네?”

“잠시만. 잠시만 방으로 들어오시죠.”

“네? 그게 무슨…. 아! 이럴게 아니라 샤, 샤를리하 전하께서….”

“잠깐만 시간 좀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침대나 소파에 앉으시죠.”

“명, 명예주교님? 저… 소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저… 저… 너무 가, 갑작스럽습니다. 명예주교님. 이, 이 일을 황녀님이 아시면… 그, 그리고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물론 어떻게 밀어붙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 같은 미천한 시녀가 어찌 감히…. 그러니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적임자는 꽤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둘이 있을 때는 말씀을 낮추셔도 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오스칼 님.”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오돌오돌 떨고 있는 아리스 시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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