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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91화 (290/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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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291화

반쪽짜리 혁명(6)

“어딜 그리 바쁘게 가시고 계십니까. 황제폐하.”

‘나이스야.’

무척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지는 것은 당연지사.

황제와 귀족들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으리라.

‘도망치고 있었네.’

황제 쪽을 잘 캐치해 준 정하얀에게도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역사적으로 봐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도망친 것은 언제나 기득권이었으니까.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하거나 끝까지 백성들과 함께하는 이들은 손에 꼽힐 만큼이나 적다.

당연하지만 저 우둔한 황제와 적폐축제를 벌이는 귀족들이 그런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 집단의 수장이 안전해야 한다는 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것은 온전히 그들의 책임.

여신의 거울이 비추고 있는 황제를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이미 불신이 가득했다.

‘타이밍도 나쁘지 않고.’

멍하니 디아루기아를 바라보며 하나둘 무기를 떨어뜨리는 모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사실 드래곤은 무적이 아니다.

몸 상태가 성치 않은 상태로 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캐슬락에 모인 이들은 디아루기아를 죽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녀의 아이를 인질로 잡은 악당 덕분에 몇 시간 동안이나 샌드백을 두드렸을 뿐이지만 그래도 승리라면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거다.

드래곤의 단단한 가죽도 마력을 밀어 넣은 마법이나 검을 맞으면 뚫리게 마련이다.

기본적인 저항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드래곤 역시 체력의 한계도 있고 내구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가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상징성이 더욱더 중요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 모양인지 속으로 말을 걸어오는 디아루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진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정말로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물론. 애초에 제대로 싸우려고 했으면 멀리서 브레스나 쏘아대면 되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들어왔겠습니까? 자잘한 공격은 우리 쪽 마법사들이 보호해 줄 겁니다. 굳이 지금 여기서 인간들을 밟아 죽일 필요도 없고 적당히 폼 잡으면서 소리나 지르시면 됩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뭔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라….]

‘착각입니다, 디아루기아. 구경거리가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겁니다. 그러니까 마력 같은 것도 팍팍 집어넣어서 그워어어어 한 번 더 울어주시면 됩니다. 혹시 뭐 피어 같은 거라도 사용하실 수 있으시면 해주시고요.’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어딘가에 등장하는 투명한 드래곤은 아니지만 아무튼 간에 디아루기아는 다시금 힘차게 울부짖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그 소리를 듣고 일부 병사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

미리 이야기를 해놨던 시민혁명단 쪽까지 그 여파가 미칠 정도였으니 굳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가 없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민중이나 병사뿐만이 아니다.

황제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중.

재미있었던 것은 늙은 영감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솟아나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나를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나와 디아루기아가 이 폭동사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

이쪽이 아직까지 자신의 통수를 후려갈긴 줄 모르고 있으니 나라꼴이 이렇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오오. 이기영 명예주교! 드디어 와주었군. 드디어 와, 와주었어!”

“…….”

“내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지. 충성스러운 자네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당장. 지금 당장 저 반역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게…. 다, 당장!”

“…….”

“이… 어리석은 반역자들. 허… 허헛. 그게 드래곤인가 보군. 믿음직스럽네. 명예주교. 아암.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구만.”

“…….”

황제뿐만이 아니다.

함께 있던 귀족들 역시 아이돌이라도 만난 삼촌 팬들처럼 열렬한 응원을 내보내고 있다.

크게 소리를 내지르고는 않지만 마치 로미오를 만난 줄리엣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샤를리아의 모습은 가관.

그렇지만 굳이 그녀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명예주교님! 하하하핫!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저 더러운 반역자들을 지금 당장 죽여 버립시다!”

“명예주교님! 명예주교님! 기다렸습니다!”

“어서! 저들을 쓸어버리게! 명예주교! 저 악마들을 지금 당장 몰아내야 하네!”

애초에 이방인들 역시 이 혁명에 가담했다.

어째서 내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리라.

나라도 황성에 자리를 잡고 제대로 포효하고 있는 드래곤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가열 차게 돌아가는 행복회로를 부수고 싶어진 것은 당연.

잠깐 정적이 찾아온 장내에 이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아군이 아닙니다. 하핫.”

“어?”

“저 역시 시민혁명단의 일원이자 오스칼 님을 따르는 제국민 중 하나라 이겁니다. 폐하.”

믿기 싫다는 얼굴. 저런 표정을 보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자, 장난은 되었네… 명예주교. 허… 허허… 내가 이거 명예주교를 너무 섭섭… 하게 한 모양이구만. 그, 그래! 무엇이 문제였나. 명예주교. 여, 역시 북부에 영지를 준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구만….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말해보게나. 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걸 주겠네! 명예주교!”

“하하하.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

“그, 그럼 무엇을 원하는 겐가. 내 자네의 말이라면 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네.”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셔도 제가 원하는 건 이루어질 겁니다. 폐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를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배신감을 느끼게 해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이 좋다.

숨을 크게 들어 마신 이후에 커다란 목소리를 내뱉는 것은 당연.

정하얀의 음성 증폭 마법이 날아 들어왔고 이윽고 내 목소리는 다시금 수도를 커다랗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신의 거울도 나와 디아루기아를 비추고 있으니 아마 전 제국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으리라.

“저 모습을 보십시오! 제국의 병사들과 황제를 따르는 기사들이여!”

“명, 명예주교….”

“그대들이 지키자고 했던 황제의 모습을 그 눈에 똑똑히 새겨 보십시오! 저게 바로 그대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자고 했던 구 제국, 기득권의 실체입니다. 그대들을 희생양으로, 버린 말로 전장에 내몰아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는 이들입니다! 저것이 과연 제국에 어울리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게 무슨…. 명예주교!!”

“제국에 필요한 것은 제국민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는 이가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그대들을 위해 싸우는 이들입니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카메라가 오스칼 쪽으로 돌아간다.

땅바닥에 뒹굴었는지 흙먼지는 뒤집어쓴 것만 같았고 부서진 갑옷사이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머리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오스칼의 얼굴은 그야말로 내가 이전에 말했던 지도자의 모습에 어울린다.

다시 한번 손짓하자 정하얀의 카메라는 황제 쪽을 비추기 시작.

잔뜩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오스칼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아마 저 황제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게 내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구나.’

현자타임이 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무기를 버리십시오! 제국의 병사들이여! 무기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싸우십시오! 그대들 역시 제국의 일원이고 우리와 함께할 자격이 있습니다. 여신의 거울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쪽의 편에 설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모든 것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입니다. 여신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저! 이기영 명예주교가 여러분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바젤 추기경님과 많은 사제님들! 신성기사단이 역시 저희와 함께할 것입니다! 추악한 기득권의 편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신성한 민주주의에 품에 안겨 영광스러운 여신의 성전에 함께하시겠습니까!”

슬그머니 선희영 쪽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여기저기에서 신성력이 뿌려진다.

이쪽과 함께하고 있는 모든 사제는 물론 이방인들마저 다함께 신성력을 뿌려대니 그 모습 또한 장관이다.

“여신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저희는 지금껏 그 말씀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신님께 죄를 저지른 것은 저들의 탓입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을 반역한 저들을 몰아낸다면 우리는 스스로 여신님께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국민 여러분! 성전에 함께 하십시오! 여신님에게 대항하지 마시고 여신의 검이 되십시오!”

찬송가와 기도회라도 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다.

그렇지만 효과가 없을 리 없다.

신성력에 둘러싸여 찬란한 빛을 내 뿜고 있는 시민혁명단.

숨기 급급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국의 병력.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기 시작하고 제국의 편에 섰었던 사제들 역시 진영을 바꾸기 시작한다.

“저,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저 역시 여신의 편에 서 검을 들겠습니다.”

백인장이나 일부 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장관이네. 장관이야.’

지금까지 여러 태세전환을 봐왔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은 유래 없는 대규모 태세전환이다.

제국민의 99.9%가 베니고어 여신님의 신자.

종교와 이념을 섞어놓는 게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저 더러운 기득권들의 목을 치고! 제국민을 위한 신성한 민주주의를 되찾아오는 것만이 우리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부운! 민주투사 아르기모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갑시다!”

“이, 이기영 명예주교오오오오! 샤를롯트는 어디에 있느냐! 샤를롯트는! 당장 저… 저! 커… 허어어억!”

항상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이쪽을 짜증 나게 만들었던 황제의 고함소리는 가관.

뒷목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다리가 풀렸는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린다.

샤를리아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과 이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귀족들을 밀치고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황제는 버려도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명예주교님이 저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저도 함께 있습니다! 저 샤를리아입니다! 샤를리아입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과 사랑을 속삭였던 샤를리아입니다. 함께하자 약속을 드렸던 샤를리아입니다!”

사랑을 나눴던 기억은 없다.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미 여신의 거울은 그들을 비추고 있지 않다.

대신 다시 한번 나를 비추고 있었고 다시 한번 오스칼을 비춰주고 있었다.

미디어라는 것이 이래서 무섭다.

이미 제국민과 혁명단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황.

황성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던 병력은 반절 이상이 태세전환을 마쳤고 이미 시민혁명단은 황성으로 침입하고 있다.

안에 있는 여럿 귀족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이야기.

물론 나와 디아루기아는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일은 해결되어 있을 것이다.

갑작스레 지금 황제를 잡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눈에 보이는 건 아직까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샤를리아의 얼굴.

‘쯧.’

황제는 이미 실신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라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샤를롯트 황녀 전하 역시 우리 시민혁명단을 지지해 주고 계십니다!”

나름의 폭탄 발언이다.

나만 원망 받는 것은 조금 억울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숨어 있을 샤를롯트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민중은 소리를 내질렀지만 황제와 샤를리아의 표정은 전력으로 일그러지는 중.

“커허어어억!”

발작이라도 온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황제와 비명을 지르는 샤를리아.

“샤를롯트! 샤를롯트! 너였구나! 너였어. 네가 명예주교님을! 네가!”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놓치기 싫은 종류의 가족 드라마다.

‘쯧쯧.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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