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
회귀자 사용설명서 293화
반쪽짜리 혁명 (8)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히 보인다. 쌍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따지거나 한마디 하고 싶은 얼굴, 그렇지만 다가오는 바젤 추기경과 카트린 공작부인을 보고서는 그대로 입을 닫아버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사실 그녀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 역시 방금 전 이쪽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이 불길에 휩쓸릴까 전전긍긍하며 숨어야 했으리라.
“하하하. 저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샤를롯트 님이 이번 일의 숨은 공신이셨나 봅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황녀 전하.”
당연히 따봉을 받을 만하다. 단언컨대 나 혼자 움직였다면 절대로 이렇게 빠른 시간에 혁명을 완성할 수 없었으리라.
슬그머니 입을 열자 다시금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보인다.
“말씀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사실 샤를롯트 님이야말로 이 혁명의 1등 공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를 함께 퍼뜨려 주시고 또 여러 가지 방향에서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커다란 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민들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신다고 하니 다른 황실분들 역시 샤를롯트 님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그랬더라면 민중들이 궐기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
“하하하.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샤를롯트 님. 아무래도 우리 샤를롯트 님께서 감격에 겨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시던 혁명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만하지요. 아! 그리고 2황녀 전하를 따르시는 귀족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이리로 오시지요. 사실 시민혁명지지선언문에 함께 해주시지는 못하셨지만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함께 했다는 사실은 모든 제국민들이 알아 줄 겁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있는 일부 귀족들이 보였다. 카트린 공작부인과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다른 귀족들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 처음에 조금은 불안해했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인가 샤를롯트 진영을 벗어나 이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쪽이 대세인지를 벌써부터 파악한 것이다.
‘그래야지.’
정말로 샤를롯트의 뜻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은 아직까지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지만 단순한 숫자 채우기나 개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던 이들은 벌써부터 태세전환 버튼을 눌렀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자꾸만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따질 수 있을 리가 만무.
아마 자신보다는 자신의 뒤쪽에 있는 귀족들을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쪽의 말 한마디면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와 함께한 귀족들까지 제국민들의 심판을 받는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조금 웃으셔도 됩니다. 샤를롯트 님 조금 피가 흐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민중의 승리가 아닙니까.”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지는 않지만 내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슬그머니 악수를 청하자 내 손을 꽉 쥐는 꼴은 가관.
‘아오 아파.’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하하하. 이거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샤를롯트 님과도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네만…….”
“대단한 친분은 아닙니다. 바젤 추기경님. 같은 뜻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어떻게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샤를롯트 님께서도 여신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아주 각별합니다.”
“그건 잘 알고 있네! 샤를롯트 님이 아주 큰 결단을 내렸구만.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텐데…….”
“그만큼 제국민들과 여신님을 생각하시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자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성난 민중이 보일 수도 있으니…… 아마 저와 함께 계시면 안전할 겁니다. 샤를롯트 님.”
“…….”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녀님. 뭐 이 정도가지고 배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샤를롯트 님이 제게 해주신 것들이 진짜 배려이지요.”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통쾌함이 밀려들어 온 것은 당연지사. 실실 웃는 내 얼굴에 펀치라도 한 번 먹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지금 철저히 을의 입장에 있다.
아마 속으로도 내 의도가 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리라. 정확히 말하면 어째서 자신을 살려두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 당연, 지금까지 같이 활동해 왔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나와 샤를롯트는 이번 혁명을 분기점으로 다른 노선을 타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 더이상 샤를롯트라는 인물은 필요가 없다. 김현성이 내게 한 부탁을 알 리가 없는 그녀는 지금쯤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 내가 널 왜 살려두고 싶겠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나오는 것은 혁명 이후의 뒷정리와 수습에 대한 것이 전부일 터. 그렇지만 그 일은 그녀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아니지. 그건 아닌가.’
대다수의 귀족들이 죽었으니 혼란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인물도 필요하다. 오스칼과 시민 혁명단의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며칠 전까지 업무에 업자도 모르는 이들이 한 나라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샤를롯트 진영의 귀족들도 같이 움직여야겠네.’
그게 맞다.
‘살리기를 잘했어.’
샤를롯트를 살린 것은 어디까지나 김현성의 부탁 때문이었지만 이쯤 되니 그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황실이 제국민에게 주권을 되돌려 주는 그림도 그릴 수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샤를롯트의 존재는 신의 한 수다.
여러 가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도 여기저기에서는 비명 소리들이 들려온다. 대부분이 적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비명 소리.
나는 커다란 감흥이 없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는 게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아. 저기 여신의 거울을 보게나! 이기영 명예추기경. 악독한 황제와 사치밖에 모르는 1황녀가 드디어 여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사로잡혔나보군. 쯧쯧. 참 경우가 없어. 경우가. 어떻게 한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는 황제가 자신을 지키는 이들을 두고 도망칠 수가 있는지…… 쯔읏. 그렇지 않습니까, 카트린 공작부인.”
“네. 바젤 추기경님. 황실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자신들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샤를롯트 님을 염두에 두고 한 소리는 아니니까요.”
때마침 여신의 거울에서도 시민 혁명단이 황제와 그 일당들을 처리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샤를리아의 상태가 제법 괜찮은 걸 보니 정하얀은 한발 늦은 모양. 그렇지만 빼액 빼액 소리를 지르는 꼴은 아직 여전하다.
-샤를롯트…… 샤를롯트 이 더러운 년! 모든 게 네년 탓이다. 모든 게!
-…….
-이거 놔라! 이거 놔! 나는 제국의 황녀다! 감히 네깟 놈들이…… 네깟 놈들이!
-…….
-이거 놓으라고 하였다!
당연하지만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동부 귀족들의 표정은 싸늘하다. 마를린 영애에게 뜨거운 차를 끼얹은 걸 아직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들도 참 무서운 사람들이야.’
이쪽과 한편이라는 게 다행스럽다. 아무튼 간에 영상에 비치는 샤를리아를 기점으로 비명 소리 대신 함성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혁명단에게 질질 끌려오고 있는 기존 기득권들의 모습은 나름대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
누가 봐도 이번 게임은 시민 혁명단의 승리다. 저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그나마 남아 있던 저항세력들도 빠르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백기를 들거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민중의 승리입니다!”
“제국민의 승리입니다! 저희 시민 혁명단의 승리입니다!”
“베니고어 여신에게 축복이 있으라!”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오는 한편.
“저 죽일 년!”
“당장 저 더러운 여신의 반역자들의 목을 쳐야 합니다!”
“죽여라! 죽여!”
한 번 더 피를 바라는 이들은 광기에 잠식되어 소리를 내지른다. 감격적인 승리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도 보이고 여신께 기도를 올리는 자들도 보인다.
누가 봐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신의 거울은 다시 한번 오스칼 쪽을 비춘다.
이쪽에서 차기 지도자로 낙점한 만큼 그녀의 홍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 여전히 오스칼의 모습은 숭고해 보인다.
신성한 민주주의에 깃발을 들어 올리고 여러 가지 상처를 내버려 둔 채로 혁명단을 지휘하는 모습은 확실히 아름답다.
‘키야…… 사람 하나는 잘 뽑았네.’
본래는 희생양으로 쓰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제국이 그리고 있는 이상 그 자체다.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오스칼의 입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
-투항하십시오! 아직까지 베니고어 여신님의 반대편에서 이자들을 위해 저항하고 있는 제국민 여러분들은 무기를 버리십시오! 더 이상의 피를 흘리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제국민들의 승리입니다.
터져 나온 환호성. 그야말로 제국이 떠나갈 듯이 울리는 환호성이다.
-네. 그렇습니다. 제국민들의, 시민 혁명단 여러분들의, 민중들의 승리입니다!
‘좋네, 좋아.’
-여러분들의 흘린 피로 일구어낸 승리입니다. 여신님의 승리입니다!
‘아주 좋아!’
-그렇지만 여러분, 이 승리는 저희들의 힘만으로 일구어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물론, 그래야지.’
-우리 시민 혁명단을 지지해 주시는 모든 이방인과 그 이방인들의 중심에 서 계신 제국 8좌 여러분들, 또 한 시민 혁명단을 지지해 주신 일부 귀족 여러분들 역시 오늘의 승리를 함께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지! 고거지!’
-교황청의 바젤 추기경님과 또 제국을 위해 커다란 결단을 내려주신 샤를롯트 님 역시 오늘의 승리에 주역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말 잘한다! 우리 아리스!’
-우리 시민 혁명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 주신 그분들도 이 자리에 함께할 자격이 있습니다!
‘바로 그거야.’
슬슬 올라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함께 자리에 있는 얼굴에 자부심이 깃드는 것은 당연지사. 함께 해주신 시민 혁명단 여러분들은 어느새 우리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 오스칼의 적절한 선동과 지원이 빛을 발한 것이다.
“명예추기경, 이제…….”
“아아. 함께 올라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전에 보는 눈도 많으니 입고 있는 옷들도 대충 찢고 흙먼지도 조금 묻히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함께 싸웠다는 인상을 남겨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본디 대중들이란 건 이런 모습에 환호하는 법입니다.”
“아 맞네요. 이기영 님의 말이 맞아요. 확실히 저희 옷만 너무 깨끗하면 조금 이상해 보이겠네요.”
“자자. 제가 조금씩 들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샤를롯트 님도 이리 오시지요. 원래 이런 건 보여지는 모습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하하하하하.”
이쪽이 조금 손을 쓰기 시작하자. 확실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격전의 투쟁을 함께한 것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오스칼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와중에도 환호성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완벽한 제국민들의 승리.
그렇지만 단상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이쪽이 꼽아놓고 뽑아놓은 시민 혁명단의 간부님들과 설 줄을 잘 선택한 우리 기존 기득권 여러분들. 이방인들과 일부 교황청의 인사.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진데 뭐.’
이런 종류의 혁명은 본디 미디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푸하하하하핫!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제국민 여러분들!!”
그 말 그대로였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