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296화 (295/1,590)

# 296

회귀자 사용설명서 296화

시간이 흘렀다(2)

흐른 시간만큼이나 세상은 변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 아니 이제는 신성민주교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와 그 주변 정세가 달라진 것뿐이었지만 적어도 내부에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단 제국을 아우르는 계급이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것.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계급이 있기야 했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여전히 막대한 부를 가지며 의원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고 샤를롯트 역시 의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나마 신분제가 폐지됐다는 것은 일반 민중들도 환호를 보낼 만한 이야기였다.

귀족이나 황족 같은 특권 계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물론 사제들이라는 특권 계층이 있기야 했지만 애초에 교국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는 만큼 교황청이 누리고 있던 특혜들에 대해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한 민주주의를 토대로 이전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 신에게 봉사하는 사제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라면 응당 누려야 하는 특권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쪽이 생각한 그대로. 아직 배포가 전부 끝나지는 않았지만 여신의 거울은 각 세대마다 하나씩 보급됐고 여신의 거울으로 송출되는 이쪽의 콘텐츠는 모조리 현 정부와 이방인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포장되어 방영됐다.

정보가 많이 풀리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던 것이 당연.

아주 조금이라도 나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애초에 심사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텔레비전의 이름이 무려 여신의 거울이다. 이 물건이 여신의 축복이라고 알고 있는 대다수의 교국민들이 바보상자에 사로잡힌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라는 거다.

그 결과 언론으로 여론을 흔드는 작업은 말 그대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조지 오웰의 소설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야 했지만 애초부터 바라던바.

우리 안이 편하면 동물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지 않기 마련이다.

지난 시간 동안 교국민들을 가두는 사육장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사육장의 밖을 나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행복해하면 그걸로 끝이지 뭐.’

진실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신의 축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의 문제는 우리의 아리스 오스칼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조금 삐걱거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본인이 열의가 있고 의욕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교국 내부보다는 외부의 이야기였다.

‘왕국 새끼들이 정신이 나갔나.’

방금의 첸코 의원에게 들었던 것이 묘하게 머릿속에 남은 것은 당연지사. 이쪽의 행보 하나하나에 민감해하는 왕국연합이 문제 아닌 문제였다. 물론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근처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혁명이 터져 황족의 목이 달아났으니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왕국에도 비슷한 종류의 혁명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 있었던 세계사만 살펴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자꾸 교국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교국 기사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든 만큼 해외세력과 척을 지는 건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는 거다.

‘동맹’

교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했고 공화국과의 사이를 개선시키는 작업 역시 필수였다. 교국 내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한계에 부딪친 것은 당연지사.

이기영의 첫 번째 외교무대로 중립국 라이오스를 선택한 것은 너무나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물론 디아루기아에게는 이 소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오늘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거군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부터 이야기해 두기도 했고… 최근에는 일을 끝낸 이후에는 항상 둥지에 들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이었으니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생색을 내거나 협상의 카드로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수업 참관에도 함께했으니….”

“본래대로였다면 몇 달 전에 지켜져야 했던 약속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애초에 휴교를 때리고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에 들어간 학교에 어떻게 수업 참관을 가겠습니까. 이렇게 더 좋은 환경에서 더 크게 참관에 함께 했으니 솔직히 그 일로 저를 탓하는 건 부당합니다.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린데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열과 성을 똘똘이에게 쏟았고 똘똘이도 충분히 즐거워하는 마당에 자꾸 이렇게 불만을 표현하시면 저도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제가 둥지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 중에 혹시라도 똘똘이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무슨….”

“이를테면 디아루기아, 당신이 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든가….”

디아루기아를 도발하기 위해 던진 말이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대놓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슈바… 나도 인기 많은 사람이야.’

조금 독특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는 하지만 적어도 저런 취급을 당할 정도는 아니다.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은 당연지사. 마침 똘똘이, 아니 디아루리아와 막스가 모든 수업을 마치고 뛰어오는 것이 보여 디아루기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흠칫 몸을 떨기는 했지만 똘똘이의 앞에서 그녀와 나는 사이좋은 부모를 연기한다.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자 디아루기아는 나를 흘깃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이쪽을 떨어뜨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눈앞에 있는 디아루리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아직까지 강현욱 박사의 솔루션은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으니까.

“아빠! 나 오늘!”

“모두 다 지켜보고 있었단다. 디아루리아.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눈에 보이더구나.”

“히히히힛!”

“이런 수업 말고도 엄마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디아루기아는 조금 어땠어?”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디아루기아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아까 전까지만 해도 썩은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루기아 역시 딸을 위해 사랑을 연기하고 있었다.

“저도 잘 봤어요, 여보. 그보다 참 대단하더구나, 디아루리아. 특히 마지막 검술시연은 정말….”

“…….”

물론 뒤틀린 황천의 기벽을 가지고 있는 똘똘이의 눈에 우리 둘의 모습이 아니꼽게 보일 것이다. 눈을 흘기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매섭다 못해 무서워진다.

디아루기아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쪽이 무한한 사랑을 주겠다는 기세로 애정표현을 시작하니 너무 이러지는 말라는 듯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망해봐라, 여편네야.’

치졸하고 소심한 복수였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아. 우리 막내아들도 오늘 잘 봤어.”

“네 넵.”

“디아루리아랑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아… 네… 넵. 아버지.”

“응!”

사실 그다지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첫 만남의 몸통박치기를 잊지 못한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여전히 똘똘이를 어려워하고 있었고 똘똘이는 여전히 자신의 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건 보통 시간이 해결해 줘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나름대로 커다란 과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업 참관이 마무리된 상황, 둥지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식사를 하고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어느덧 라이오스로 출발해야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똘똘이는 울며불며 이쪽의 바지를 붙잡았고 잘 표현은 하지 않지만 관리인 막사원도 섭섭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엄마 말 듣고 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막사원도 박물관 관리 잘하고, 일이 생겨서 오픈은 조금 더 늦춰야 될 것 같다만….”

“넵. 알겠습니다.”

“그래. 똘똘… 아니 디아루리아. 이번에는 정말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으응.”

“자. 안아줄 테니까. 이리와.”

냉큼 뛰어 들어오는 모습은 꽤나 귀엽다. 심지어 오랜만에 드래곤 폼으로 달려 들어와 멈칫했을 정도.

키에에에에에에에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잔뜩 타액이 묻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딸과 아버지의 눈물 나는 이별식에 막스도 괜스레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슬쩍 손짓하자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얘도 조금 달라지기는 했어.’

묘하게 어리광이 늘었다. 원래 우리 똘똘이는 인간 폼일 경우에도 대놓고 달라붙어 헥헥거리고 키엑 키엑 거리기는 했지만 막스 같은 경우에는 눈치를 심하게 보는 것 같은 포지션을 취할 때가 많았다.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이쪽과 연을 맺다 보니 생긴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마력 홀로그램의 탄생을 가속화시킨 1등 공신인 만큼 내 쪽에서는 최고의 케어를 해주고는 있었지만 막스가 이쪽을 편하게 대하는 가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최근에 들어서야 이런 행동을 조금씩 하니 녀석 역시 달라지기는 달라졌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괜스레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로 작은 미소가 피어나오는 걸 보니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귀엽네….’

괜스레 바뀐 변화나 환경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달라진 것은 배경과 막사원뿐 만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파란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일단은 이창렬, 유아영, 한소라, 파란의 2파티로 데려온 병아리들은 더 이상 병아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버렸다.

특히나 이창렬은 나도 깜짝 놀랄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는데 스텟과 능력치보다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야비하고 치사한 전투센스가 눈에 띄었다.

유아영은 대장장이로서 디아루기아의 비늘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고 탱커로서는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버티는 종류의 전위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소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것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마물의 단계를 뛰어넘어 악마와의 직접 계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흑마법사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게 나와 그녀와의 비밀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안기모는 여전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박덕구의 그녀가 된 황정연과 함께 2파티를 1파티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파란의 메인파티는 현 교국, 아니, 대륙 최고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명실상부 순정 탱커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박덕구, 녀석 같은 경우에는 너무 변함이 없어서 탈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지만 실력 역시 제자리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몰래카메라를 당하기 싫은 건지 미친 듯이 훈련에 열중해 나쁘지 않은 위치까지 올라갔고 실제로 김현성의 영원한 부관 조혜진과 대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원래 천재로 분류할 수 있는 꼬맹이 김예리는 무서울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고 이제는 더 이상 꼬맹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외관으로 자라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유독 한 곳 만큼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선희영 역시 정상급의 사제로 성장한 것은 마찬가지. 그녀는 내가 이전에 받았던 명예주교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 자리에 걸맞은 신성력을 보유하게 됐다.

굳이 정리를 해보자면 파란은 강해지고 또 강해졌다. 단순히 무력뿐 만이 아니라 정치적 위치도 감당할 수 없을 까지 올라갔다.

사실상 탄탄대로의 성공길을 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물론 그렇게 성장하는 와중에도 왠지 모르게 이쪽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불안요소는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한 가지는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

그리고….

녀석보다 더 불안함을 증폭시키고 있는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유독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하얀이었다.

‘너무 조용해. X발…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토록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능력 아닌 능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분위기는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 괜스레 똥줄이 타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