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회귀자 사용설명서 297화
시간이 흘렀다(3)
사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도 커다란 문제는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여전히 길드 마스터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교국 8좌로서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병아리들을 데리고 영웅 등급의 던전을 다녀오기도 했고 당연하지만 개인의 성장 역시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샤를롯트에게는 조금 미움받기는 했지만 그녀와 주기적으로 만나며 관계를 재구축한 듯 보였고 조혜진이나 철컹 철컹 김예리와 대놓고 러브 코미디를 찍는 한편,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와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놈이었으니 여자들이 꼬이는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 생각해 봐도 무난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거다.
교국의 내부 정리로 모두가 바쁘기는 했지만 비교적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녀석이 그 여유로움을 불편해한다는 데 있었다.
‘쯧….’
이러고 지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던 것은 당연했다. 아마 몇 달 전의 일이 결정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별건 아니다. 정리해 보자면 길드원들에게 일어난 작은 이벤트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재미있다고 분류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약 두 달 정도를 무게 잡고 있었던 우리 회귀자가 길드원들을 소집한 이후 야심 차게 원정길에 올랐던 것.
당시 배경이 한 참 내부 정리에 바빴던 시기였기 때문에 원정 자체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연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녀석이 모든 길드원을 전부 소집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만큼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재앙 중 하나를 대비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김현성의 얼굴에 감돌았었고 나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현성은 사망자를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일이 꼬일 수도 있었으니까.
다른 길드원들 같은 경우에는 모두 의아해하면서도 원정길에 오르기는 했지만….
막상 뚜껑을 까보니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에 보였던 건 일반등급의 지하던전 뿐이었고 원정대는 김현성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재앙이나 김현성을 위기로 몰아붙일 흑막 대신 자리한 것은 아기자기하고 작은 몬스터들, 심지어 비선공몬스터였기 때문에 후반부터는 아예 돗자리를 깔고 캠핑을 즐기기 시작했다.
‘저… 요즘 너무들 바쁘신 것 같아서… 이런 자리를 준비해 봤습니다. 그… 단합대회입니다. 단합대회… 네. 그렇습니다. 푹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녀석의 떨리는 얼굴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자신의 기억이 틀린 것은 아닌지 꼼꼼히 던전을 뒤지기는 했지만 무언가 발견될 리 없었던 것은 당연. 미래가 바뀌었다는 걸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녀석은 안심한 것 같기도 했지만 반대로 눈에 띄게 초조해진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본인이 뭔가 초조해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가슴 아팠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기는 했다. 지금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까.
‘미래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1회차대로였다면 지금쯤은 나와 박덕구가 지내고 있었던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덕구 녀석이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타이밍이다.
폐허 속에서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발견한 시기. 어느 정도의 시간 오차가 있기야 있겠지만 대충 시간상으로 계산해 봤을 때는 그게 맞다.
검은색 세계의 나는 지금쯤 카스가노 유노의 방에서 요양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세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무려 도시 하나가 지워진 사건. 1회 차에서 이 사건이 회자되지 않을 리가 없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내가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바라봤던 도시는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개박살이 나있었으니까.
이번 회차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더러운 살인마 정진호도 성장하기 전에 죽여 살인여단의 탄생을 막아냈고 악마숭배자 이토소우타 역시 명예주교의 활약으로 린델을 휘어잡거나 악마를 소환하지 못하게 됐다.
카스가노 유노의 요조라 길드도 나와 만남으로써 움직임이 커졌다. 언론이 탄생해 일부 권력자들이 눈치를 보게 됐고 교국에는 신성한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벌써 여러 가지. 나비효과라는 게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거다.
이토 소우타나 정진호의 끄나풀이나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 역시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애초에 머더러 클랜 자체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자유도시 실리아나 린델이 치안에 신경 쓴 덕분이기도 하니 녀석이 알고 있는 미래의 재앙들이 사라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응당 기뻐해야 될 일이 맞겠지만 녀석으로서는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대륙을 관통하는 커다란 그림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미래를 알고 있다는 메리트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김현성은 그 불안감을 더 강해져야 한다는 집착이나 훈련에 쏟아부었다. 혼자서 대륙을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졌고 누군가의 꼬리를 밟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분명히 여유로울 수 있는 상황이지만 본인을 더 채찍질함으로써 불안감을 날려 버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 새끼가 초조해하니까….’
괜스레 나도 초조해진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이게 전부였다. 딱 그게 전부다. 그렇지만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어? 형님!”
넋을 놓고 길을 걷고 있던 도중 들려온 목소리.
“아. 덕구야.”
고개를 돌리니 그다지 변한 게 없는 박덕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덩치가 조금 커진 것만 빼고는 여전히 그대로다.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들어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가관. 누가 봐도 이쪽의 호위를 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쉽게도 나는 위협에 놓여 있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니까. 거, 전서구 하나 넣어줬으면 둥지 쪽으로 마중 나갔을 거요.”
“위험은 무슨… 타국도 아니고 린델 안인데 뭐… 혹시 하얀이는 같이 안 왔어?”
“누님은 오늘도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함께 마중 가자고 했었는데 마무리해야 될 일이 있다고 거절하더라니까.”
‘이런 게 불안해.’
단언컨대 평소의 정하얀이라면 절대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묘하게 조용한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행동에도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누님이랑 조금 떨어진 시간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둘이 싸운 건 아니요?”
“싸우기는 무슨.”
“혹시 뭐 고민 같은 거 있으면 이 연애박사 박덕구에게 상담 한 번 받아보는 걸….”
“그런 거 아니야.”
“거, 아무리 형님이라고 해도 고민 한 두 개쯤은 있을 거 아니요. 언제든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도 형님이라면 환영이요.”
‘차라리 싸운 거였으면 좋겠다. 이 새끼야….’
그 말이 맞다. 정말로 사랑싸움 같은 걸 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거다.
사실 평소와 행동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아직까지 정하얀이 이쪽의 스토킹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아네모네의 눈으로 간혹 이쪽을 바라보기도 했고 얼굴을 마주치면 예전과 변함이 없이 미친 듯이 달라붙어 온다.
자신이 먼저 데이트를 나가자고 주장할 때도 많았고 심지어 어떻게든 스킨십을 하겠다는 움직임 역시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이 전처럼 24시간 붙어 있지 않았다는 것. 하루에 평균적으로 함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면 불과 5시간도 되지 않는다.
하루 온종일 이쪽과 붙어 있으려고 하던 예전과 비교한다면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철이 든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올려보기는 했지만 확률은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냐. 어쩌면 정말로… 철이 든 거 일 수도 있지만….’
사실 뭔가 스스로를 억제하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커다란 예로 희라 누나나 카스가노 유노를 만나러 갈 때도 경기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심지어 저녁을 먹으러 나가거나 바쁜 일 때문에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지 않아도 이쪽을 찾아오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손을 흔들고 빨리 돌아오라고 말하는 건 여전했지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야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정하얀 본인이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있는 느낌.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정하얀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손톱을 하도 깨물어 오른쪽 손톱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퀭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많았다.
심지어 혼자 중얼거리거나 큰 소리로 바보 멍청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목격했으니 살이 떨리는 게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당장은 조용히 잘 지내주고 있었지만 상태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이런 상황이 몇 개월 동안 지속되다 보니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거 밀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하얀이 밀당을 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게 작전이 맞다면 반쯤은 성공한 것이 맞다. 실제로 이쪽이 정하얀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뭐 하고 있는데?”
“뭐 평소랑 똑같은 거 같던데… 거, 하얀이 누님도 라이오스로 함께 가는 거 아니요?”
“응.”
“그 준비를 한다고 하고 있는 다고… 들었던 것 같았는데….”
‘진짜 철 들었나.’
짐을 먼저 싸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정하얀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만약에 박덕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철이 들었을 가능성을 떠올려 봐도 될 것 같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린델의 길드 하우스에 도착.
길드 직원들이 나를 반겼고 병아리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과도 하나씩 인사를 주고받는다.
“희영 씨.”
“아. 오셨군요. 기영 씨. 지금 바로 떠나셔야 되는 건가요? 교황청의 일로 상의드릴 일이 있는데….”
“네. 짐 챙기고 곧바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길지 않은 이야기라면….”
“아니요. 그렇다면 다음에 시간을 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선희영과 인사를 마친 이후, 함께 가기로 한 한소라를 챙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하얀만 보면 터져 나왔던 요실금 증상도 어느 정도 고쳐지기도 했고 실제로도 유능하니 부관으로 데려가기에는 적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짐을 챙겨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면이 있다. 함께 가기로 한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를 이번에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쪽 역시 짐을 챙기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얘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지… 정말로 준비하고 있는 건가.’
물론 그 순간에도 궁금한 것은 정하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다.
길드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것은 처음.
저도 모르게 행복회로를 돌리려는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옆 방의 문이 튕겨져 나온 것.
“해… 해냈어. 해, 해냈다구… 됐어! 히히히힛! 이제 됐어!!”
정말로 기분 좋은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하다.
은근슬쩍 방문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방 안에 있던 정하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나는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목구멍으로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오는 상황.
‘마력… 마력 능력치… 구십 구.’
순간적으로 뒤를 훽 돌아보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