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
회귀자 사용설명서 301화
중립국 라이오스(2)
마차 안에서 내리자 아름다운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지역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국민들과는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굳이 지구에 있는 인종과 비교하자면 남미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건강하고 탄력 있는 피부와 윤기 있는 흑발의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의 복장 양식이었는데 전형적인 중세시대를 연상케 하는 교국과는 다르게 다들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야 더우니까.’
남쪽으로 많이 내려와서 그런지 날씨가 상당히 덥다.
당장 나 역시도 이 갑갑한 옷을 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
온도 조절 마법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마차 안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오자 힘들기는 하다.
‘아… 멍청하게.’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라이오스의 인사들의 복장.
‘별일 없겠지.’
다들 지나치게 프리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이 장소에서는 이게 일반적인 복장이겠지만 솔직히 어디로 눈을 둬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할 정도로 시선처리가 어렵다.
무희들이 입는 옷들처럼 남녀 가릴 것 없이 자신들의 탄탄한 몸을 과시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정하얀이 신경 쓰인다.
마차 안에서 마법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던 정하얀은 역시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조심하면 돼.’
멍청하게 열심히 눈을 굴리지만 않는다면 별 다른 사고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안 그래도 오기 전에 한 바탕 꾸중을 들었으니 정하연도 모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저쪽에서 인사를 건네 왔으니 이쪽에서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맞다.
이국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차희라는 인사를 끝냈기 때문에 나 역시 한 발 다가갔다.
‘15살, 16살?’
눈에 보이는 것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맹이.
다른 이들처럼 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윤기 있는 흑발을 땋은 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독특한 양식의 장식이 눈에 띄었다.
제법 당당한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마에 있는 붉은 다이아몬드의 문양을 툭툭 건드리는 것은 라이오스의 오랜 관습.
어색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저런 방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마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최대한 라이오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걸 내비쳐야 했으니 당연한 행동이다.
눈앞에 있는 이가 보통 꼬맹이였다면 아마 고개만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 했겠지만….
‘라이오스의 27대 국왕 프리스티나.’
밖을 하도 싸돌아다닌 탓에 탄 것처럼 보이는 꼬맹이의 정체가 국왕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평범한 꼬마 대하듯 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중립국 라이오스의 프리스티나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프리스티나 님. 만나서 뵙게 돼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직접 나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나친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저야말로 교국의 중요 인사이신 명예추기경님을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중요한 손님이니까요 우선 안으로 모시는 게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쉽지 않겠는데.’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대화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얻기 힘들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가드가 단단하네.’
저쪽에서도 우리가 어째서 이런 먼 곳 방문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라이오스와의 동맹.
묘하게 중립국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하는 것과 이쪽을 편하게 대할 수는 없다는 태도에서 절대로 이쪽의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얘네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본래 중립이라는 것도 자신들의 나라를 지킬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신성민주교국과 공화국의 남부지역에 끼어 있는 이 작은 나라는 두 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유약하다.
네임드 강자의 숫자나 병력의 질, 심지어는 이방인들 역시 수준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스가 중립국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교국과 공화국 사이에 끼어 있는 상황 때문.
과거부터 매일 같이 치고 박고 있었던 두 국가 사이에 줄타기를 하다 보니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라이오스는 두 국가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다.
바다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라이오스를 통해 곧바로 상대 국가로 넘어 갈 수 있다는 것도 그랬다.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라이오스가 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본인들이 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제국의 입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제국과 공화국은 라이오스라는 나라를 쪼개버리는 방법도 고려한 적도 있었으니 라이오스는 두 나라 사이에서 원치 않은 고통을 받아왔던 셈이다.
약간의 변화가 생긴 것은 2차 대륙 전쟁 이후, 제국과 공화국이 전쟁으로 인해 서로 공멸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 치달았고 어쩔 수 없는 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라이오스는 공화국이나 제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완전중립을 선언했고 제국과 공화국은 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했다.
당시의 공화국과 제국이 어째서 라이오스의 중립선언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가 맞물려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라이오스가 상대 진영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걱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시의 지도자들끼리 휴전 협정과 함께 다른 뒷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라이오스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현명했다는 것.
정치적 수완 역시 보통이 아니고 줄 타는 실력 역시 보통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대단한 거야.’
열강들 사이에서 등 터져 가면서 자주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교국이나 공화국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힘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이방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라이오스를 살아가는 국민들은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리라.
슬쩍 뒤를 돌아보니 정하얀은 박덕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고 한소라는 나름대로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은 안심해도 되겠네.’
심기가 불편한 듯 사방을 경계하고 있기는 했지만 당장 터질 것 같은 표정은 아니다.
내일이나 내일 모래 즈음부터 함께 놀러가자는 이야기를 넌지시 꺼낸다면 당장 기분이 풀려 싱글벙글 웃고 다니리라.
그런 그녀와는 별개로 이번 사절대의 주요 인원인 나와 차희라는 프리스티나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중.
굳이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길을 걷고 있는 게 특이하기는 했지만 이 꼬맹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곳이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다.
생활수준 자체는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들이 행복해하는 걸 알 수 있다.
대륙도 지구처럼 국민행복지수를 조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평가를 내린다면 이 나라는 틀림없이 상위권에 랭크될 것이다.
프리스티나를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는 백성들과 그들의 인사에 하나하나 화답해 주고 있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도시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치고 그들에게 동화된 관광객들의 모습은 어색하지 않다.
다완 쪽에서 휴양 온 이들, 교국의 복장 양식과는 조금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공화국민일 터.
묘한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륙법상 분쟁지역으로 분류되지 않은 이곳에서의 마찰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곳이 다 있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은 그림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머리에 잔뜩 뭔가를 올린 꼬맹이가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두 분께서 이곳을 찾아주신 것은 처음이라 알고 있습니다.”
“네.”
“네. 맞습니다.”
“두 분이 저희 라이오스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군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뻔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올지 역시 예상이 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정론이라 딱히 반박하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
차희라는 슬그머니 내 쪽으로 대답을 패스했고 나는 털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모두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교국민들의 이상을 위해 함께 싸워주신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그런 말을 해주시니 괜스레 기분이 좋군요.”
살짝 웃으며 다시 한번 말을 걸어온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 나라 역시 몇몇 문제를 떠안고 있습니다만 저는 선대 국왕들께서 이룩하신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물론, 지키고 싶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두 열강들 사이에서 매번 고통 받던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 정말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1차 대륙 전쟁과 2차 대륙 전쟁. 그 외에도 수많은 소규모 전쟁들과 대기근, 외부세력의 침략으로 저희 라이오스의 이상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물론 저희 라이오스를 중요하게 생각해 주시는 교국과 공화국의 인사들에게는 감사하다만… 솔직히 심정을 이야기하자면 과한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이곳을 찾으신 이유도 그건 때문이시겠지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시기 전에 완곡한 거절의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이전처럼 저희 라이오스는 어느 쪽에 설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공화국 쪽에도 똑같은 말을 전했으니 교국과 공화국의 지도자 분들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를 테면 다시 한번 개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공화국이나 교국 중, 어느 곳 한 쪽으로 무게 추가 흔들린다면 지금까지 이루어놨던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공감할 수 있지. 있고말고.’
마치 정하얀과 차희라라는 두 열강을 사이에 둔 이기영을 보는 듯한 느낌.
이쪽이나 저쪽이나 곧 죽어도 중립국을 외쳐야 되는 상황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나는 소설, <광장>의 주인공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중립국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리해 보자면 이쪽은 중립을 유지해야 되지만 라이오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쓰레기 같은데.’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정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그 문제 때문에 방문한 것은 아닙니다, 프리스티나 님.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차차 말씀을 드리겠지만 너무 성급하게….”
“그렇군요. 명예추기경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조금 성급했지요. 하지만… 조금 더 저희의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을 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라이오스는 항상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곳을 찾아주신 여러분 사절단을 환영해 드리는 것도 저희가 할 일 중에 하나이고요.”
“감사합니다.”
“멀리서 온 친구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이곳의 오랜 관습이며 자랑입니다.”
“아아….”
“피곤하실 테니 들어가는 즉시 방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라이오스가 처음이라고 하셨지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연인들이 즐길 것이 많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차희라 님과 이기영 님이 이방인들의 대륙에서부터 좋은 인연을 만들었다 들었는데… 천천히 둘러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한 것은 차희라였다.
그녀는 당장 기분이 좋은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워지는 상황.
나와 마찬가지로 녀석 역시 이쪽의 중립을 박살 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의 각도기는 상당히 날카로웠다.
“이렇게 보니 두 분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점점 뒤쪽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얘 지금 일부로 이러는 거 아니지?’
날아 들어온 연타에 조금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속삭이면 평생을 함께한다는 바위가 있는데 라이오스를 찾으시는 많은 분들이 함께 찾으시곤 합니다. 내일이라도 시간이 나시면 두 분이서….”
‘그만해.’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장에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볼을 있는 가득 부풀리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