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
회귀자 사용설명서 308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2)
‘어떡하지?’
다리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려온다.
‘도, 도망칠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눈앞에 있는 덕구 선배는 아직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전에 한 번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자신은 저게 무엇을 뜻하고 있는 건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뭔가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계속해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기가 무섭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생각에 매몰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의 이기영 부 길드 마스터는 정말로 바쁜 상황인 게 맞았기 때문. 안 그래도 중립국의 문제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공화국이라는 변수가 끼어들었으니 여러 가지 루트를 생각해 놔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오죽했으면 간단한 일 몇 가지를 이쪽에 일을 맡길 정도였으니 현재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정하얀에게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부 길드 마스터를 마중 나가는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 님의 반응을 보면 바람 핀 것이 아니냐고 꾸지람이라도 들은 모양.
‘완전히 내로남불이잖아.’
부 길드 마스터 본인의 여자관계가 그리 깔끔하지 않다는 건 린델은 물론 교국도 알고, 하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 단순히 낯짝이 두껍다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대사다.
‘전부 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본래 예정되어 있던 데이트들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물론, 최근 함께하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자 모든 원인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화국의 오호 대장군 중 하나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물론 단순한 예상이고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눈치를 보며 커다란 일이 터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의 입장상 정하얀 님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문제. 놀랍게도 먼저 자리를 피한 것은 덕구 선배였다.
“아. 이거 훈, 훈련 시간이구만. 누님 먼저 나가 봐야 겠… 큼.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으면… 크흠.”
‘치, 치사한 사람.’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믿었는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발이 잘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린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입술을 꽉 깨물며 최대한 시선을 옮긴다.
“어, 어떻게 하지?”
“네… 네… 네?”
“어떻게 하면 되지… 오빠가 계속 미워하면 어떡하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이 되지 않는 상황.
“그러니까….”
분명히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뭐가 됐든 정답은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잘 움직이지 않은 다리를 두드리며 몸을 움직이는 순간 갑작스레 이쪽의 손을 꽉 쥐는 감각이 느껴졌다.
“꺄, 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에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장내는 조용하다.
“소, 소라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해야 돼요?”
‘나한테 물어 보지 마.’
“히끅… 오빠한테 미움받기 싫은데… 틀림없이 아, 아무 곳에서나 막, 몸 함부로 굴, 굴리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히끅.”
‘그건 네가 아니라 걔야… 걔가 그러고 있는 거라구!’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애써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저 단어를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일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최대한 용기를 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닭똥 같은 눈물을 닦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자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뭔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남자를 잘못 만난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입맛이 쓰다.
‘위로해 주는 게 맞겠지.’
일단은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이다.
“덕구 오빠 말대로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시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냥… 하신 말씀이신 것 같고… 실제로도 많이 바… 쁘시니까요.”
“분, 분명히 오빠 눈빛이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았단 말이에요… 히끅. 막 싫어하는 것 같았단 말야….”
“착각하신 게 분명해요. 네. 저, 저랑 계실 때도 얼마나 정하얀 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요. 착하고 좋고 사… 랑하는 사람이라고 매번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정말? 아… 오, 오빠랑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
“물… 론! 단둘은 아니었어요! 네! 단둘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덕구 선배도 함께 있었어요! 네! 단둘이 있었을 리가 없죠. 네. 하하하… 그, 그렇게 있지는 않았어요.”
“아아아… 그렇구나.”
“그리고 그냥 한 번 해본 말이든 아니든 간에 그,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요?”
“뭐, 뭐가? 뭐가 좋은 건데요?”
짧은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에 몸이 다 떨려온다.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위험했어.’
특히나 이기영 부 길드 마스터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는 뭔가 오해를 만들 만한 여지가 있었다.
“정확히 부 길드 마스터가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런 사람이랑… 히끅!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어요.”
“네. 그게 좋은 거예요!”
“그게 뭐가 좋다는 건데….”
‘째려보지 마… 제발. 제발….’
“질… 투하고 계시고 있다는 거잖아요.”
“질투?”
“네. 이기영 부 길드 마스터는 정하얀 님께서 다른 남자들이랑 말하는 걸 보기 싫으신 거예요. 틀림없이요. 만약에 하얀 님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남자랑 뭘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겠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소유욕을 가지고 계시고 있다는 거예요. 오히려 좋은 거죠.”
“그, 그, 그런 거예요?! 소유욕?”
“네. 물론이죠.”
“오빠가 질투를 했어요?”
“저야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오빠가 질투했데….”
“네. 맞아요.”
“오빠가 질투를 했어!”
“네!”
“나를 소유하고 싶대!”
“네! 바로 그거예요!”
잘 말해준 건가. 라고 고민해 봤지만 딱히 정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일단 당장은 울음을 그치고 있는 상태.
너무 기분이 들뜬 것 같아 불안한 점은 있었지만 신난 듯한 정하얀의 얼굴을 보자 점점 더 숨쉬기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잘 말해준 게 맞을까.’
하지만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문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체불명의 불안감이 가슴 속 한구석에서 싹트고 있었다.
‘만약에….’
부 길드 마스터가 질투한다는 걸 깨닫고 다시금 같은 일을 시도하려다 정말로 미움받아버렸을 경우. 이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나고 다시 한번 끄윽 히끅 거리는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이번에는 화살표가 자신 쪽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소, 소, 소라 씨 때문이야. 소라 씨 때문이에요! 히끅… 나 진짜 이러기 싫었는데… 전부 다 네 탓이야!’
라고 말하며 단검을 찔러오는 정하얀의 모습을 떠올리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뭘 말하든 그 앞은 지옥이지만 최소한 자신에게 화살표가 돌아오는 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저번에는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아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그나마 최근에 조금씩 행복을 찾아가고 있던 참이다.
“그, 그리고!”
“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네. 나쁜 의도요. 부 길드 마스터는 사람을 잘 보는 편이니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눈치챈 거겠죠. 정하얀 님께서 다른 남자분들이랑 이야기하시는 건 크게 신경 쓰시지 않잖아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진 거고요.”
“아… 그, 그렇구나.”
“네. 물론 제 말이 전부 정답이라는 건 아니지만 아마 확률상으로는 그랬을 확률이 높다고 봐요. 정하얀 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지? 그, 그 나쁜 사람 때문이지?”
“네.”
“어떻게 하지?”
“네?”
“나는 오빠밖에 없다는 걸 증명해야 되는데. 그, 그런 나쁜 사람한테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해요.”
“굳이 증명할 필요는….”
“내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오빠가 알아야 돼… 응. 맞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조금 더 알아야 돼요. 질투도 좋고, 소, 소유욕도 좋지만… 나는 오빠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건 싫어. 그야 그럴게… 으응. 나는 오빠밖에 없는 걸. 우리 순수를 증명해야 돼. 나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으응… 우리 탓이 아니야.”
점점 더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 정… 하얀 님 탓이 아니에요.”
“그 사람 탓이지?”
“굳이 잘못한 사람을 찾자면…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오빠밖에 없는데 괜히 나한테 말을 걸어서 오빠가 괜한 의심을 하게 했잖아. 나를 이상한 여자로 보게 했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 잘못이 맞지.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우리 데이트를 방해한 것도 그 사람이고… 그때 그래도 처음에는 분위기도 좋았었는데… 같이 식사도 하고 정식으로 하,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구! 그래… 근데 방해받은 거잖아.”
“아… 그게….”
“방해받은 거야. 방해받았다고… 방해한 걸로도 모자라서 엉뚱한 걸로 시간을 뺏었어. 생각해 봐. 그때 사실은 위험했어. 소중한 오빠가 걔네들한테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 사람들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지. 위험한 사람들이고.”
‘틀, 틀렸어.’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은 공포스럽다.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상황. 고양이 앞의 쥐도 이것보다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맞아. 그 사람뿐만이 아니야. 그 여자도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덩치 큰 사람도 오빠한테 주먹을 휘둘렀잖아. 생각해 봐. 오빠를 바쁘게 하는 것도 그 사람들이잖아. 만약에 그 사람들만 없었으면 매일 매일 같이 놀러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왜 라이오스로 와서 사람을 불, 불편하게 만드는 거야? 공화국에나 처… 처박혀 있어야지! 멍, 멍청이들이! 바보들이! 아직 못 가본 곳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덕구 오빠도 이번 여행이 기회라고 했었는데! 그 기회를 전부 망쳐버렸어. 전부! 전부 망쳐 버렸다구!”
“제… 제발….”
“없애 버려야겠어. 죽여야 돼.”
“살려주세요….”
“죽여야 돼… 깡그리 청소하는 거야. 조금 더 강해졌어야 했는데… 그 사람들도 강하니까….”
“제발요. 제발 살려주세요.”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은 물론 점점 하의가 축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
꽉 감은 눈 사이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입으로는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전에 느꼈던 악몽이 새록새록 머리를 좀먹기 시작한다.
살려달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와중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정하얀 님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장내.
‘나갔나.’
라고 생각할 때 즈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라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당연하지만,
들려온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