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회귀자 사용설명서 309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3)
상황이 꼬였다는 건 확실히 기분 나쁠 만한 일이었다.
애초에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건 올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더 일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성과를 바라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다.
내 제안이나 질문을 살살 피하는 프리스티나를 보면 어쩌면 이 동맹제안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기상조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상대 쪽에서도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만큼 대놓고 움직이기보다는 사전작업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기대했던 한소라도 열심히 움직여주고 있었고 이쪽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라이오스의 인사들과 보내고 있으니 지금은 기초토대를 쌓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으리라.
‘공화국 새끼들… 짜증 나네….’
본래 초조해하지 않아도 될 작업이 초조해진 이유는 뻔할 뻔 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불안요소는 다름 아닌 공화국의 존재다.
교국 8좌 중 세 명이 움직였고 공화국 역시 중요인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라이오스를 방문했다.
이들이 단순히 관광을 즐기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한다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만한 인원들이 여행을 위해 뭉쳤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고 아마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스와의 동맹.’
어떻게 보면 매년 치러지는 인사치레 같은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스케일이 커진 것 같은 느낌.
그만큼 대륙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였기 때문에 이번 일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만약에 라이오스와 공화국이 동맹을 맺는다면 날카롭게 망명각을 잴 수밖에 없는 상황. 교국에서 이뤄놓은 게 많은 만큼 여기 있는 것들을 버리고 떠나가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그렇고말고….’
당장 교국의 지도자가 나에게 커피를 타서 가져다 바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만큼 이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꿀단지는 놓치기 싫다.
이래저래 중요한 사안들이 뭉쳐 있는 만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안. 덕분에 최근 하루하루가 굉장히 단조로워 지고 있었다.
하루의 시작은 프리스티나를 비롯한 중립국 라이오스의 인사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별건 아니지만 라이오스에서 지내고 있는 이방인들과도 만남을 가졌고 교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메이드 바이 이기영의 포션 판매의 공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만족할 정도로 조건이 좋은 계약을 제안하는 한편 만약 라이오스가 교국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나눌 수 있는 이득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어떻게 보면 로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퍼주기, 물론 이 조건이 좋은 계약은 아직까지 실행되지는 않았다. 내가 거부하고 있다기보다는 중립국에서 이런 계약들을 탐탁지 않아 하는 상황, 받는 게 있다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드가 두터워.’
손님들을 환영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봐도 공화국과 교국은 라이오스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득보다는 중립국이라는 본인들의 입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소귀의 경 읽기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교국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밑밥을 많이 깔아 놓는 게 최선.
아마 공화국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반대 진영의 인사들이 라이오스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극단적인 외교전략을 실행시킬 수가 없다.
두 세력이 어떤 제안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서로가 확인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지만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본래는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면서 라이오스와의 대화에 집중했어야 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사안이 얽혀 있기 때문에 정하얀이나 차희라와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모조리 스킵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혜에게는 고인물과의 대국 내용을 곧바로 전송한 것은 물론 막스와 함께 패턴이나 습관을 분석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
내 뇌로 녀석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조금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 제 수준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요? 오빠도 느끼셨지만 처음은 적당히 하고 있었던 느낌이라… 데이터로 사용할 수도 없을 것 같고… 물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만요. 일단은 계속해서 시뮬 해볼게요.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이쪽이 보낸 영상을 본 이후의 반응. 그래도 이런 쪽에 밝은 이지혜가 이런 말을 해올 정도였으니 불안함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게 당연했다. 이건 라이오스 영입 전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잠재적으로 이쪽의 적이 될 이들에 대한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본래 오호대장군인지 뭐시긴가 하는 놈들이 강하다는 건 이미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실제로 내가 본 이들의 모습은 기존의 들었던 정보 이상.
러시아산 박덕구는 코리안 박덕구와 차희라를 합쳐 놓은 것만 같았고 샤오린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청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두뇌파라고 하기에는 높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마검사라고 봐도 될 정도로 신체능력이 좋다.
어차피 녀석이야 전쟁이 터지면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 서게 되겠지만 이들이 8좌의 하위 스쿼드보다 강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만약 남은 두 명의 수준이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더 강해요.”
“네?”
“저보다 더 강하다고 말했잖아요? 외부에 알려진 이야기는 아닌데 어차피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공화국 5인 중에서는 제가 서열이 최하위예요. 아니, 어떻게 보면 발렌틴 그 사람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려나. 싸워 본 적도 없고 본래 이런 스펙만으로 강함의 크기를 판단할 수는 없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대충 어림짐작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으음….”
“우리 군사님은 제외하고 말하는 거예요. 서열상으로는 그분이 2번째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마법사인 만큼 어떻게 측정하기가 애매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쪽 넘버원은 정말로 강하다니까. 아마 보면 깜짝 놀랄걸. 그런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샤오린 님.”
“잘 모르기는… 정보를 빼내고 싶은 건 이해하는데… 너무 그런 쪽으로만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
“착각일 겁니다. 뭐, 샤오린 님도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셔도 됩니다. 정보를 빼낸다기보다는 교환에 의미가 있으니까요.”
“네가 원한 정보 교환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남녀가 둘이 만나는 데 이런 딱딱한 이야기라니 싫은 게 당연하잖아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 곁들이면서 식사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그쪽은 나한테 빚진 것도 많은데 조금 정도는 여기 기분도 생각해 주는 게 좋을 텐데….”
“물론 이전에 도움 주셨던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만… 현재 저희 상황도 있고… 또 이렇게 둘이 만나기 시작한 것도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큼… 이번에는 샤오린 님의 차례입니다.”
“그럼 질문, 나 어떻게 생각해요?”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런 식으로 샤오린과 시간을 보낸다는 건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다.
정보도 정보였고 그녀의 말대로 이쪽은 갚아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당돌하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더 거침이 없다.
물론 앞에 있는 샤오린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나이가 22살. 이 정도 수준까지 올라오기까지 시간도 꽤 걸렸을 테니 10대 중반, 혹은 후반부터 이곳에 들어와 활동했으리라.
가지고 있는 재능도 남다르니 어린 나이에 온갖 기대를 받고 올라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서 있게 된 셈.
심지어 외모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어떻게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본 여성들과는 확실히 다른 타입. 비슷한 말이긴 했지만 섹시하다는 말보다는 야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풍겨오는 인상이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민중 수탈자’ 샤를리아 황녀같이 표독스러운 인상도 있기는 했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색기가 있다. 입고 있는 차이나 드레스의 깊게 파인 옆면도 그렇고 기다란 속눈썹과 손가락, 불그스름한 얼굴과 나를 바라보는 눈빛, 심지어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쪽을 유혹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져 온다.
정하얀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정하얀의 유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싸구려 정보를 듣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확 저지르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친 짓이야.’
장담하건대 그건 미친 짓이다.
저건 암사마귀고 파리지옥이다. 좋다고 달려들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말하자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거다. 지금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인으로 보이지만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장소가 애초에 블랙마켓, 아닌 것 같지만 성정 자체도 무척이나 잔인하다.
김현성 역시 그녀를 빌런 취급했었으니 1회 차에서 뭐 하고 다녔을지는 뻔할 뻔 자.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다음 날 아침 질식사한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관심이 가고요.”
“그건 다행이네요. 어떤 면이 그런가요?”
“글쎄요. 정확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샤오린 님은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건 질문이죠?”
“네. 질문입니다.”
“조금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
“…….”
“당신 정말로 야하게 생겼거든요. 매력적으로….”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보다는 대놓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느낌은 잘 받지 않는 편인데… 정말로 이상하다니까. 사실 내 타입과는 거리가 조금 먼 것도 사실인데… 자꾸만 나를 간질간질하게 만든단 말야…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있으려나요? 당신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고 당신 입술은 과즙이라도 발라져 있는 것처럼 보여요. 마법을 쓴 것도 아닐 텐데….”
“큼….”
“다른 사람들 눈에도 이렇게 비칠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 웃기지.”
아마 차희라나 정하얀의 눈에는 샤오린이 묘사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칭찬이라면 감사합니다.”
“당연히 칭찬이에요. 표현이 길고 천박하긴 했지만 이성적으로 끌린다는 이야기를 한 거니까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게 보인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오르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뭐야.’
“어….”
‘저거 뭔데?’
문제는 그녀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하고 하늘 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X발… 저게 뭔데.’
거대한 마력의 응집체가 도시의 외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