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회귀자 사용설명서 312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6)
‘정하얀 혼자 한 게 아니야.’
단순 추측일 뿐이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혼자만의 솜씨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리 용의주도해졌다고는 하지만 정하얀이라면 이 정도로까지 일을 용의주도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거다. 일단은 마력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도 탐지가 불가능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과도 마력의 파장이 달랐고 두세 번은 꼬아서 주문을 완성한 듯한 느낌. 마법적인 능력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누군가 외부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서둘러 시선을 돌린 것은 순식간. 지금 이 장소에 한소라가 없는 게 굉장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공화국 쪽에서도 흑 마법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면 이쪽 역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소라를 버림 패로 사용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 레벨 업에 탄력을 받고 있는 흑 마법사를 버림 패로 사용하기에는 아깝다.
‘말도 안 돼.’
오만가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말을 걸어온 것은 실리아의 카스가노 유노.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주인, 아니, 이기영 님. 혹시 무언가 찾고 계신 게 있으신지….”
“딱히 별건 아닙니다만… 혹시 저희 길드의 한소라 본 적 없습니까?”
“아… 아마 숙소에 있을 겁니다. 몸이 조금 안 좋다고 한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인지요? 아니면 뭔가 밝혀낸 게 있으신지요?”
“일단 뭐라고 말하기 애매하기는 하지만 단서는 잡은 것 같습니다. 카스가노 님은 이곳의 마무리를 부탁드립니다. 이건 제가 모아놓은 샘플입니다. 유사한 것들은 전부 챙겨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마력결정은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이후 단서나 새로운 연구에 쓰일지도 모릅니다.”
“아….”
“상위소재로 사용할 수 있는 촉매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요.”
물론 압축된 촉매는 이쪽이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뭔가 다른 반응이 있는지 지켜봐야 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외적인 일은 차희라 님이 맡아주실 겁니다. 만약에 공식발표가 있다면 다시 이쪽으로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지역 쪽에서 일어난 흔적 역시 조사해 주시고 필요하다 싶으신 건 전부 챙겨주시면 됩니다.”
“네. 편한 대로 하시옵소서.”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카스가노 님은 이 마력을 추적하는 게 가능합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만약에 추적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게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눈으로는….”
“송, 송구하오나 제가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다만 근시일 내에 라이오스를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사, 사실은….”
무척 뜸을 들이고 있었다. 괜스레 속이 타고 답답해진 것은 당연지사. 슬그머니 운을 띄우자 그대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의 그 마법이 떨어졌을 당시 이 도시가 폐허가 된 장면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물론 아주 잠깐일 뿐이었고… 시기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이건 또 뭐야….’
괜스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장 떨어진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이오스가 폐허가 된단다.
“이기영 님에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지 고민을 했습니다만….”
‘고민할 게 있는 건가. 무조건 말하는 게 맞잖아.’
조금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을 이어오는 그녀의 대사에 어째서 말하기를 주저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입 밖으로 내뱉은 미래가 어떤 결과로 만들어질지는 저 역시 알 수 없사옵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미래는 아주 작은 날개짓으로도 바뀔 가능성이 있는 터라… 혹여나 이기영 님께서 제가 본 미래와 연관이 있다면… 제가 말씀을 올린 것 때문에 본래의 미래가 만들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해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린 것 또한 제가 본 미래로 가게 될 과정 중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나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말씀을 드리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하나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만큼, 일단은 라이오스를 빠져나가는 일도 생각해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했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이해했다. 방금 카스가노 유노가 나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말미암아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 일반 촌부가 방금의 이야기를 들어도 미래가 뒤틀릴 가능성이 있다. 보나 마나 동네가 떠나가라 위험을 경고하고 다닐 테니까.
심지어 이쪽은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고 어쩌면 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카스가노 유노가 본 미래를 막으려고 하는 행동이 오히려 일을 가속시키는 촉진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복잡한데….’
확실히 이렇게 단편적인 장면만 본 경우에는 확실히 조심해야 될 점이 많다. 1회 차의 카스가노 역시 말실수 때문에 불행하다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일단은… 마음속에 새겨듣고 있겠습니다.”
“부디 조심히 움직여 주시옵소서.”
“아. 그보다… 혹시 라이오스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사옵니다. 방금 차희라 님께서 교국의 조사단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라이오스에서도 일단 받아들였습니다. 2차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저희들보다는 자국 내 민간인들을 더 신경 쓰고 있는 터라. 우리 사절단으로 온 전문도 비슷한 이야기인데 혹시나 원하신다면….”
“아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들이 해올 대사는 뻔하다. 갑작스러운 사고에는 유감.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대기 공화국에는 심심한 위로를 표현할 것이고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중립국에서도 작금의 상황은 문제가 많다. 정치적으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무조건 잡을 수 있다고 봐도 된다. 그만큼 민감한 사항인 만큼 곧바로 입장을 정리하지는 못할 거라는 거다.
사실 이쪽도 라이오스가 어떻게 나올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전자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생겼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라이오스 불바다설에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한다.
‘정하얀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당장 1차 사건을 터뜨린 것도 정하얀이었으니까. 지금부터 정하얀을 자극할 만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고 멘탈을 잡지 못한 정하얀의 폭주로 라이오스가 쑥대밭이 된다는 정하얀설.
가능성은 낮지만 이게 외부의 공격, 혹은 자연재해 따위의 현상이고 2차 임팩트가 시작되면서 폐허가 되는 설 역시 존재. 하지만 누가 봐도 첫 번째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카스가노 유노가 내게 잘 말해준 것이 맞다. 그녀의 발언은 지금이라도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었으니까.
‘조심하면 돼.’
최대한 자극하지 않게 조심하고 다시 한번 단단하게 멘탈을 잡아준다. 물론 그전에 한소라를 찾아야 하는 것 역시 필연적인 일.
‘뭐가 이리 복잡해.’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인 것 같았지만 최우선 과제는 흔적 지우기와 정하얀 케어 하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숙소가 곧바로 눈에 띈다. 평화로웠던 아까 전과는 반대로 붉은 용병의 단원들이 타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 역시 간단한 절차를 거쳤을 정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저런 종류의 검문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안쪽으로 진입한 이후에는 일단 무작정 한소라의 방문 앞으로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문을 열자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소라 씨.”
“아… 네. 부길드 마스터.”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죠?”
“잘은… 무슨 일이시죠?”
“시치미 떼지 말고.”
“혹시 밖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저도 뭔가 일이 터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오늘은 조금 몸이 안 좋아서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확실히 연기 실력이 수준급이다. 애초에 얘는 이런 쪽으로 발달되어 있으니 김예리와 안기모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닌지 고민을 해볼 정도였으니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으리라.
‘진짜 모르는 건가.’
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지만 눈에 언뜻언뜻 공포라는 감정이 들어선 것을 보면 꼭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정하얀을 무서워하는 거겠지.’
이번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정하얀에게 단단히 경고를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저건 이쪽을 엿 먹이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본인이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한소라 씨. 저 이렇게 말장난할 시간 없어요.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는데 빠르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해야 되니까. 하얀이를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제가 조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치해 드릴 테니까요.”
“정말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정, 정말로….”
“빨리 말해요. 시간 없으니까.”
“진짜로 모르는 일이에요. 왜, 왜 이러시는 건지.”
그렇지만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동공이 흔들리고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은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어딜 봐도 이러지 말라고, 제발 나한테는 묻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안 좋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당연. 하지만 이쪽 역시 저쪽의 사정을 봐줄 상황이 아니다.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요.”
‘뭘 이러지 말아 달라는 건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이해가 안 가요.”
“제가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소라 씨. 대충은 다 알고 있어요. 오늘 일어난 일에 연관이 있다는 거.”
“정말로….”
이미 시간이 많이 끌렸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간 것은 당연, 한소라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감돈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것을 보니 뭔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느낌. 팔을 부여잡자. 제발 이러지 말라는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간단한 마법을 외우자 곧바로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상의가 반으로 갈라진다. 당연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장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가슴 쪽을 뒤덮은 커다란 검은색 반점.
‘마력 탈진 현상.’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증거였다. 당연하지만 한소라의 입에서는 곧바로 변명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생각하시고 있는 그런 게 아니에요!”
깜짝 놀랐다는 듯이 중얼중얼거리며 외치고는 있지만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이번 일을 벌인 것은 한소라와 정하얀이 맞다.
“정말로 오해예요. 이건 그… 그러니까. 오해예요.”
“오해는 무슨….”
“정말로 아니에요. 이건 오해예요. 네! 오, 오해예요! 제발… 살, 살려주세요.”
“괜찮습니다.”
“살… 살려주세요.”
“제가 왜….”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 채로 중얼거리는 그녀가, 입을 여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슈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