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
회귀자 사용설명서 315화
정하얀 사용설명서(9)
“겨, 결, 결혼하자.”
순식간에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정말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마치, 우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으리라.
요동치는 마력도, 소리를 지르며 주문을 외우려고 했던 정하얀도 어느 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동공을 울리는 소음 역시 함께 멈춘 것은 당연지사. 너무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산발이 된 머리로 검붉고 불길한 빛을 뿜어내던 정하얀 역시 어느 순간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다. 안광은커녕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고 마력의 영향으로 인해 하늘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한 머리카락도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았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모습이 가관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첫 번째. 곰곰이 떠올려 보더니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을 하는 게 두 번째다.
물론 마지막은 자신이 들은 게 정말인지 답을 달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네?”
‘제기랄….’
“네?!”
‘슈바….’
“결, 결, 결… 겨겨르….”
자꾸만 중얼거리는 듯한 표정은 누가 봐도 아까보다 더 맛이 간 느낌.
이게 잘한 짓인지 판단하기 무척이나 힘들다.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 당근을 주는 게 버릇된다면 틈이 날 때마다 도시 멸망 시나리오를 찍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그것 말고는 정하얀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
만약 어중간한 대사를 던졌다가는 그대로 마법이 떨어졌을 것이다.
윽박질러 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더욱더 맛이 갈 가능성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당장 정하얀을 말리기 위해서 던진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 다시 한번만요.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세요.”
왠지 모르게 다시 말할 순 없었다. 정체 모를 불안감이 내 목구멍을 꽉 막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그냥 해본 소리라고 한다면 아까보다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칠 수도 있으리라.
결국에는 눈을 꽉 감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결… 혼하자, 하얀아.”
그래도 기억에 남을 프로포즈인 만큼 최대한 형식적인 자세를 취해야 되는 것은 당연했고, 이미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정하얀은 충분히 감동한 것 같지만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수습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주머니에 몇 가지 아이템을 넣어놨던 기억이 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입수한 반지를 꺼내 들었다.
“너를 보는 눈, 눈빛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아아아… 아아아….”
“서운했다면 미안해.”
사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기 때문에 수습하기는 힘들다. 도대체 뭘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술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방향으로 봐도 지금 이 시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당황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아무 말이나 내던져도 정하얀은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교국이 망하는 것보다는 나아.’
어차피 정하얀과는 떨어질 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리스크도 크지만 메리트는 그 리스크를 상회할 정도로 크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10년 뒤 나와 정하얀의 관계는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칼에 맞을 수도, 함께 살 수도 있는 엔딩에서.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한 거야.’
그나마 둘 중에 조금 더 나은 선택을, 조금 더 빨리 한 것이라 자위하는 게 맞다.
어느 날 갑자기 단검에 맞은 뒤에 압축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가슴 한편 깊숙한 곳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어. 슈바….’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하고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오히려 우, 우리 관계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된 시기였던 것 같아. 이번 일로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고….”
‘정말로 돌아보고 싶다.’
자꾸만 정하얀처럼 말을 더듬게 된다. 거짓말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정말로 내키지가 않는다.
“아아아… 아아아, 오빠아…. 히끅. 흐그으으윽.”
“대답은 나중에 해도….”
“아니에요! 아니, 아니, 아니에요! 지금! 지금 할래! 지, 지금 할래요!”
‘나중에 해도 돼….’
제발 조금 시간을 줬으면 싶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맬 것 같은 기세.
이쪽이 먼저 물어보기도 전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네…. 할게요. 할게요. 흐어어어엉… 할게요. 한다구요. 할 거라고요. 무조건 할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할 거예요. 히끅, 히끅….”
‘제길.’
내 손에 들린 반지를 잡은 뒤에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얼굴에는 엄청난 감동과 성취감이 교차한다.
내가 끼워주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왼손 약지에 반지를 장착한 모습.
순간적이었지만 방금 정하얀의 움직임은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를 상회했다.
‘제기랄!’
“드디어 된 거야. 드디어….”
평소대로 혼잣말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행복해 보인다.
이쪽의 표정과는 상당히 대비될 것 같았지만 나 역시 억지로라도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 손으로 계속해서 눈물을 닦고 있는 정하얀은 내 표정을 볼 여력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혹시나 다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런 작업은 필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직까지 밖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한소라와 박덕구에게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고 말해야 했지만, 정하얀은 그칠 생각이 없는 모양. 진정했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다시 한번 눈물이 튀어나온다.
“흐어어어어어엉…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는 오빠밖에 없어요. 히끅.”
“나도 사랑해.”
오히려 우다다 달려들어 꽉 안겨 들어오자 이쪽의 가슴팍이 금방 축축해졌다.
“절대로 안 놓칠 거야…. 절대로.”
“…….”
그 와중에 중얼거리는 말에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다.
몇십 분이나 안긴 이후에야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
뽀뽀를 해달라는 듯 까치발을 들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생각해 보면 로맨틱한 장면이기는 하다.
여전히 수많이 빛이 형형한 마법진 사이, 수십 가지의 색이 서로를 비추었고 동공 아래에 고인 물웅덩이가 그 빛들을 반사한다.
그 한가운데 반쯤 안긴 채 이쪽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정하얀.
이쪽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이미 정하얀의 머릿속에서는 오늘의 일이 굉장히 왜곡된 채로 비칠 것이다.
한쪽에게는 공포로 기억될 수도 있는 이 공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질 테니 그것 하나는 아이러니하다.
괜스레 방금 전까지 눈에서 검붉은 안광을 쏘아대며 비명을 지르던 정하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많은 유부남, 유부녀가 결혼에 대해 장난삼아 안 좋은 소리를 쏟아내고는 하지만 이쪽의 경우에는 단순 장난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생존에 특화된 이 저주받은 몸뚱이는 한껏 내민 정하얀의 입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
한참이나 서로 입술을 포갠 이후에 퉁퉁 부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재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 정하얀이 빠르게 입을 열어온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히끅… 시, 식은 언제 올릴까요? 혼인 신고서는 어떻게….”
“아, 그건….”
“아이는 어떻게 해야 되요? 저는 아, 아, 아기는 없어도 괜찮아요. 오빠가 아기만 신경 쓸까 봐 걱정 돼서…. 그, 그래도 오빠가 원하는 만큼은 낳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식은 올린 다음에 바로 여행도 가는 거죠?”
“그러니까….”
“저 모아놓은 돈도 많아요! 아! 파란 길드에서 계속 머무실 건가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오빠만 좋으면 어디든지 다 괜찮아요!”
“아… 응.”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둘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오빠가 그건 싫어할 테니까. 그래도 최대한 조용한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 그렇죠? 그리고 신혼여행은 거울 호수로 가요. 꼭 보고 싶었거든요. 배도 타고 싶고… 호, 호수에 함께 있으면 굉장히 낭만적일 거예요. 그, 그리고 매일매일 아침밥 해드릴게요. 자, 잘은 모르겠지만 그… 밤에 하는 것도 열심히 공부하고! 또! 전부 다 공부하고! 히끅… 너무 좋아요. …요리 학원도 다닐게요.”
“일단 그, 그런 건 차차 둘이 이야기해 보자. 일단은 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네… 네. 그리고 또….”
“그… 리고… 당분간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왜, 왜요?”
“아직 해결해야 되는 일도 많이 남았고…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얽혀 있으니까.”
“네에?”
“그리고….”
“네.”
“조금 더 제대로 자리를 잡고 하고 싶어.”
일단 저질러 놨으니 수습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기 싫은 결혼을 미루는 전형적인 쓰레기들의 발언이었다.
깜짝 놀랐다는 얼굴이 순간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정하얀으로서도 이 정도는 양보하는 게 맞다.
만약에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면 차희라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대놓고 전형적이긴 한데….’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
사실 이미 자리를 잡을 대로 잡았기 때문에 더 이상 잡을 자리도 없지만 자리를 잡는다는 말 또한 마법의 단어였다.
“저, 저는 괜찮아요. 아무렇게나 해도 돼요. 그, 그냥 둘이서만 해도 괜찮고…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오, 오빠만 있으면….”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래도….”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같이 하자. 너무 초조해 생각하지 말고…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네….”
“그리고 좋… 은 날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 될 것 같다.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아….”
그제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파래졌다.
확실히 방금 전은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 같았다. 당황하는 바람에 얼떨결로 내뱉은 마법의 주문이었지만 이걸로 당분간은 정하얀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정하얀의 입장에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달콤한 일이었을 테니까.
혹시라도 잘못을 저질렀다가는 결혼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할 것이다.
‘나쁘지 않아.’
적어도 컨트롤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생긴 것이다. 달콤한 미끼일수록 조금 더 잘 통하는 법이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 떡밥마저 전부 다 사라졌을 경우이지만 최소한 1년은 얌전히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지금도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니까.
‘이번 일을 벌인 책임.’
그걸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얼떨결에 흥분하고 폭주한 뒤에 일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이 일의 심각성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맨 처음 봤을 때는 정신머리가 나간 사이코 같은 모습을, 식 이야기가 나온 이후에는 세상 다가진 것처럼 행복한 모습을, 현재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보다 더 불안해하는 표정.
정하얀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 오빠….”
“…?”
“누, 누, 누가 찾아온 것 같아요.”
어떻게 하냐는 듯한 대사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무섭게 외부의 문제가 들이닥친 것이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