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회귀자 사용설명서 317화
빛의 이름으로(2)
“가능하죠?”
“가, 가능하기는 한데…. 그건… 아직 시도해 본 적도 없고….”
“한번 해봅시다. 아무래도 준비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지금 도대체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다.
당연히 황당할 만도 하다.
애초에 흑마법사인 한소라가 계약을 맺는 건 이쪽에서도 최대한 지양해왔던 일이었고 실제로 소환할 수 있는 악마들의 정보가 굉장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해야 되는 일이다.
조금 더 치밀한 설계를 위해서도 이 과정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오늘 떨어진 마법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
다른 이유들도 많기는 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지금은 최대한 시간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 마력은 하얀이가 빌려줄 수 있고 모든 준비는 이 장소가 해결해 줄 겁니다. 소라 씨는 그냥 몸뚱이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대신 이후에 포상은 확실하게 해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 지역으로 전출을 보내드릴 수도….”
물론 전출 보낼 생각은 없지만 눈이 번쩍 뜨였는지 미끼를 물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하, 할게요!”
“정확하게 언제라고 약속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소라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보겠습니다. 혹시 소환이라는 게….”
“정보가 너무 적어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일단 정하얀 님의 마력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지만… 제가 할 수 있을지가 걱정돼서…. 아마 중급 악마나 상급 악마 정도가 소환될 거라고 생각….”
“중급 악마와 상급 악마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도시에 떨어졌던 마법 정도는 할 수 있는 개체가 나와야 합니다.”
“그 정도를 할 수 있는 개체는… 악마 중에서도 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은 노력해 볼게요.”
전출이라는 떡밥에 희망을 가지고 열의를 불태우는 것을 보니 정말로 정하얀과는 함께 있기 싫은 모양이다.
그 당사자인 정하얀은 이전의 실수를 만회한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이쪽의 계획이 어떤 건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왔지?”
“아직 조금 남았어요.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아요, 오빠.”
“그럼 곧바로 시작하자. 소라 씨, 혹여나 따로 소환진이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게 있는 겁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악마들 마다 소환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고 들었고 마력만으로도 소환이 가능한 개체가 있으니. 심한 경우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력은 일단 충분하니까요.”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다행입니다만… 일단은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으니까요. 지금 바로 시작합시다.”
“네.”
이쪽의 말이 끝난 이후, 한소라는 헐레벌떡 마법진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아까처럼 노도와 같은 마력의 폭풍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는 마력이 모인 것은 순식간.
마법진을 통해 한소라에게 마력이 쏟아지는 것 역시 시야에 비쳤다.
계속해서 수인을 외우며 중얼거리는 한소라의 모습은 가관이다.
한때 재능 있는 학생이었던 만큼 주문을 외우는 데 흐트러짐이 없다.
‘성공하겠는데.’
하지만 점점 마법진이 빛을 잃어 가는 것이 보인다.
대충 봐도 좋은 징조는 아니다.
소환이 실패할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정하얀은 다시금 마력을 밀어 넣었고 한소라 역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당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약한 마력을 마법진으로 밀어 넣는 순간, 한소라가 서 있는 자리에서 흑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동공이 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밝은 빛을 뿌려댔던 마법진들이 모조리 흑색으로 뒤바뀌었다.
검은색 빛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현재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은 검은색 빛이다.
‘뭐야.’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란 마력의 파장이 느껴져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결국에는 빛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을 때 눈앞에 뭐라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가 자리한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저게 뭐야.’
[거짓과 선동의 악마 벨리알-신화 등급]
[72악마 군주]
[???]
‘뭐 저딴 게 튀어나왔어….’
공중에 뜬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외관을 지닌 괴물이다.
한소라는 자신이 이룩한 결과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좋지 못한 몸으로 소환의식을 진행한 여파인지 휘청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재미있구나.
하나도 재미없다.
대충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완전히 소환된 상태라고는 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이 당황스러울 정도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목소리에 담긴 저음이 마치 뇌를 뒤흔드는 듯한 느낌이다.
박물관에서 본 고대신의 파편과 커다란 뿔을 가지고 일곱 개의 무기를 든 마족보다 강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녀석 역시 이쪽은 쳐다볼 수 없는 상위의 존재.
‘신화급이야.’
-정말로 재미있어. 어째서 이 몸을 이쪽으로 불러 들여올 수 있었지? 이 마법진의 영향도 아닐 테고 이 나를 소환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제물이 부족했을 텐데…. 아쉽지만 이런 방식의 소환은 계약 조건에 위배된다. 이 흑마법사는 그릇이 작아 나를 담을 수 없기도 하고… 조건을 전부 충족시키지도 못했어.
하지만 조금 더 센 놈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달라지는 건 없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쉬기 위해 최대한 공기를 들어 마시자 그제야 뭔가 안정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소라는 아직까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저쪽의 소환한 여파가 꽤 큰 것 같았다.
이곳에서 말을 거는 게 맞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말을 꺼내는 게 맞다.
이쪽은 시간에 쫒기고 있었으니까.
“부, 부름에 답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로군.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혹시나 이쪽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넙죽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무슨 말씀이신지….”
-너로구나. 필멸자여. 네 역겨운 마력이 나를 이쪽으로 불러들였다.
“네?”
-나와 이 정도로 파장이 잘 맞는 인간을 본 적은 정말로 오랜만이로구나. 이 정도로 적성이 맞는 인간이 이 길을 걷지 않다는 게 아쉽군. 흐음… 어쨌든 간에 이왕 이렇게 현세로 나오게 되었으니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직접 계약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 나를 소환한 이유가 있을 테니 들어는 주마. 그래. 오랜만에 나와 파장이 맞는 이를 만난 기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데.’
마력의 파장이고 성향이고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녀석이 이쪽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환영할 일이다.
물론 녀석이 거짓과 선동의 악마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웃는 얼굴로 이쪽의 통수를 치지는 않을지에 대해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악마는 소환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적어도 상위의 악마가 아닌 이들은 그렇다.
물론 시스템에 일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신화 등급의 이들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을 의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 와서 녀석을 떠나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은 것 또한 마음에 드는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역겨운 인간이야.
‘칭찬이야, 욕이야. 슈바.’
-하지만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필멸자여. 너희들은 귀한 이들이다. 72악마 군주들을 불러올 수 있는 이들이 흔한 것이 아니지. 나를 소환한 그릇 역시 더욱더 성장할 여지가 있고 마력의 축복을 받은 여자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좋은 눈을 가지고 있는 역겨운 인간. 너도 마찬가지다. 간접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을 소환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만 그릇의 상태로 봐서는 다음 소환은 어려울 것 같고… 이 내가 간단히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마. 너희들이야 알 턱이 없다만 이것 역시 실적이라 할 수 있으니.
“실적 말씀이십니까?”
-뭐, 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계약을 따낼 수 있다는 건 우리들에게도 이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 정말로 아쉽게 됐군. 네가 만약에 나와 직접 계약이 가능했더라면 우리 72군주들 중에서도 아주 오랜만에 직접 계약을 따낼 수 있었을 텐데….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일단은 계약서부터 받는 게 읽어보는 게 좋겠군. 간접 계약이긴 하다만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지.
“…감사합니다.”
-부족하기는 하지만 대가는 나를 소환한 마력으로 하지. 물론 이번 일에서 내가 느낄 즐거움이나 역시 포함된다. 제발 나를 즐겁게 해줄 내용이라면 좋겠는데….
눈앞에서 흑색의 계약서가 생성되는 것은 순식간.
악마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녀석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불지옥 속에서 낄낄 대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계약서에는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 있다. 간접 계약일 텐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항목에 문제가 될 부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데?’
혹시나 했지만 진심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
72악마 군주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마가 이쪽에 호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인 한소라.
이쯤 되니 나 역시 흑마법사를 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아쉽다.’
만약 내가 흑마법사를 선택했다면 정말로 녀석과 직접 계약을 노려봤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흑마법사를 선택했던 1회 차에는 정말로 계약을 맺었을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간에 지금 당장은 그림의 떡.
지금은 꼼꼼히 계약서를 살펴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직까지 정신없어 보이는 한소라가 내 쪽을 힐끔 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계약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한소라 역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 경우에는 조금 특별한 경우니 세 명을 모두 계약자로 인정하도록 하지. 물론 계약 상대는 그릇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 혼자서는 이 몸을 불러올 수 없었을 테니.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벨리알 님.”
-아첨할 필요 없다, 역겨운 인간. 하하하핫. 그보다 빨리 원하는 걸 말하라.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있어 나를 부른 것이 아닌가.
그야 물론이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어울려 주실 일은 무척 간단합니다, 벨리알 님.”
-말해보라.
“몇몇 인간들을 속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 하나면 됩니다.”
눈앞에 있는 악마의 입꼬리가 한 것 올라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기분 좋은 부탁이라는 듯이 말이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부탁이로구나, 역겨운 인간.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이미 지옥에 가 있는 녀석에게 뜻밖의 동료를 만들어 주게 될 것 같았다.
‘악마 소환사, 진청!’
대륙에 어둠은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이 맞다.
빛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