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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20화 (319/1,590)

# 320

회귀자 사용설명서 320화

빛의 이름으로(5)

사방에서 악마들이 달려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박덕구는 최대한 마법사들을 밀집시킨 채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어떻게든 우리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괜스레 고마운과 미안함이 교차되었지만 지금 이쪽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어서 내 봉인을 풀어라, 계약자 진청이여! 더 큰 힘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친 자식들이! 개자식들! 개자식들이!!”

-너에게 무한한 힘을 내려주마! 계약자여!

“이기영! 이 개자식!”

‘키야… 저 양반 물건이네. 물건이야.’

어째서 자신과 이렇게 파장이 잘 맞는 인간이라고 말한 건지 알 것 같다.

마치 처음부터 한 극단이었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사를 날려 주는 솜씨가 엄청나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즐기는 느낌이라 만족스럽다.

짓과 선동의 악마 군주라는 타이틀처럼 저런 식으로 행동했을 때 상대방이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녀석과 같은 생각이다.

잔뜩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을 보니 정하얀 때문에 얻은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느낌이다.

역시나 가끔은 이런 이벤트를 벌여줘야 삶이 활기를 되찾는다.

-이 도시! 아니 이 대륙을 완전히 부술 수 있는 힘을 내려주마! 계약자여!

“이, 이 저급한 쓰레기가!”

-어서 봉인을 풀어라! 진청! 어서!

그림 자체가 너무 완벽하게 마땅히 꼬집을 만한 것이 없다.

봉인된 72악마 군주가 진청을 향해 계약자라 외치는 상황.

녀석은 이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고 박덕구와 우리는 악마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정말로 연기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그림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이쪽 역시 사방팔방에 용숨결 물약을 뿌렸고 정하얀은 재빠르게 캐스팅을 하며 악마들을 공격한다.

허물어지는 녀석도 있지만 빈자리에 금방 다른 악마들이 생겨났다.

만약 연기가 아니었다면 오줌을 지려 버렸을 것이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무척이나 힘들어 했는데, 그 모습이 더욱더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지지 마라, 덕구야. 하얀아. 이대로 저런 악마가 세상에 풀려난다면 라이오스가 무사하지 못할 거다. 버티는 게 아니라 뚫어내야 해. 저 악마의 봉인이 풀려나게 하지 마! 소라 씨는 괜찮습니까?”

“흑마법에 침식된 것 같아요, 오빠. 소라 씨가….”

미리 맞춰놓은 대사를 읊기 시작.

기왕이면 조사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지만 혹시나 한소라까지 안 좋은 일이 미칠 가능성을 고려한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소라 씨,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흑마법에 저항해야 합니다.”

“형님! 일단은 몸을!”

“지금 몸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말 들어라, 덕구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어도 저 악마는 봉인해야 한다.”

“혀, 형니임!”

괜스레 울컥하는 덕구 녀석의 얼굴은 가관.

사실 이 대사를 말하는 것도 쪽팔린다.

그래도….

‘이건 교황청에 보낼 영상이니까.’

교황청 편집본도 따로 준비하는 게 맞다.

조금 오그라들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상은 나이가 지긋하신 권력자들에게서 기립박수를 받을 만하다.

아마 바젤 교황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시리라.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꽉 쥔 것은 당연지사.

눈을 감고 베니고어 여신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면도 하얀 카메라에 담는다.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오늘 목숨을 잃어도 절대로….”

“내가 오늘 죽어도! 형님만은 절대로 죽게 만들지 않을 거요!”

그 와중에 내 기도를 듣고 있던 박덕구는 각성 아닌 각성을 하기 시작.

저번보다도 더 성장한 녀석이 본격적으로 방패를 휘두르니 하급 악마들은 우후죽순 쓰러진다.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렇게 금수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요! 자신의 동료까지 팔아먹으며 이득을 취하려고 하다니!”

쓸데없는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녀석에게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하얀 역시 주문을 준비하고 있기는 하다.

불타는 눈으로 진청을 노려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녀석이 꼴 보기 싫었던 모양.

방금 전까지는 방해가 됐던 눈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악마소환사에게 분노를 보내는 정의로운 마도사의 진실된 눈.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살의는 이정도로 포장할 수 있다.

“지지 마. 봉인을 푸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이런 저급한 장난질에….”

‘걸려들지. 왜 안 걸려들겠어.’

녀석도 알고 있다.

이쪽이 마력홀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걸 녀석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나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아마 지금쯤이면 깨달았을 수도 있으리라.

이쪽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고 어째서 말도 안 되는 성과들을 올릴 수 있었는지.

그 날 내가 내걸었던 한 수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실제 능력으로 이룬 건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이 블러핑이고 헛소문이며 선동과 날조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확실히 모든 걸 눈치챈 모양이다.

정정당당한 머리싸움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조금 미안해진 셈이다.

애초에 저쪽과 이쪽은 영역이 다르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거다.’

이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정보다. 흑마법의 잔향이 느껴진다거나 마력이 인도했다. 라는 말처럼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것보다 더욱더 신빙성 있는 정보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할 수 있지만 그걸 해명하려면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증거가 필요하다.

단순히 한 문장으로 이러할진대 이런 영상의 파급력을 우습게 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마 이 물건이 풀린다면 녀석은 이걸 해명하기 위해 평생의 시간을 쏟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아쉬웠던 것은 라이오스 위에 지금 당장 마력 홀로그램을 띄워놓을 수 없었다는 것.

만약에 조금 더 치밀하게 이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편집본 없이 영상을 내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당신들의 자작극이라는 걸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이런 되도 않는 자작극에 사람들이 속을….”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열심히 자기변명을 외치고는 있지만 이미 온도차가 있다.

심지어는 녀석의 옆에 있는 마법사들마저 녀석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속지 않을 겁니다. 이런 자작극에는 그 누구도 속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명한다고 해도 겨우 저 정도의 대사.

어차피 편집본에는 저 대사가 악마의 목소리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커헉!”

“혀, 형님!”

“괜찮다, 덕구야. 그보다는 빨리!”

“이 나쁜 놈들이 감히 형님을!”

게다가 녀석이 아무리 외치고 있다고 한들, 이미 이곳과 저곳은 그 처절함이 다르다.

여기에 영상 편집까지 적절히 치고 들어올 테니 이 일이 대중에게 이게 어떻게 보일지는 뻔할 뻔자.

게다가 적재적소에 치고 들어오는 벨리알도 한 건 해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에 와서 망설이는 것인가. 계약자여! 어서 내 손을 잡고 봉인을 풀어라!

“닥, 닥쳐라 악마.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계약자여!!

어떻게든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달을 것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이쪽을 죽이는 것.

증거 인멸이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렇지….’

지금 여기서 자신 역시 공격에 가담하는 순간, 이미 꼬인 상황이 더 꼬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리저리 오도 가도 못하는 꼴은 가관.

이 그림이야말로 진짜 장군이며 체크메이트.

이쪽에게 100수를 준다고 했던 얼굴이 괜스레 오버랩된다.

‘나는 100초 준다, 이 새끼야. 고맙다. 진짜 너무 고맙다!’

적재적소에 녀석이 치고 들어와 정말로 다행.

오히려 이곳을 찾아줘서 정말로 고마워진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머리 꽤나 굴리고 있었으리라.

‘어떻게 할래?’

이쪽을 죽일래 아니면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래.

그것도 아니면 도망칠래?

물론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와 벨리알을 계약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신들의 생사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벨리알과 그런 종류의 계약을 맺은 건 아니지만 계약 내용을 알지 못하는 저들이야 조심스러워지는 게 당연하다.

-계약자여! 어서!

“제길….”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쪽의 머릿속으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요, 존경스럽고 위대하신 벨리알 님.’

[아부할 필요 없다고 하였다, 역겨운 인간.]

‘아부가 아닙니다. 어찌 아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요. 그보다 이렇게 따로 말을 걸어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 별건 아니다. 다만 계약 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니.]

순간적이지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왠지 이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심해도 좋다, 필멸자여. 그대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는 중요하다. 72군주는 현세로 불러올 수 있는 이들이 그렇게 흔한 게 아니야.]

‘그렇다면 원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계약 내용은 분명 몇몇 사람을 속여 달라는 것이었지.]

‘그렇사옵니다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대가 속이는 것은 전 대륙에 있는 인간들이 아닌가.]

눈치 빠른 새끼.

[명색이 거짓과 선동의 군주인 내게 장난질을 치려고 하다니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역겨운 인간인지 모르겠군. 장담컨대 그대는 내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도 충분히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가,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나 역시 계약서에 장난을 조금 해놓았다. 사실 벌을 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야. 대가를 조금 더 받아가는 걸로 만족할 생각이다. 해서 네가 읽은 계약서 말이다만….]

‘네.’

[혹시 그 계약서와 저 흑마법사가 읽은 계약서가 동일한 계약서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

계약서는 한 장이었다.

나와 한소라는 틀림없이 같은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보고 있는 내용이 달랐을 거라는 걸 깨닫는 건 순식간.

‘이런 멍청한 실수를…. 미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소라는 그대로 사인해 버렸다.

당연히 동일한 글씨를 읽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거짓과 선동의 악마라는 걸 조금 더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역겨운 인간.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저 대가를 받아갈 뿐이라고 저 흑마법사가 아무 의심 없이 사인한 이유 역시 네가 긍정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말하자면 그대가 벌일 법한 일이었기 때문에 서명했을 거라는 말이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면 네가 부리고 있는 흑마법사가 먼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하오면…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나. 대가를 받아간다고. 단지 그것뿐이다.]

정말로 눈 깜빡할 사이.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몸집을 키운 악마가 대도시 라이오스를 향해 몇 개의 커다란 구를 떨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순식간에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가 폐허가 될 거라는 그 황당한 예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여기에 있는 이들 모두 커다랗게 입을 벌리는 중.

녀석을 유지하고 있던 마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도시 전체에 있는 인간들이 모조리 몰살당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누가 봐도 큰 피해가 생길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한소라 슈발!’

말하자면 한소라는 내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에 찬성했다는 사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는 게 된다.

‘사람 보는 눈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

이쪽이 의심받는 상황만 아니라면 이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쑥대밭이 되는 것보다 온전한 상태로 들어오는 게 더 좋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지는 순간에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구체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걸로 진청을 더 옭아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솔직히 몇 초 동안은 고민했지만….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생.]

[위기에 빠진 라이오스를 구해주세요. 최대한 빨리. 이 나쁜 놈(0/1)]

“정하얀!!!!”

역시나 빛은 승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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