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회귀자 사용설명서 325화
라이오스의 영웅(4)
흐뭇하게 왕성의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찝찝한 부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게 대부분이 이쪽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하면 그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니 다른 표현은 필요 없으리라.
지난밤에도 왕성의 밖에 모인 이들 때문에 어떻게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
한 나라에 영웅이 된다는 건 귀찮기는 하지만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슬그머니 바깥을 바라보니 아직까지도 이쪽의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기도를 드리는 중립국 국민들이 보인다.
남녀노소, 대륙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모여 있는 모습은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라이오스의 국왕 프리스티나가 병상에 누워도 이런 장면은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당연히 저래야지.’
그 날 저들이 여신의 거울로 본 모습은 그야말로 희생의 정석. 영웅들의 모습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어떻게든 이쪽을 지키려고 한 전사 박덕구, 어두운 마력에 노출된 채,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던 한소라, 결정적으로 빛에 둘러싸인 채로 악마의 공격을 막아냈던 나와 정하얀,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계에 이르렀음에도 라이오스인들을 지키려고 했던 모습은 쌍팔년도 영웅전기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미지였다.
‘완벽한 그림이었어.’
다시 한번 생각해도 뿌듯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서는 벌써부터 커다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 아마 이쪽이 병상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현성이도 왔다고 했었지.’
가장 빨리 일어난 박덕구와 함께 오매불망 이쪽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당연 사랑스러운 회귀자.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소리에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이나 바깥을 서성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 가슴이 다 찡해질 정도였다.
‘그래. 형도 네 맘 이해한다.’
다소 황당했던 퀘스트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녀석이 초월적인 존재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
아니, 지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초월적인 존재가 녀석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번 일 역시 이쪽이 김현성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에 캐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준 신화 등급이야. 준 신화 등급.’
준 신화 등급으로 올라간 보상이 겨우 마력 5라는 건 굉장히 의아하고 짜증 나지만 그래도 직업의 등급이 ‘준 신화’라는 건 이례적인 이야기다.
심지어 마력이 신성력의 성질까지 띄고 있으니 교국, 아니,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성력과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셈.
당시에는 조금 황당하기는 했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정하얀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때 내가 정하얀의 몸을 치유하지 않았더라면 장담컨대 정하얀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정하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네.’
분석 아닌 분석을 해보자면 위에서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는 김현성뿐만이 아니라 정하얀 역시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
이를 테면 김현성이 회귀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이 실제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면 정하얀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
보이지 않는 위협을 대비한다고 생각해 봤을 때 정하얀이라는 패가 없어진다는 건 나로서도 상상하기 싫을 것이다.
여러 가지 버프를 받기는 했지만 도시 전체에 떨어지는 대규모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건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업적이다.
[빛의 연금술사 -준 신화 등급]
[신에게 선택받은 이들만 전직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빛의 연금술사입니다. 마력이 신성력의 성질을 함께 가지게 됩니다. 마력이 5 올라갑니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고 넌 진짜 개새끼야. 이 역겨운 놈. 진짜 너 진짜 구제 불능의 쓰레기다. 진짜.]
‘얘는 나만 너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나만 너무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내가 그들의 주위에서 떨어지는 꿀을 맛있게 받아먹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튼 간에 슬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교국에서도, 교황청에서도, 라이오스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슬그머니 옆쪽을 바라보니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카스가노 유노의 결계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정하얀의 눈치 아닌 눈치를 보고 있는 한소라는 덤.
세 명이서 한 병동을 써야 하는 건 누군가에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한소라와는 달리, 정하얀은 아직까지 얼굴이 창백했는데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준 신화급의 마법을 후려갈기고 마력 스탯이 99라고 한들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다 쓴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표정은 나빠 보이지가 않는다.
이쪽이 라이오스 국민들이 걱정하는 것을 즐기듯, 정하얀 역시 내가 자신을 걱정하는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묘하게 닮아가고 있는 거 같단 말이야.’
왼손 약지의 반지를 소중한 듯 끌어안고 있으니 당장 몸이 힘들더라도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얀아, 몸은 조금 괜찮지?”
“네, 오빠. 아직까지는 마법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그래도 문제없어요. 괜찮아요. 콜록콜록. 정말로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콜록. 돼요.”
계속해서 기침을 하는 게 연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정하얀의 몸 상태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정말로 괜찮아요. 으으윽…. 정말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콜록.”
심지어 가슴을 부여잡는 꼴은 가관.
“콜록콜록. 죄, 죄송해요. 사실 안 괜찮아요. 콜록. 오, 오빠가 조금만 쓰다듬어주면 더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 마력 있잖아요.”
“아… 어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콜록. 가슴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응.”
“너무 아파요. 오, 오, 오빠….”
더불어 이제는 적당한 핑계거리도 생겼다.
이쪽의 마력이 신성력까지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하얀은 이미 알고 있다.
깨어난 이후에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마력을 보내주고 있었지만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듯 슬그머니 가슴을 내민다.
살짝 손을 얹자 움찔하는 모습은 이상하게 귀여워 보인다.
“하윽….”
잠깐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일단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내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지금 마력을 뽑아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네. 거, 거기서 더 왼쪽이요. 가운데 말고… 시, 심장 쪽이 아파요. 심장 쪽으로 해주세요. 심장… 심장이 너무 아파요.”
“이제 좀 괜찮아?”
“하으윽… 아뇨.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시, 심장 가운데가 너무 아파요. 콜록. 으으으윽… 하윽. 가운데가 아파서 거기에….”
심장 가운데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소리에 얼굴이 붉어진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한소라는 어디다가 눈을 둬야 할지 몰라 한다.
이쪽 역시 민망하기는 마찬가지.
서로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지속되었고,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와 한소라를 구해준 셈이다.
정하얀은 아쉽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이 어리광을 언제까지 받아줄 수는 없다.
“나머지는 나중에 해줄게.”
“네….”
시무룩한 얼굴.
하지만 절제해야겠다는 얼굴이기도 했다.
아직 철이 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뭔가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이게 모두 프로포즈의 영향 아닌 영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침대보를 대충 정리하고 반쯤 몸을 일으켰고, 정하얀에게 마력을 빨린 영향인지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부터 창백한 정하얀과 애초에 회복이 느린 한소라 역시 만만치 않은 느낌.
벌써부터 박덕구의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좀 미안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하니 튀어나오려던 양심의 가책도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한번 이쪽 일행의 모습을 관찰하던 바로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
그 동안 방 안을 뒤덮었던 일부 결계가 해체됨과 동시에 재빠르게 몇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혀, 형님! 형님!”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박덕구의 목소리였지만 아리스 시녀, 아니, 이제는 오스칼이라고 불러야 하는 인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명예추기경님!”
헐레벌떡 뛰어옴과 동시에 이쪽에게 안기는데 무척 당황스럽다.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는 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정도.
“흑… 흐으으윽…. 몸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 네.”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는지요. 어떻게…. 흐으윽. 저를 알아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오스칼 님. 이곳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제가 걱정을 끼친 모양이군요.”
“흐으으윽….”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한 국가의 수장인 만큼 조금은 의연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건만, 마음속에 있었던 불안을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정하얀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지사.
완전히 이쪽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 때문에 걱정 아닌 걱정이 샘솟기 시작한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확실히 불쾌하다는 정하얀의 모습이 보인다.
일단은 얌전히 있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전혀 다른 감정이 얼굴에 깃들어 있다.
‘저건 뭐라고 해야….’
그 감정의 정체가 우월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은근슬쩍 코웃음을 치는 것은 물론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고 있다.
얼핏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효과가 있다고 봐야 되는 건가….’
물론 이걸 효과가 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좀처럼 얼굴에 자리한 우월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껴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초조해했지만 내가 살짝 그녀를 떼어내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때의 한 방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이쪽의 병실로 찾아온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얼굴에 담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형님. 형니임…. 끄윽. 누님도 괜찮은 거요? 소라 후배는 좀 어떤 거요? 다 아무 이상 없는 거요?”
“그래, 덕구야. 아무 이상 없는 것 같다. 조금 멍하기는 하지만 몸은 전부… 나은 것 같다.”
“아직도 정상이 아닌 거 아니요?”
“아냐. 아냐. 정말로 괜찮다. 몸에 이상은 없어. 다른 사람들도 전부 마찬가지야.”
눈물 콧물을 흘리며 질질 짜고 있는 박덕구.
함께 온 길드원들 역시 눈에 보인다.
선희영도 크게 안심하는 표정이었고 정말로 놀랐다는 얼굴의 조혜진, 왠지 모르게 죄책감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는 김예리, 여전히 실실 웃고 있는 안기모.
유아영이나 김창렬도 보인다.
“다행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하늘이 도운 거라고 밖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뒤에서 이쪽을 흘겨보는 이지혜의 얼굴을 보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내심 섭섭했던 모양.
그래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보인다.
자신의 차례는 나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라이오스의 인사들은 물론 교황청에서 내 상태를 보러온 이들까지 하나씩 인사를 나누다 보니 괜스레 피곤해지기 시작.
하지만 모두 이쪽을 걱정하고 있어준 감사한 이들이다.
카트린 공작, 아니, 카트린 의원이나 엘리제 의원 같은 이들 역시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그 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여러 인맥들이 오랜만에 깨어난 내 모습에 훌쩍이고 있다.
힘없이 미소를 보내며 그들의 걱정에 화답한 것은 당연,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아.”
“기영 씨.”
“현성 씨!”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