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
회귀자 사용설명서 333화
인생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1)
내가 확인한 것은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당연.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실제로 가면 쓰레기 진청에게 맹렬한 분노를 느낄 정도였으니 거짓말 탐지기를 대령해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더러운 악마소환사. 쓰레기 자식. 분리수거도 못할 쓰레기 놈이 여기에 있었어.’
그야말로 피눈물이 나오는 상황이요,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던 검은색 세계였다.
더러운 가면 쓰레기 진청이 1회 차의 정하얀을 농락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진다.
사랑하는 나의 예비신부가 과거에 웬 더러운 놈팽이에게 고통 받은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조혜진을 죽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이번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하리라.
내 분노를 느낀 모양인지 카스가노 유노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
아직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걸 보여줘서 고맙다, 카스가노.”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님.”
“검은색 세계의 가면 쓰레기를 내 눈으로 직접 봐서 다행이야. 빛의 진영을 궁지로 몰아넣은 더러운 자식의 정체를 파악한 거잖아. 그렇지? 만약에 오늘 이걸 보지 못했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 아마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됐을 거다.”
“네?”
“그 악마소환사 진청이 검은색 세계를 위협한 대악당일 줄이야.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야… 정말인지 예상도 못 했다니까. 그렇지 않아?”
“네? 아… 아, 네. 맞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알아들은 게 확실하지?”
“네.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은근슬쩍 운을 띄우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똑똑한 만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김현성이 회귀자임을 모르는 카스가노는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바로 가면 쓰레기의 정체가 누구냐는 것.
나는 이미 못을 박았고 카스가노 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 세계의 주인님께서는 저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냈지요. 분명히 제가 주인님을 고립된 던전에서 구출한 이후에 함께 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면을 쓴 진청이 여단에 가입했을 당시에 말입니다.”
“아아. 응. 그랬었지?”
그 와중에 카스가노 유노는 쓸데없는 설정을 첨가하기 시작.
조금 사심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오히려 이런 세세한 설정까지 건드려준 카스가노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
혼자 뭘 상상하는지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머릿속으로 동인지나 팬픽이라도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색 세계의 유노의 바람을 들어준 셈이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하다.
일단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무거운 짐은 모조리 벗겨진 상태.
이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 없지만 해야 할 일이야 뻔하다.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이쪽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더러운 악마 소환사 진청이 가면 쓰레기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이번 미션의 목표다.
그 와중에 카스가노가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그보다 주인님, 조금 건방진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어째서 검은색 세계를 신경 쓰는지 궁금한 거겠지?”
“네. 물론 주인님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혹시나 제가 도울 것이 있을까 싶어….”
“으음….”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한데…’
카스가노 유노는 무조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조금 더 일을 스무스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전하는 게 좋을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 그건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분명히 고민할 여지가 있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존재하니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움직였을 때의 메리트 역시 상당히 크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만은 밝혀도 나쁠 게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쏠리기 시작.
어차피 그녀도 반쯤은 회귀자다.
카스가노가 스스로 1회 차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김현성에게 밝힌다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거야! 슈바!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그동안 그녀를 활용할 생각을 못 했는지 이쪽이 멍청하게 느껴질 지경.
카스가노를 출동시키는 것은 무조건 이쪽에 이득이 된다.
결심을 했으면 입을 여는 것이 당연하다.
천천히 말을 내뱉자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카스가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회귀자라는 거 혹시 들어본 적 있어?”
당연히 고개를 젓는 모습이다.
카스가노 유노는 검은색 세계가 1회 차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상태였다.
물론 이쪽의 반응에 대충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남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내용의 무게와는 다르게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담담하게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과 유노가 바라봤던 검은색 세계가 김현성이 겪었던 1회 차라는 사실을 전했고, 김현성이 가면 쓰레기 진청을 찾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카스가노 유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우습게도 이쪽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그런 의심을 품지는 않은 모양.
지금까지 불투명했던 검은색 세계의 정체에 대해서 확신을 전하는 순간 카스가노 유노는 갑작스레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얘 뭐야. 왜 이래? 울 것까지는 없잖아.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라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지사.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요. 흐으윽…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래.”
“주인님께서는 파란 길드 마스터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고….”
“맞아. 지금 함께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뭐, 아무튼 방금했던 이야기는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다.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 혹시 다른 분들은….”
“다른 분?”
“마법사나 용병여왕님.”
“그녀들은 몰라. 정하얀이나 차희라 말고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이건 너와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아!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둘만의 비밀…. 둘만의 비밀이로군요.”
“망극할 것까지는 없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마 지금부터는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 거라고 믿는다. 자세한 건 이후에 대충 설명해 주면 될 것 같고….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하나 주인님, 혹시….”
“응?”
“혹시 제가 검은색 세계에서 주인님에게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
“주인님을 붙잡기 위해 제가 드렸던 거짓말 말입니다.”
“아아….”
“주인님과 제가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봤다고 말했었지요. 그곳에서 주인님은 모든 것을 잊고 저와 함께, 아주 행복하게 지내게 될 것이라 말했었습니다. 제가 주인님을 찾은 것은 계속해서 제가 봤던 미래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틀림없이.”
“그랬었지.”
“당시에는 주인님을 떠나보내게 하지 못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박덕구 님을 잃으신 주인님의 역린을 건드린 어리석은 말이었습니다만, 혹여나… 그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떠올린 탓에….”
“무슨 뜻이지?”
“1회 차의 제가 2회 차의 미래를 봤을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옵니다, 주인님.”
“아….”
순간적으로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사실 1회 차의 카스가노가 2회 차의 미래를 봤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 미래를 본 당시에는 카스가노가 단순히 나를 말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추측이 영 신빙성 없지는 않게 들려온다.
2회 차의 카스가노 역시 한정적이지만 1회 차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어쩌면 1회 차의 카스가노 역시 2회 차를 들여다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검은색 세계의 유노에게는 2회 차 역시 미래의 일부였을 테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대박인데?’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
“아마 검은색 세계의 저는 죽어가면서도 2회 차에 대해 떠올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벅차올라서… 흐윽.”
“그렇군…. 너는….”
“주인님을 위해 죽었사옵니다. 검은색 세계의 저다운 마무리였고 그녀 역시….”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 이전에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했었지. 혹시 그 동안 본 것이 있나?”
“그건….”
별거 아닌 질문에 무언가 말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굳이 내가 알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 역시 입을 다물기 시작.
내 표정을 본 카스가노가 막 말을 해오려던 찰나, 그냥 손을 올려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아는 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아무튼 간에 다시 한번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이, 이제 저를 믿어주시는 것이신지요.”
“음….”
“아….”
뜸을 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
하지만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보고는 곧바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대신 대답이 되었으리라.
활짝 웃고 있는 카스가노의 얼굴이 보인 것은 당연.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만약 정말로 검은색의 카스가노가 본 것이 2회 차의 미래라면 이쪽에게는 이미 꽃길이 펼쳐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래는 바뀔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행복 엔딩이 탑재되어 있다는 훈훈한 소식 덕분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다.
슬그머니 카스가노를 바라보며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나도 네가 봤던 미래가 현재의 미래였으면 좋겠구나. 아니, 틀림없이 이루어질 거야. 만약 다른 미래라고 하더라고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아… 주, 주인님. 그렇게까지!”
무척이나 감격에 찬 얼굴.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을 때였다.
뭔가 커다란 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에 유노가 이쪽에 말했던 내용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
‘이 집에서 당신과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희는 해,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이를 두 명이나 가지고 있었고 아직 이름을 듣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착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어?”
슬쩍 고래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아직도 얼굴을 붉힌 채 눈물을 쏟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
“어?”
“부족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모시겠사옵니다.”
“아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부디 다시 한번 절을 받아주시옵소서.”
“아니, 잠깐만.”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괜스레 침을 삼켰을 때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정하얀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