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
회귀자 사용설명서 337화
후유증(3)
아직 시작에 불과했지만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가슴 한편이 편안해진 것은 당연지사.
이렇게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면 쓰레기가 빛의 진영을 위협하는 걸 간접적으로 방해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가슴 한편이 콕콕 찔리지만 어둠의 세력이 날뛰는 걸 두고 볼 수 있을 리 만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만큼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지는 게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라 생각했고, 그 방법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여단과 진청 쓰레기에 대한 대화가 끝나고 난 이후, 녀석이 조금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진 김현성이 최우선 과제로 무엇을 꼽았는지는 뻔한 일.
‘혜진 씨를 하얀 씨에게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정하얀에 대한 보호조치였다. 혹시나 가면 쓰레기 진청이 1회 차처럼 정하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언제 어디서 여단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정하얀에게 조혜진을 붙인 것은 최선의 선택이라 할 만하리라.
일단은 녀석 역시 라이오스에 남아 내정에 힘을 쓰는 상황.
나와 정하얀도 당장 이 곳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으니 녀석이 싸돌아다니지 않는 이유가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머리 깨질 거야….’
가면 쓰레기가 진청이라는 심증은 있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반 정도는 녀석이 가면 쓰레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액션을 취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김현성 역시 만능은 아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걸 전부 할 수는 없다는 거다.
현재 가면남 진청은 공화국의 보호 아닌 보호를 받고 있었고 더러운 여단도 어딘가 이쪽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공화국 본진으로 쳐들어 간 이후, 가면 쓰레기 진청을 암살하거나 어디 있는지도 모를 여단 멤버들을 잡아 올 수는 없다.
김현성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다.
물론 그 범위가 무척 넓다는 게 녀석이 가진 이점이기는 했지만 공화국 솔로 플레이는 누가 봐도 자살 행위에 가깝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초조한 것은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조금 의외였던 것은 녀석이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녀석 나름대로 성장한 건지 아니면 1회 차의 가면 쓰레기 진청에게 통수를 맞은 기억이라도 떠올렸는지 몰라도, 만족할 만한 행보를 선보이고 있었다.
‘아주 좋지.’
드라마틱한 급 전개나 반전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선택한 것은 현재 라이오스를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
삼국 동맹의 결성을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 교국 이방인들의 결속에 힘을 쏟았다.
중형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라이오스를 들락날락거렸고 교국 8좌 회담을 직접 성사시키는 한편 왕국연합에서 체류하고 있는 이방인들을 규합하려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우리 현성이가 달라졌어요!
정신없이 싸돌아다니며 성과는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과제부터 차근차근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네 성장에 형이 눈물이 다 나올라 그런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다짜고짜 공화국으로 홀로 훌쩍 떠난 이후, 사태가 막장으로 치달은 이후에야 헬프를 치는 그림이 나왔을 수도 있으리라.
말재간이 없는 녀석이 많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자체는 충분히 아름답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 목적과 당위성이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 뻔하지.’
아마 적에 대한 대비거나 공화국 쪽에 압력을 놓기 위한 움직임.
내 입장에서는 전쟁이 터져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지만 김현성은 진청과 공화국을 따로 분리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건 김현성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교국의 삼자동맹 쪽에서 액션이 있다면 공화국 쪽에서도 액션이 있을 수도 있다.
공화국 쪽에서 진청을 버릴 생각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만약 현재 공화국이 흑마법과 여단에 완전히 오염된 것이라면 오히려 뒤통수를 때릴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현재 내가 필드에 나가 있지 않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이지혜의 말처럼 분위기가 묘한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큰 활약을 해준 박덕구 역시 꽤나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현성의 입에서 나온 여단이라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건지 항상 빼먹지 않은 훈련 시간을 더욱 길게 잡았다.
길드 마스터와 길드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박덕구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라이오스의 체류하고 있는 길드원들 역시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은 당연지사.
결과적으로 길드에서 몸이 편한 것은 박덕구를 제외한 빛의 영웅들이 유일했다.
정하얀은 하루하루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드디어 분리된 방을 얻게 된 한소라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잠깐의 평화에 나 역시 해야 하는 일들을 다시 본 것은 당연.
디아루기아와 함께 똘똘이, 막스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똘똘이와 디아루기아는 나름대로 만족한 것처럼 보였고, 막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정을 돌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보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한 일.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조금 더 긴밀히 파악하기 위해 연구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연구 기반이 전부 린델에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리 오랜 기간을 쉰 건 아니지만 확실히 좀이 쑤시기는 한다.
김현성이나 오스칼, 다른 길드원들과 프리스티나가 만족할 정도의 시간을 칩거한 이후에야 이제는 괜찮다는 의견을 내밀었고 복귀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의료진의 확답역시 받아냈다.
엘프들과 라이오스, 교국의 삼국 동맹이 복귀할 타이밍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엘프 왕국 에베리아의 공주. 엘레나가 라이오스를 방문하다.]
[베일에 둘러싸인 엘프 왕국 에베리아의 엘레나 공주가 라이오스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커다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에베리아의 사절단이 라이오스로 온다는 것은 이미 크게 알려진 소식이었지만 그 사절단 안에 엘레나 공주가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 편성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엘프 노예 문제나 이종족 차별 등으로 오랫동안 타국과의 교류를 삼가 왔던 에베리아가 이런 급진적인 행보를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 공주의 측근에 말에 따르면 이번 라이오스 악마 소환 사건을 이겨낸 신성교국의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비롯한 빛의 영웅들에게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힐 단계가 아니라 발언하며 논란을 일축했지만 에베리아 왕국 역시 이번 악마소환 사태에 대해 커다란 유감과 분노를 표시했다. 현재 에베리아 왕국은 교국과 라이오스의 동맹군의 호위를 받으며 오는 25일부터 31일까지 라이오스에 머무를 예정이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아주 좋네.’
아마도 이게 이지혜가 말했던 중요한 손님인 모양인 것 같았다.
슬그머니 내려다보자 쌓여 있는 기사들이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굳이 읽어보려 하지는 않았다.
기사의 내용 정도는 당연히 숙지하고 있다. 이쪽이 방금 읽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기사들은 전부 이지혜의 손을 거쳤으니까.
[악마 소환사 진청,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린델일보 박성경 기자.]
[라이오스 악마 소환사건의 전말. -교국신문 메를리아 기자.]
[어째서 공화국은 진청을 두둔하는가. 흑마법과 공화국의 오랜 역사에 대하여. -다완일보 천위 기자.]
[라이오스의 영웅이 된 빛의 영웅들,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어떤 사람인가. 바젤 교황님 특별 인터뷰 포함. -교황청 매거진.]
‘키야…. 이건 한번 읽어보고 싶네.’
당연히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도 눈에 띈다.
대충 기사를 집어 들자 훈훈한 내용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
이기영 명예 추기경은 모든 종교인의 귀감인 것은 물론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대륙을 위해 내리신 보물이라는 것.
바젤 교황이 나를 아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전해 들으니 괜스레 훈훈해진다.
‘바로 이거지. 아암. 그렇고말고.’
타이틀만 봐도 어떤 내용이 수록 되어 있는지 느껴질 정도의 편파적인 기사.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물론 흐뭇해진다.
엘프 공주인지 뭐시긴지가 이쪽을 보고 싶다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아, 하얀아.”
덜컹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정하얀. 바로 뒤에는 정하얀을 밀착 마크하는 조혜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1회 차에 그들을 가면 쓰레기 진청의 손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생겼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벌렸다.
“헤헤헤.”
“몸은 좀 어때?”
“그, 그, 그… 조금 전보다 괜찮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까지 아파서… 하복부가 콕콕 하고 쑤셔요. 막 누가 발로 차는 것처럼…. 심장도 아프고요.”
“그래? 오늘 일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볼까?”
“저, 정말요?”
“응. 어차피 일정도 길지 않으니까. 자, 이리와.”
다시 한번 말을 잇자 우다다 돌진해서 꼬옥 안긴다.
너무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의 표정이 떠올라 만날 때마다 한 번쯤은 꼭 안아주고 싶어진다.
‘더러운 가면 쓰레기 진청.’
자꾸만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세이프.
정하얀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앞을 바라보자 조혜진의 얼굴 역시 시야에 비쳤다.
슬그머니 말을 걸어오는 모습.
사실 무슨 말을 해올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수 백 번도 들었던 이야기였으니까.
“정말로 괜찮으신 게 확실한 겁니까? 부길드 마스터?”
“벌써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멀쩡합니다, 혜진 씨. 아니, 그리고 평소처럼 말하셔도 됩니다. 부길드 마스터는 조금 딱딱…”
“지금은 임무 수행 중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그리고… 아무리 건강을 회복하셨다고 한들 너무 무리하시는 건 위험합니다. 사실은 오늘 일정도 취소하고 싶었습니다만.”
“아. 그럴 수는 없지요. 이종족 연합을 동맹에 끌어들이는 첫 걸음이니까요. 엘레나 공주가 우리들을 보고 싶어 했으니 얼굴은 비춰주는 게 맞습니다. 사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고.”
“에베리아 측에서도 괜찮다고….”
“괜찮습니다, 혜진 씨. 절대로 무리하는 게 아닙니다. 하하.”
술자리에서는 그마나 부드러워지기는 하지만 확실히 공적으로 일할 때의 조혜진은 딱딱해도 너무 딱딱하다.
하지만 이 딱딱한 대화도 정하얀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모양.
서둘러 이쪽의 옷을 끌어당기며 관심을 자기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 이런 패턴을 많이 겪어봤지만 사실 쓸데없는 이야기가 대부분.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제법 흥미가 가는 소식이었다.
“오빠 그거 알아요?”
“뭐?”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엘프 공주가요. 영혼의 깨끗함을 구별할 수 있대요!”
뜬금없는 발언에 이상한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