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
회귀자 사용설명서 338화
후유증(4)
“정말?”
“네.”
“어디서 들은 이야기야.”
“라이오스 사람들이요.”
확신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자신감 있는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설득력 없이 들려온다.
물론 정하얀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시선을 끌기 위한 거짓부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진실을 판가름해 줄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은 당연.
이게 정말이냐는 듯 슬쩍 조혜진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사실입니다. 정확히는 저도 알지 못하지만… 하얀 씨처럼 들은 적은 있습니다.”
“네?”
“진실인지 아닌지 구별할 방법이 없긴 하지만… 가끔 엘프들 중에서도 특별한 개체는 그런 능력을 타고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영혼의 깨끗함을 구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선, 악을 구별하는 건지 그 차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사실 엘프에 대한 정보가 워낙 적어서 무엇 하나 정확한 바가 없을 겁니다. 특히나 하이엘프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하이엘프 말입니까?”
“네. 대륙인 사이에 전승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엘레나 공주가 몇 천 년 만에 태어난 하이엘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듯하게…. 아! 깨끗한 영혼을 바라보는 하이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교국의 동화책이나 설화에서도 종종 등장합니다.”
“아….”
‘이거 오히려 더 설득력 있어지는 데….’
이 대륙에서 동화책이나 전승, 설화에 등장했다는 건 터무니없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여긴 지구가 아니니까.
대부분의 동화책이나 전승 설화 같은 것은 실화를 토대로 한 것들이 많았고 실제로 그로 인해 발견된 던전이나 몬스터도 많다.
애초에 용도 있는 곳이니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영혼의 깨끗함을 바라보는 엘프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절대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거 왠지 걱정되는데….’
사실 캥길 건 없다.
이쪽은 이미 라이오스를 아니, 대륙을 구한 영웅 중에 영웅이다.
영혼의 깨끗함으로 선악을 판단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쪽을 매도한다는 상황 자체가 일어나기 힘들다.
생각해 보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었다.
빛기영의 마력은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고 칭호 역시 ‘대륙수호자’라고 박혀 있으니까.
일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라이오스를 구한 것도 사실 중의 사실.
어쩌면….
‘내 영혼이 조금은 깨끗해졌을지 누가 알겠어.’
최근에 한 착한 일을 손꼽아도 셀 수 없이 많다.
1회 차에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현재는 김현성의 품에서 빛의 진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은근슬쩍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지만 한 왕국의 권력자에게는 일단 잘 보이고 싶은 게 소시민의 심정이다.
결국에는 조혜진을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픈 척하는 건 지양해야 했지만 이 정도의 엄살은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혜진 씨, 혹시 여기 휠체어 있습니까?”
“네?”
“아무래도 갑자기 숨이 차서….”
“…….”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지만 조혜진은 일단 군말 없이 이쪽의 부탁을 들어주는 중.
잠깐 밖에 나간 이후에 휠체어를 끌고 나오는 얼굴은 왠지 모를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다.
아까 전 이쪽을 걱정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눈치챈 모양이다.
‘이 정도 오바는 해줘야지.’
영혼이 약간 더러울지라도 깨끗하고 숭고한 겉모습으로 승부를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콜록. 콜록.”
최근 너무 메소드 연기에 심취한 영향인지 뜬금없이 기침이 튀어나왔지만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혜진의 기척은 싸늘했다.
물론 걱정하는 듯한 정하얀의 표정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자 꽤 빠른 시간 안에 접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여는 라이오스 경비들의 얼굴에 이쪽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자, 휠체어에서 일어나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라이오스 특유의 인사법을 흉내 낸 이후 안으로 들어가니 뻘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소라와 박덕구가 보인다.
물론 김현성도 함께 자리해 있다.
이쪽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할지는 예상 못 했던 모양인지 조금 허둥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입니까? 기영 씨, 혹시 다시….”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성 씨. 잠깐 어지러워서 말입니다. 걷거나 움직이는 건 문제가 없지만 혹시나 에베리아의 사절단 여러분들께 못난 모습을 보일까 싶어 이렇게라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오스칼 님과 프리스티나 님과 함께하는 회담은….”
“이후에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에베리아 측에서 일단 기영 씨와 하얀 씨를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을…. 기영 씨, 이럴게 아니라 몸이 안 좋으시면 들어가 있으셔도 됩니다.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삼국동맹은 큰 문제없이 성사될 겁니다.”
“하하. 삼국 동맹을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거, 형님 갑자기 또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거요?”
“그런 거 아니다, 덕구야. 현성 씨께 말한 그대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괜찮다니까.”
여기저기서 걱정해 온다.
내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그림이다.
어째서 기업 총수들이 휠체어를 타고 등판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
아무튼 슬슬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엘레나 공주님 입장하십니다.”
반대쪽의 문이 열리며 몇몇의 엘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엄청 빨리 왔네.’
이쪽을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교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쪽이 정말 대륙을 구원한 영웅이 되긴 한 모양.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자 확실히 인간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인상이었고 걸음걸이조차 신비하게 느껴진다.
이전에도 엘프들은 본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이국적이고 신기한 외관.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얀색 면사를 쓰고 등장한 엘프.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만 봐도 저쪽이 엘레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곧바로 그녀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엘프 엘레나 에베리아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엘레나 에베리아]
[칭호-하이엘프, 에베리아의 공주.]
[나이-231]
[성향-호기심 많은 옹호자]
[직업-엘룬의 수호자-전설 등급]
[능력치]
[근력-19/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민첩-2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3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9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3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9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마력-9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특성-영혼을 바라보는 감각-전설 등급]
[상대방의 영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총평-전체적으로 몸이 약하지만 훌륭한 스탯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제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전설 직업, 엘룬의 수호자와 영혼을 깨끗함을 구분할 수 있는 전설등급의 특성이 눈에 띕니다. 물론 플레이어 이기영은 굳이 시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과는 뻔하니까요.]
‘아… 저거 정말이었잖아. 슈바.’
잠시 뜨끔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저 특성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른다.
설명 역시 굉장히 짧고 단순하다.
하지만 총평의 말에 급 불안해지기 시작.
그 와중에 면사를 벗은 엘레나의 외관을 보자 그 불안감도 조금씩 흩날려 가기 시작했다.
에메랄드색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
외관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종족 자체가 다르다는 이질감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미의 관점으로 봐도 그녀는 충분히 미인이었다.
‘미친….’
아니, 단순히 미인이라고 단어로 그녀를 정의할 수 없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개체를 보는 기분이다.
너무 멍 때리고 쳐다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정하얀을 바라봤지만 이쪽이 선물해 준 반지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잘 컨트롤하는 모습.
내가 내지른 프로포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들려온 것은 엘레나 공주의 목소리.
“반갑습니다, 여러분. 에베리아 왕국의 엘레나입니다. 이름 높으신 영웅 분들을 실제로 만나 뵈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마치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구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몸을 뒤쪽으로 빼게 된다.
아름답다고 인식한 뇌와는 다르게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서 거부감이 느껴졌기 때문.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을 때 가장 처음 인사를 건넨 것은 김현성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엘레나 역시 슬쩍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는 사이였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김현성에 대해 잘 파악하게 됐다고 한들, 뒷모습만으로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파란 길드의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부족합니다만 라이오스를 구한 영웅들이 몸을 담고 있는 길드의 마스터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란 길드!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라이오스를 지켜내신 영웅들이 몸 담고 계신 곳이었지요. 아… 역시나.”
“네?”
“네… 그렇군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가관.
아니, 심지어 뜬금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얼굴에서 보석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비주얼이다.
다만 김현성의 손을 잡은 이후 갑자기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확실히 당황스럽다.
‘뭔가 느끼고 있는 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영혼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다.
혹시나 김현성의 1회 차를 훔쳐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영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과 검은색 세계를 훔쳐볼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마음의 눈으로 본 설명 자체도 굉장히 단순하다.
내 눈이나 카스가노의 눈과는 다르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저도 모르게. 정말로 죄송합니다. 잠깐… 죄송합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대놓고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공식적인 자리이기는 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모임이었으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박덕구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혹시 영혼이라도 막 들여다보고 그런 거요?!”
“네?”
“거, 여기저기에서 그렇다는 소리가 들립디다. 하이엘프 공주님은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없다 어쩌고 저쩌구. 막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던데, 사실 내가 이런 걸 믿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우리 형씨 보고 갑자기 운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요. 뭐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알려주면 좋겠소.”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흐른다.
나 역시 박덕구가 저런 걸 대놓고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혹시나 외교적 결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한 마음에 그녀를 바라봤지만 딱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김현성이 살짝 눈치를 주자 박덕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
그 와중에 엘레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덕구 씨.”
“아… 내가 실수한 거요? 거, 미, 미안….”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김현성 님, 괜찮습니다. 오히려 대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직접적으로 그런 걸 물어보실 줄은 생각 못 한 터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굉장히… 순수하고 투명하시군요.”
“날 알고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여신의 거울로 봤을 뿐이지만… 실제 모습도 제가 상상했던 그대로군요. 후훗. 아, 질문을 하셨지요. 제대로 된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답변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요?”
“네. 물론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크게 비밀이라 할 수도 없으니까요. 음… 정확히 말하면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결례를 범한 것 역시….”
“현성이 형씨 영혼이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인 거요?”
“네. 그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 되겠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김현성 님. 본의로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지라.”
“아닙니다, 엘레나 공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불편하시다면….”
“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소. 영혼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우리가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눈으로 보듯이 느낀다는 거 아니요?”
“네. 적절한 표현입니다.”
“뭐, 그렇다면 상관없지. 큼. 오히려 이쪽에 잘된 일이지. 우리 형님의 투명한 영혼을 보면 아주 놀라 자빠지겠구만!”
왠지 모를 불안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자신감 넘치는 박덕구의 발언은 가관.
‘그만해, 이 돼지새끼야.’
녀석의 돌발 발언에는 슬그머니 한 발 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