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
회귀자 사용설명서 339화
후유증(5)
‘쓸데없이 기대감 증폭시키지 마.’
어째서 엘레나가 기뻐 보이는 얼굴을 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저 엘프는 타인이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박덕구는 냄새를 맡는다는 저렴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시각, 촉각, 후각과 같지만 다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굳이 예를 들자면 그녀는 지금 좋은 향기를 맡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촉감을 느끼고 있는 셈.
김현성에게서는 커다란 감동을 받은 것 같았고 박덕구에게는 순수하고 투명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장소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소라는 괜찮으려나.’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엘레나가 뭔가를 느낀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둘러댈 여지가 있고, 결정적으로 영혼과 직업의 상관관계를 감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정하얀과 함께 한소라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을 쳐놓은 상황.
심지어 그것으로도 모자라 카스가노 유노까지 합류하며 여러 정황을 은폐했다.
결과적으로는 고위 사제들조차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까지 와버렸다.
‘전설 등급의 특성이지만 확실히 애매하긴 하네.’
엘프 공주의 영혼 발언에 불안해졌는지 한소라가 살짝 이쪽을 바라봤지만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박덕구는 그녀와 함께 본격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거,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파란의 박덕구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박덕구 님. 엘레나 에베리아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으음.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거요?”
“네. 영웅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이름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요?”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말씀 드렸듯이 제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뿐입니다. 여러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왕국에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라는 것을 많이 접해왔기 때문입니다.”
“아아아. 그러고 보니 그 날 이후로 그런 게 많이 나오기는 했지. 그게 거기까지 닿았구먼.”
“사실 저희 왕국은 아직까지 교국과 라이오스의 물건을 반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여러분들에 관련된 이야기는 벌써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연극으로 만들어질 정도고 음유시인들은 여러분의 업적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죠. 그 날 여러분이 보여주신 희생과 기적은 단순히 라이오스뿐만이 아니라 저희 엘프들의 가슴속에도 뿌리 깊게 박혔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한 모습이었지요. 저는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제가 봤던 광경 중에 가장 찬란한 광경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 그렇게 말해주니 거 영광이요. 사실 내가 한 일은 거의 없지만. 크흠. 이거 괜히 부끄럽구만. 아, 여기 있는 소라 후배도 큰 힘이 되어 줬다니까. 아마 소라 후배가 아니었다면 나 혼자서 버틸 수 없었을 거요.”
박덕구답지 않게 쑥스러운 모양이다.
바로 눈앞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확실히 낯간지러울 만도 하다.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한소라에게 바통을 넘기는 모습은 가관.
아무튼 간에 박덕구의 소개 아닌 소개에 한소라도 앞으로 튀어나와 인사를 나눴다.
“한소라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소라 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한 것도 사실. 하지만 딱히 달라진 기색은 없다.
‘어?’
한소라가 개과천선하기는 했지만 이전에 알아주는 쓰레기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결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박덕구나 김현성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는데 제법 기뻐 보인다.
심지어 먼저 손을 잡아오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나도 나름 괜찮겠는데.’
적어도 한소라랑 비슷한 수준의 영혼은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니, 한소라보다는 이쪽이 낫다.
이기영 인생 26년,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타이밍.
오히려 박덕구 때보다 더욱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가슴 한편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한참이나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난 이후에는 정하얀의 차례.
김현성이 행사를 보는 진행자인 양 정하얀을 소개했고 다시 한번 어색한 자기소개 시간이 오고갔다.
“정하얀이라고 합니다.”
“여, 영광입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박덕구와 한소라 때도 충분히 기뻐 보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등장한 이후 그녀의 얼굴은 더욱더 가관.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아이돌을 만난 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얘 이거 설마….’
“어떻게, 몸은 이제 다 회복하신 건가요?”
“네? 아… 네.”
“그, 그것보다 정식으로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이미 계속 들어 알고 있겠지만 엘레나 에베리아라고 합니다. 정말….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들을 돌볼 수 있으셨는지…. 죽음을 각오하신 그 숭고한 모습은 대륙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이 대륙에 들어오신 지 2년도 안 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순수한 마력을…. 아! 이럴게 아니라,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어떤 것부터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드리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져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악수를….”
“괘, 괜, 괜찮지만….”
“영광입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역시 모든 게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거의 확실하네.’
착각이 아니다.
기품이 넘치는 얼굴은 여전하지만 묘하게 흥분한 모습이 마치 10대처럼 보인다.
200살이 넘는 나이로 저런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잔뜩 흥분한 채 정하얀의 손을 잡는 모습에 정하얀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엘프 왕국의 공주는 이쪽의 영웅담에 푹 빠져 있다.
사실 대부분의 라이오스인과 교국민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 여자의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더 심한 것 같은 느낌.
이쪽에 관한 기사나 잡지 인터뷰 같은 것은 모조리 독파한 것 같았고 심지어 여신의 거울로도 여러 번 그 장면을 봤다고 하니 내 예상이 맞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나마 라이오스인은 우리의 모습을 실제로 봐왔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그녀는 타국에게 배타적인 왕국에 틀어박혀 매체로만 이쪽을 접한 셈.
이쪽에 이상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그나마 라이오스인들 때문에 이런 경우에 적응을 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정하얀이 당황하고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해오고 있으니 안 그래도 인간관계에 서툰 그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박덕구의 부연 설명이 날아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우리 하얀이 누님의 투명하고 맑은 영혼에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니요?”
“맞습니다, 박덕구 님. 이토록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시다니. 이건….”
“역시 내 그럴 줄 알았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본래는 이런 말씀을 잘 드리지 않는 편입니다만 정하얀 님께서는 정말로….”
“역시 우리 누님이라니까. 역시 내가 말한 대로 아니오? 내가 살면서 우리 누님처럼 깨끗하고 착한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니까?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어떻게 이렇게 착한 사람이 다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엘프 공주님이 말하는 걸 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구먼. 거, 누님 옆에 있는 분이 우리 형님이요. 여신의 거울로….”
“네. 알고 있습니다. 얼굴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이기영 님.”
“아뇨.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감사의 인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의 인사라면 충분히 받았습니다, 엘레나 님. 애초에 감사를 받자고 한 일도 아니니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앞서 말씀드린 일들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예전에 엘프를 구출해 주신 적이 있지 않으셨는지요?”
“아!”
“조금 오래된 일이라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지만… 이기영 님께서 당시 고통 받던 저희 아이들을 구해주셨다는 소식을 분명히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었군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금 멀찍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와… 이게 이렇게 되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된다니까.’
남모르게 행했던 선행이 플러스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런 게 카르마지! 아암. 그렇고말고!’
애초에 이 엘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만큼 점점 더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에 말을 건네고 있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그녀가 내 영혼을 어떻게 느끼는지는 상관없지만 이쪽을 우러러 보는 표정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어 보인다. 잠시 걱정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지경. 이 휠체어도 준비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당시 이기영 님께 구원받은 저희 아이들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절단에도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 밖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는 터라. 둘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혹시나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직까지 걷기 힘드실 줄은….”
“콜록콜록. 괜찮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신 덕분인지 몸은 멀쩡합니다. 조금 호흡이 불편할 뿐입니다. 정말로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콜록. 사실 저 역시 실제로 공주님을 뵙고 싶었으니까요. 만약 공주님께서 제안해 주지 않으셨다면 먼저 공주님을 찾아뵈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악수 한 번….”
“네. 물론입니다, 엘레나 님.”
내 예상과는 다르게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뜻밖의 미담이 공개되자 다른 이들 역시 놀랐다는 표정.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프들을 위해 힘썼을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본래 미담이라는 건 전혀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밝혀져야 더욱더 효과적이다.
엘레나의 표정 역시 굳이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쁨으로 충만하다.
악마군주 벨리알의 역겹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악마들에게 역겹게 느껴질 정도로 신성하다는 표현이었던 모양.
엘레나가 한발 앞으로 몸을 옮겼던 그때였다.
“우웁.”
‘음?’
이쪽을 향해 귀를 팔딱거리며 팬심을 드러냈던 엘프가 갑작스레 인상을 찡그리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
“아.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으읍. 이런 실례를… 아, 왜 이러지. 이럴 리가. 우읍.”
‘아니.’
“우웁. 우웁.”
‘너 왜 그래. 슈바.’
“저, 잠깐. 우….”
‘아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우웨에에에에엑.”
이쪽의 계산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