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
회귀자 사용설명서 343화
양치기 소년(2)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끝난 이후, 곧바로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이쪽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엘레나를 진정시킨 뒤에는 왠지 모를 침묵이 장내에 감돌고 있었다.
“계시는 또 뭐고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각설하면, 형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요?”
박덕구가 입을 연 것은 당연.
정하얀은 또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김현성 역시 크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문 표정은 저번에 녀석이 보여준 표정과 완전히 같았다.
‘너무 열연이었나.’
갑작스레 엄청난 후회가 밀려든다.
아직까지도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엘레나 공주를 엘프 보좌관들이 데려갔고, 장내에 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안 좋은데….’
김현성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단 다른 분들은 잠깐 나가주시겠습니까? 기영 씨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괜찮으시다면 덕구 씨도 남아 주세요. 혜진 씨는 하얀 씨를 부탁드립니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해올 것 같은 느낌.
파란 길드원들은 물론, 사제나 오스칼까지도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굳이 박덕구를 남기는 걸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을 설득시키고 싶은 모양.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반갑지 않다.
“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일단은 계속 요청을 드리는 게 낫지 않겠소?”
“…….”
“…….”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일국의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 이쪽을 치료하는 걸 전담하겠어? 그녀가 원한다고 해도 에베리아 측에서 틀림없이 문제로 삼을 것이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현성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는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기영 씨.”
“현성 형씨 말이 맞다니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오. 무릎을 꿇든 아니면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보든 일단은 엘레나 님께 계속해서 치료를 받는 게 맞다니까?”
“쓸데없는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요.”
‘제기랄.’
일이 조금 복잡해졌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말을 걸고 있는 박덕구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엘레나를 이쪽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김현성은 계속해서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
뭔가 방도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답이 나오지 않는지 인상을 더욱 구겼다.
그야 김현성도 내 말에는 일정 부분 공감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자칫 잘못하면 삼국동맹 자체가 허사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확대해석이겠지만 아주 작은 계기로 틀어질 수도 있는 게 정치적 관계다.
“계속 머무르게 할 수는 없는 거요? 그 엘프 공주님도 남겠다고 하는데 문제될 일이 있소?”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잖아.”
“나는 간단한 문제고 뭐고 나발이고 모른다니까! 형님이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대수요? 교국 측에서 최소 몇 달간이라도 형님을 돌봐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하면 틀림없이 그쪽에서도 들어줄 거요.”
‘이 돼지 새끼가 진짜. 그만 좀 해.’
“끄윽….”
“이 돼지 새끼.”
“형님도 생각 좀 고쳐먹으쇼.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지금 뭐 다른 거 걱정할 시기요? 죽이든 밥이든 치료는 받아야지!”
“너, 이 새끼 진짜.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자리인 줄 알아?”
뭐라고 한마디 쏘아 붙이려고 하던 때였다.
김현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뇨. 굳이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기영 씨가 에베리아 왕국으로 함께 가시면 됩니다.”
“네?”
‘제기랄.’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 나올 뻔했다.
‘제기랄.’
“그러니까… 현성 씨 말씀은….”
“네. 에베리아 왕국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께 라이오스에 머무는 것을 요청드리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지만, 기영 씨를 에베리아 왕국으로 보내는 건 가능하니까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네. 물론 반가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실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기영 씨가 낫는 일이 그 무엇보다 최우선입니다. 그걸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국에 벗어나는 건 조금….”
“별문제 없을 겁니다. 기영 씨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그렇지만 이건….”
‘슈바. 무슨 개뿔 치료할 것도 없는데 치료하겠다고 이 난리야? 완전 망하게 생겼는데….’
커다란 거짓말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른다.
여러 문제에 머리가 지끈거린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똥줄이 타는 것만 같다.
차라리 동맹에 영향을 끼치더라도 억지로 엘프를 이쪽에 데리고 있는 것이 낫다.
가장 머리가 아픈 부분은 김현성과 떨어진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고 한들 아무래도 김현성과 떨어져 에베루아 왕국으로 가는 것 자체가 반갑지 않다.
내가 없는 동안 녀석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지. 암.’
당당하게 말을 꺼냈지만 분위기는 꽤나 싸늘했다.
“현성 씨,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기영 씨. 이곳에 남아 끝가지 상황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기영 씨의 건강이 최우선입니다.”
“정말로 괜찮은데….”
“아니, 어떻게 그 꼴을 하고도 그런 말을 하쇼! 내가 그런 말을 믿을 수 있겠소? 형님이 괜찮다고 말한 건 괜찮은 게 아니요! 물론 여러 가지 걱정이 많다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형님 몸이 최우선이오. 그게 맞지. 그게 맞소! 형님, 어차피 삼국동맹이 완성되면 에베리아 왕국도 곧 개방 될 테고 그러면 형님도 엘프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거요.”
‘제기랄!’
“아니, 정말로 괜찮다니까. 정말로 문제없습니다. 게다가….”
“아니요, 기영 씨. 이번만큼은 반론을 듣지 않겠습니다. 기영 씨는 무조건 에베리아로 갑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 전부 에베리아로 갈 예정입니다.”
“아니… 그게 도대체….”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정말 제정신인가?’
물론 나로서는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김현성과 달라붙어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의 개인적인 일들을 떠올려 보면 결코 녀석이 합리적인 결정을 한 거라고 볼 수 없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긴지 알고 있는 건가?’
대외적인 일도 대외적인 일이지만 김현성에게는 이제야 막 여단과 가면 쓰레기의 꼬리를 잡았다.
이미 몇 발자국 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발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그런 타이밍에 이쪽에 발목이 잡혔으니 어떻게 보면 짜증을 내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베리아로 함께 움직인단다.
‘진짜 뒤통수 여러 번 맞을 만하네.’
나와 가면남을 저울질한 이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
동료의 죽음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심한 느낌이다.
여러 정치적인 문제마저 뒤로하고 내게 시간을 쏟을 정도였으니 녀석의 호구성에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러니까 뒤통수 맞지….’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
아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최악은 면했다.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움직이는 게 백번 낫다.
심지어 그 마음마저 전해지고 있으니 속으로는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김현성에게 이렇게나 보호받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안전해진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현성씨까지 함께 갈 필요는….”
“아니! 그게 맞소! 형씨뿐만이 아니지. 다른 파란 길드원도 전부 함께 움직일 거요!”
“하지만 시국이….”
“일단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전부 잊어주세요. 몸을 회복시키는 것에만 주력해야 합니다.”
“…….”
“분명히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할 텐데.’
회복은커녕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엘레나가 무슨 짓을 해도 이쪽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표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눈치챌 텐데….’
큰 귀가 계속해서 착각 아닌 착각을 해준다면 다행이기는 하지만 혹시 사소한 트러블이라도 생긴다면 귀찮은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몸 상태가 계속해서 좋아지는 연기를 선보인다고 해도 영혼은 전혀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일단은 버티고 버틸 수밖에 없는 상태.
그 와중에 궁금한 것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김현성과 박덕구, 정하얀이 함께한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 어째서 길드원 전원이 가야 한다는 것인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로 내가 걱정되는 것이 맞다면 녀석 혼자 움직이거나 정하얀이나 박덕구만 붙이는 게 옳다.
파란 길드원 전부를 에베리아로 데려간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인력낭비요, 무리수.
당장 녀석이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부터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얼굴 속에 드러난 궁금증을 눈치챈 모양인지 조용히 입을 여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
“어쩌면 기영 씨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그건 대체….”
“그게 정말이요?”
“네. 물론 아직까지 명확하게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도 미지수고요.”
“형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단 말이요?”
“만약에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형님이 죽지 않는다 그거요?”
‘씨발….’
괜스레 불안감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추측이지만 영혼을 치유하는 샘 물을 툭 하고 떠와서 마셔보라고 권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딴 걸로 치유가 될 리가 없다.
종국에는 의심 엔딩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김현성과 함께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불안한 상황.
굳이 선택하자면 전자가 더 낫기는 하지만 차악이 최악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제기랄. 어떻게 해야 되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을 때 이쪽의 어깨를 두드리는 회귀자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다시 한번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영 씨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언제부터 내가 죽을병에 걸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표정은 내가 지금까지 본 녀석 중 가장 열의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 안 죽어, 이 새끼야.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