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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44화 (343/1,590)

# 344

회귀자 사용설명서 344화

양치기 소년(3)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 거라고.’

물론 이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지금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현성이 형씨 말이 맞소. 절대로 형님을 죽게 만들지 않을 거요.”

‘제기랄.’

“현성 씨, 발작은 잠시 뿐입니다. 그 외에 시간은 정말로 건강합니다.”

하도 구라를 치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내가 정상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느낌.

동화 속 양치기 소년의 심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쪽이 정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김현성과 박덕구의 눈에는 동료에게 짐이 되기 싫은 의인 정도로 비치는 모양.

솔직히 이쪽이 정말로 죽을병에 걸렸다면 모든 걸 걸고서라도 에베리아 왕국으로 향하고 싶다.

단언컨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에베리아로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만큼 이번에도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일단은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

어떻게 생각해도 에베리아 왕국으로 떠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는 만큼 너무 거절만 하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

‘방법이 있기는 있는 거야?’

확신에 찬 김현성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뭔가 방법을 가지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엘릭서 레시피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아마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소는 분명히 에베리아 왕국.

던전 보상이든,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든, 신화급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추측해도 될 것 같았다.

현재의 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정도밖에 없었으니 위처럼 생각하는 것이 맞다.

‘던전인 건가? 아니면 뭐 엘프들의 보물이라도 있는 거야?’

파티원 전원이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자일 확률이 크다.

물론 후자일 가능성도 충분히 높다.

후자를 얻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1회 차의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정보 중 비교적 정확히 들어맞는 게 던전의 위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확률은 더욱더 올라간다.

묘한 발언을 한 것부터가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암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에베리아 왕국, 세계수의 숲은 그 동안 이방인의 손길이 닿지 않았고 삼엄한 경비 때문에 그 안을 들어가 본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당장 하이엘프 엘레나만 하더라도 이쪽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능력이나 인간들의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그중 내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존재하리라.

우연의 일치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마침 딱 타이밍이 맞은 셈.

어쩌면 녀석이 삼국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간 것 역시 이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럴 듯해.’

물론 그전까지는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생각은 못 했겠지만 후유증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

마음속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물론 내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영혼의 상처 같은 건 개뿔 없었으니까.

머리를 부여잡자 이쪽을 곧 죽을 사람처럼 쳐다보는 모습은 가관.

현재 이들에게 나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게 아닌데….’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출발은 내일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너무 갑작스럽….”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해.’

“쉽지 않은 원정이 될 겁니다.”

‘그럼 그냥 집에서 쉬자. 현성아…. 제발 부탁이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라이오스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기영 씨가 신경 쓰실 일도 아니고요. 기영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국에는 유능한 사람이 많습니다. 저로서는 최대한 일과 멀어지는 것을 추천하고 싶지만 기영 씨가 원하신다면 계속해서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보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 이 새끼야.’

“형씨 말이 맞소. 오스칼님도 프리스티나님도 심지어 교황청에서 오신 분들이나 라이오스 사람들도 모두 열심히요. 형님을 걱정 끼칠 수 없다면서… 다들 우리와 똑같은 생각인거요.”

‘알겠으니까. 감동 좀 하지마.’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는지 말을 삼키는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대체 지가 말하고 지가 감동하는 건 무슨 상황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니 만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문제.

“하지만 에베리아의 허락은.”

“오늘 안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마 그들 역시 동의할 겁니다.”

지금으로써 믿을 수 있는 것은 에베리아가 이쪽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 하지만 거절할 리가 없다.

‘제발 거절해라. 가고 싶지 않아. 시발… 가고 싶지 않다고….’

기분은 복잡 미묘했다. 이쪽을 위해 이 모든 일들을 기획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이쪽에게 똥으로 돌아오게 될 거라는 사실은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꽤 괜찮은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물론 무리수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비벼볼만한 구석이 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습니다, 현성 씨.”

“네.”

“제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혹시나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는 일입니까?”

김현성이 잠시 멈칫 했다.

순진한 녀석답게 거짓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는 모양.

결국에는 숨을 내쉰 뒤에 말을 걸어왔다.

“위험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이거지!’

“백 번 양보해서 에베리아로 가는 것마저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현성 씨.”

“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성 씨.”

“그렇지만….”

“…….”

“…….”

“제 몸을 살리자고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이런 시기에 원정이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비상식적입니다. 현성 씨는 현성 씨 나름대로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다른 이들도 전부 마찬가지고요. 저는 파란 길드원들을….”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장에라도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나는 그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수 있소.”

“네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 구하려다가 엄한 사람 잡게 될 수도 있어. 물론 현성 씨와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맞아. 내 일은 그 다음이야. 적어도 확실한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이런 원정은….”

“가, 감수할 수 있어요! 히끅.”

쾅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

‘이건 또 뭐야.’

정하얀이다.

여태 눈물, 콧물을 질질 짰던 모양.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아니, 도대체 지금 무슨 드라마를 찍는 건지 물어보고 싶다.

심지어 그녀의 뒤 쪽으로는 파란 길드원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제기랄. 이건 또 뭐냐고!’

어떻게 보면 매우 감동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겠지만, 모든 게 거짓말인 현 상황에서는 싸구려 신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괜스레 내 볼이 붉어지기 시작.

왠지 모를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선희영, 항상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내왔던 안기모와 김예리까지 왠지 모르게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

김창렬과 유아영 역시 마찬가지.

사실 김창렬과는 그렇게 커다란 접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쪽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정하얀.

마도학자 황정연 역시 잘됐다는 듯 포근한 미소를 보내온다.

‘굳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이럴 필요는 없잖아. 이것들아….’

심지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마디씩 내던지기 시작.

손발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저도 괜찮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하하하.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요. 제가 이 길드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고 해도 함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도. 함께 해줄게, 기영 아저씨. 좋아하지는 않지만… 죽는 건 싫으니까. 그리고 별로 위험하지 않을 거야. 현성이 오빠가. 있으니까. 응. 우리도 이제 강하고.”

시동을 건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안기모와 김예리였다.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기영 님께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현재의 파란을 만드신 분이잖아요? 기영 씨와 함께 연구하는 건 제 삶의 낙 중에 하나인데 그걸 빼앗길 수는 없죠.”

선희영과 황정연 역시 말을 걸어온다.

마음은 고맙지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진다.

이 신파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럽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부길드 마스터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 주신 은인이세요. 이번에야말로 도움이 되고 싶어요.”

김창렬, 유아영도 나름대로 결연한 표정이다.

차라리 조혜진처럼 애매모호한 얼굴이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 것 같았다.

한소라는 누가 봐도 함께하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분위기에 탑승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한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히끅. 히끅.”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푹 안기는 정하얀은 덤.

쟤는 도대체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엘레나 공주까지 눈물을 훔치고 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싸구려 신파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파란뽕을 치사량으로 들이켠 박덕구와 김현성이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절대로 죽게 만들지 않을 거요. 절대로.”

“결정된 것 같군요. 보세요. 기영 씨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긴 뭐가 혼자가 아니야.’

기왕이면 이 자리를 뜨고 싶다.

하지만 너무나도 진지한 이들의 얼굴 때문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 한 방울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완벽에 가까운 외통수.

조금 더 생떼를 부리고 싶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말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무척이나 감동받았다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모두들… 너무 감사합니다.”

대외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시점.

커다란 거짓말에 낚인 원정대가 이쪽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엘프들의 터전으로 첫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역사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빛의 영웅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원정을 떠난 용사들로 말이다.

‘이제부터 거짓말은 자제해야겠다.’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이번까지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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