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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45화 (344/1,590)

# 345

회귀자 사용설명서 345화

양치기 소년(4)

사실 최후의 저항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만큼 모든 일이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됐다.

바로 다음날 원정을 떠나겠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닌 모양.

모임이 끝난 이후에 곧바로 원정 준비를 하러간 길드원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물론 길드원들의 고생 때문에 흘러나오는 눈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쪽을 궁지로 몰아넣은 길드원들은 조금 더 고생했으면 싶은 게 솔직한 심정.

혹여나 엘프들이 이쪽의 에베리아 행을 거절하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것마저 무참히 무산됐다.

엘프 쪽에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

정말로 우리 파티가 원하는 걸 직접적으로 물어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 그래도 엘레나 공주 때문에 근심거리가 생긴 엘프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소식이었을 것이다.

물론 루드비힌가 뭔가 하는 엘프는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엘레나 공주의 격한 주장 끝에 미약한 반대파 여론은 무참히 박살 났다.

삼국동맹 역시 무척 원활하게 진행된 것은 당연지사.

엘프와 더불어 하루라도 더 시간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오스칼과 프리스티나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각국의 지도자들마저 이쪽을 에베리아라는 구렁텅이로 처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모든 게 물 흐르듯 해결되었다.

신성교국과 라이오스 왕국, 에베리아 왕국이 복잡한 서류에 지장을 찍는 속도는 태세전환을 하려고 기를 모으는 내 행동보다도 빨랐고 그 결과 모두가 만족스러워 했다.

누구에게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동맹이었다.

[삼국동맹 성사, 이종족 간 화합의 첫 번째 발걸음.]

[오는 26일, 신성교국과 라이오스 왕국, 에베리아 왕국의 동맹이 성사됐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유연하게 동맹이 성사된 것에 각 국의 지도부들은 크게 만족을 표시했다. 특히나 지금껏 인간들에게 배타적이었던 에베리아 왕국의 변화에는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라이오스의 왕성에서 열린 대회에서 삼국동맹 선언문이 낭독됐고 민중들의 환호성 속에 새로운 이상향 속에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은 ‘이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이종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커다란 디딤이다’라는 뜻을 밝혔고 에베리아의 대사 루드비히 또한 엘프와 인간의 화합에 중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삼국동맹은 악마소환사 진청을 보호하고 있는 공화국을 규탄하며 대륙의 흑마법의 멸절에 함께해 줄 것을 호소했다. 아직까지 말을 아끼고 있는 공화국의 이후 행보에 모두가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삼국동맹은 29일 정식으로 대륙재판소에 이번 일을 회부할 계획이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제기랄.’

서류에 도장이 찍히고 기사가 나오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내용도 무척 만족스러웠고 대륙재판소에 이번 일을 회부시킬 계획도 마음에 들었지만 불만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토록 빨리 끝낼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동안 지연해 왔는지 묻고 싶을 정도.

조항 하나하나를 교국과 라이오스가 양보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걸 또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엘프 측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위 아더 원이 된 이상한 상황에 쓴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 보면 이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삼국을 하나도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출발할 시간입니다, 기영 씨.”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고 싶건만 김현성은 나에게 작은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벌컥 문이 열리며 등장한 녀석이 슬쩍 이쪽에 손을 내미는 모습이 괜스레 미워 보인다.

“함께 가시죠.”

“네. 준비는 어떻습니까?”

“준비는 완벽합니다. 길드원들의 상태도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것 같고요. 특히나 덕구 씨를 중심으로 참 열정적입니다. 원래 열정적인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열의가 넘칩니다.”

‘박덕구 이 새끼가 제일 나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네….”

똑바로 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한쪽 팔로 지탱해 주는 모습은 가관.

내가 힘이 없는 이유가 아프기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김현성은 내게 힘을 주려 노력했다.

괜스레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나 안 아파. 사실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지금 와서 외쳐본다고 한들, 양치기 소년의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머릿속에는 나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없는 모양이다.

계속해서 발을 옮기는 와중에 이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는 이들이 보인다.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쫙 퍼져 있는 것이다.

파란 길드가 빛의 영웅 이기영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소문의 근원지가 도대체 어디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높은 확률로 박덕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자 왕성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길드원들과 엘레나, 또 각국의 주요 인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희라 누나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 오스칼과 프리스티나까지.

교황청의 인사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새벽부터 이쪽을 기다린 모습이었는데 한 명씩 한 명씩 인사를 주고받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최근 뭔가 저기압인 것 같은 차희라는 막상 이쪽을 바라보자 슬그머니 다가와 등을 두드렸고 카스가노 유노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스칼이 뭔가 덕담 비슷한 말을 던지기는 했지만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교국의 고위사제나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하기는 마찬가지.

물론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는 씁쓸함이 담긴 미소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사실 오히려 그런 표정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았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이지혜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눈물을 훔치는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쟤도 진짜….’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엘레나가 이지혜를 본다면 구토는 물론이거니와 토혈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사실 조금 더 이쪽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원정에 나서는 것은 파란 길드원뿐이다.

김현성이 다른 이들의 참전을 극구 만류하기도 했고 솔직히 그 결정은 나도 동의하는 부분.

우리가 에베리아에서 원정을 마치기 전까지 필드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초상집 분위기.

하지만 왠지 모를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원정의 책임자인 김현성에게도 끊임없는 독려가 쏟아졌고 원정대는 한 발 옮기기 위해 왕성의 문을 열었다.

‘아, 진짜 이러지 마. 이건 또 무슨 신파야.’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장관이자 가관이라 할 수 있는 모습.

‘제발 이러지 마. 내 양심을 공격하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사실 양심은 멀쩡했다.

끝없이 이어진 라이오스 주민들의 모습이야 저번에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함성이 아니다. 무척이나 숙연한 분위기다.

솔직히 평소 같았으면 기분 좋았을 광경이었건만 왠지 모르게 힘이 잘 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모인 모습을 보고서는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다르다.

하나같이 손을 흔들며 이쪽을 응원하는 모습이 마치 벌 받을 때가 왔다고 외치는 지옥의 악귀들처럼 보인다.

“저번보다 더 모인 것 같은데? 대단하구만….”

“네.”

“역시 형님이오.”

옆에 있는 박덕구는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정하얀은 고개를 끄덕인다.

김현성은 여전히 내 옆에 딱 붙어 발걸음을 옮기는 중.

자꾸만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들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히, 힘내세요.”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디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라이오스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매일매일 기도드리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라이오스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거예요. 꼭 다시 한번 들려주세요.”

“희망을 잃지 마세요. 저희도 이기영 님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부디 희망을 잃지 말아주세요.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이기영 님이라면 틀림없이 이겨내실 겁니다!”

솔직히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우리 원정대가 지나가는 길목을 제외한 모든 장소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집안 창문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붕에 올라가 있는 이들도 보인다.

공통점은 모두 눈물을 장착하고 있다는 것.

라이오스의 경비병들이 인파를 통제하기 힘들어 보일 정도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어떤 꼬마 하나가 대열에 이탈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경비병들이 꼬마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지만 이 와중에도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저주받은 두뇌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

슬그머니 경비병을 저지하자 꼬마 하나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편지 한 통과 초콜릿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준다.

[고맙습니다, 빛의 용사님. 엄마 아빠를 구해주시고 저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꼭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봤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였다. 글자 크기도 서로 달랐지만 꼬마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똑바로 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건 좀 강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앙증맞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힘내세요! 힘내세요!”

“이름이 뭐니?”

“레아, 레아예요. 꼭 건강해지셔야 해요, 용사님!”

“고맙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다시 한번 씁쓸함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이쪽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살짝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 광경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니 작품이었구나.’

“모두가 기영 씨의 몸이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모습들을 보세요. 기영 씨를 응원하는 이들이 저렇게나 많습니다.”

‘나도 보인다. 현성아.’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기영 씨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잃은 적도 없어….’

“다 안심하쇼! 형님은 우리가 꼭 정상으로 되돌릴 테니까! 다들 안심하쇼! 끄윽….”

“부탁드립니다, 박덕구 님!”

“믿으라니까!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니까! 형님을 꼭 구할 거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기영 님!”

그 와중에 박덕구가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니 다시 한번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박덕구는 왜 눈물을 흘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녀석이 자꾸만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환호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길드원들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이 깃든다.

‘제기랄.’

“갑시다, 여러분.”

“네, 길드 마스터.”

목표가 있는 집단은 강하다.

한 단계 성장한 파란 길드원들과는 다르게 속에서는 자꾸만 불안감이 피어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응원의 소리만큼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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