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
회귀자 사용설명서 356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3)
‘좋아. 괜찮아.’
방금 뭔가 지나간 것 같았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엘레나의 반응이었으니까.
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정상이 된 내 모습에 크게 안심했는지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놀란 것이 눈에 보일 정도.
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에메랄드 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이쪽을 챙기는 게 더 급하다고 생각한 모양.
곧바로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괜찮….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엘레나 님.”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갑자기 든 생각치고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반응을 보니 결과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진다. 조금 충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메리트는 분명히 존재한다.
전설 등급의 직업과 전설 등급의 특성.
마력과 행운 능력치는 90이상.
하이 엘프의 종족 특성과 이후 에베리아 왕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되는 인재.
예전이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쪽으로 데려오려 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살림살이가 나아졌기 때문에 인재에 크게 목을 매지 않았지만 이만한 이를 소환수로 들일 수 있다는 건 리스크를 짊어질 이유가 된다.
아주 쉬운 방법으로 주사위가 던져졌다. 기왕 결심하고 움직일 거라면 확실하게 하는 게 낫다는 거다.
천천히 입을 열자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제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거나….”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네. 네…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상태는 좀 어떠신 것 같으십니까?”
“글쎄요. 평소보다 조금 더 편안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네.”
“그렇… 군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네?”
“방금도, 또 이렇게 함께해 주신 것 말입니다.”
“아… 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엘룬 님의 계시라는 게….”
“네.”
“정말로 있는 모양입니다.”
“…….”
“사실 저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조금은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엘레나 님.”
“네? 알고 계셨….”
“물론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진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고… 제게 주어진 역할이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
“엘레나 님이 엘룬 님께 저를 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니… 어쩌면 제가 이 대륙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 더 있나 봅니다. 라이오스에서 있었던 일보다 더욱더 중요한 일 말입니다. 하하. 콜록. 콜록.”
“이기영 님!”
황급히 두 손을 잡아오는 꼴은 가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는 표정 역시 여전하다.
“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엘룬 님께서 명예추기경님을 도우라고 명하신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그리고… 네. 저와 이기영 님을 만나게 해주신 다른 이유 역시…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저렇게 생각하겠지.’
“다른 이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요.”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뭔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은 많은 생각이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사실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게 당연하리라.
‘남자 손이나 제대로 잡아본 적 있겠어?’
200년 가까이 숲속에 처박혀 있던 엘프다.
애초에 남녀 관계에 굉장히 무지한 것 같이 보였던 캐릭터였다.
악수를 하자며 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잡아오거나 치료를 위해 가슴에 손을 올리는 행동에 그다지 위화감을 못 느끼는 것이 그렇다.
지금까지의 치료 행위가 이성 간의 접촉이었다는 건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방금과 같은 조미료와 설정이 추가되면 또 내용이 달라진다.
‘혹시 엘룬 님에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라든지.
‘이분과 만나게 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든지.
이처럼 한 번 인식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치료 행위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뜻.
꿈 많은 소녀에게 신의 뜻이나 운명이라는 소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소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이 나와 엘레나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말보다 더 달콤한 말은 적어도 이 대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륙에 유통되는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사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신의 뜻, 계시와 인도, 운명 따위라는 걸 생각해 보면 답은 뻔히 나온다.
상상으로도 이런 개소리들이 먹히는 배경일 터인데 심지어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엄연한 현실.
180도 달라진 모습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분명히 이쪽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할 수 있겠는데.’
빠르지만 견고하게 관계를 구축한 이후에는 머릿속에 여러 가지를 쑤셔 넣기 쉬워진다.
아니, 심지어는 쑤셔 넣을 필요도 없다.
잘만 하면 그런 작업 없이도 원만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
어디에선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달려있는 작은 창문 사이로 한 쌍의 눈이 보인 것.
정하얀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등 뒤를 뱀 한 마리가 훑는 감각이다.
‘제기랄.’
잠깐 뜨끔하기는 했지만 가마에서 천천히 얼굴을 떼는 정하얀을 보자 그녀가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뭔가 걱정하는 표정을 보니 이쪽도 사람인지라 양심이 찔려오기는 한다.
‘더 잘해줄게, 하얀아.’
쓸데없는 다짐이기는 했지만 잠깐 동안 올라온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는 것이 당연.
지금은 일단 눈앞에 들이닥친 똥부터 해결해야 한다.
계속해서 무릎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콰득!
콰아아아앙!!!
“꺄아아아아아악!”
처음 들려온 것은 커다란 목소리.
귀가 깨질 듯이 울리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마에 커다란 충격이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작은 창문으로 바깥을 쳐다봤지만 파티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디론가 굴러 떨어지고 있는지 몸이 작은 가마 안을 정신없이 부딪치고 있다.
엘레나와 몸이 뒤엉킨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든 몸을 고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주문을 외우기도 쉽지가 않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야. 씨발!’
엘븐나이트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가마꾼들이 뭔가 사고를 친 것이 분명하다.
혹시나 정하얀이 사고를 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걔가 이쪽에 해를 끼치는 장면은 몇 백 번을 시뮬레이션 해도 상상하기 어렵다.
엘레나를 죽이면 죽였지 마차를 날려 버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사고가 터진 거야.’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방심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
엘프들이 어리버리하게 움직일 때부터 뭔가 일이 꼬일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다.
김현성이나 정하얀이 현재 이쪽을 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투 중이거나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아예 가마 째 고립되어 버릴 가능성도 존재한다.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게 오히려 독이 된 상황.
소리까지 막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이 가마가 워낙 튼튼하다는 점이겠지만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꽤나 깊숙한 곳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수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꽂히는 것이 당연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제… 기랄!”
콰득!
쾅!
콰드득!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
여러 소리를 내며 가마에 외부의 물체와 부딪치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안전을 위해 미리 걸어놓은 마법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부서져 버렸을 것이다.
‘부유 마법도 안 걸어주는 건가?’
정하얀이나 황정연, 한소라 같은 마법사들이 이쪽을 캐치할 여력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김현성도 달려오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창문 사이로는 더 이상 빛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
필사적으로 엘레나를 끌어안고 손뼉을 튕기자 용의 꼬리가 나와 엘레나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차 외부에 있는 보호 마법이 우릴 보호해 주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존재하는 만큼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최대한 마련해야 한다.
‘제기랄. 제기랄.’
콰앙 하는 굉장한 소리가 들린 순간 몸을 움찔거렸지만 소리에 비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애초에 마차가 부서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
도대체 방어 마법을 몇 중첩이나 걸어놨는지 모르지만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한 보람이 있다.
‘우리 마법사들이 유능하기는 하네.’
내부에도 충격 완화를 걸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가마 안을 굴러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멍조차 들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살짝 캐스팅을 외우자 작은 빛과 함께 주변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애매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자 이쪽을 꽉 껴안은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움찔 움찔 귀를 움직이는 것을 보니 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잘 진행되고 있는 원정이 어떻게 이렇게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괜스레 입술을 깨물었을 때 곧바로 이쪽에 얼굴을 바짝 붙인 엘레나가 천천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표정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이, 이기영 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된 일인가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뭔가에 충격을 받고 떨어진 것 같은데….”
“여, 여기는 어딘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깥에도 보이는 건 없고… 일단은 바깥 상황을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 일행과 멀어졌을 때를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고립됐을 가능성이요.”
“그런….”
“일단은.”
이곳이 어디인지, 함께 떨어진 이들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
김현성이 선물해 준 무한의 가방을 뒤적여 곧바로 용 숨결 물약을 꺼내들었다.
혹시 모를 상황이 존재하는 만큼 몸을 빼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엘레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일단은 천천히 가마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 동공의 부피가 꽤 커다란 모양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
혹시나 이쪽을 구하러 온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눈에 보인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
‘제기랄.’
심지어 살아 있지도 않다.
시야에 비친 것은 상반신만 남은 채 추락한 엘프의 시신.
“이거 큰일 났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