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회귀자 사용설명서 357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4)
분명 가마를 끌고 있었던 엘룬 나이트 중 한 명이었다.
떨어진 충격 때문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마음의 눈이 우리와 함께 있었던 그 엘프라 말해주고 있었다.
‘원래 있던 곳에서부터 떨어진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내가 모르는 사고가 있었고 원정대가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하나.
그 외에는 모든 게 불분명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마차 안에 처박혀 있었던 나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후위에는 누가 있었지?’
파란 길드는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가마에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은 후위면서도 접근전이 가능한 안기모와 이 가마를 끌었던 엘프들.
이 불쌍한 녀석 역시 이런 모습이 된 걸 보니 아마 사고는 뒤쪽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
‘안기모는 무사한 건가?’
이곳으로 함께 떨어지지 않았다면 무사하다고 봐도 될 것 같지만 혹시 중간에 걸렸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다른 길드원들 역시 떨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면이 무너지기라도 한 건가.’
별별 상상이 다가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것.
어찌 됐던 간에 던전 내에서 고립된 것이라면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전설 등급의 던전.
몸을 지켜줄 수 있는 전위도 없고 보급품 역시 한정되어 있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탓이다.
일단 소지품을 점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가지고 있는 게 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대용 연금키트.
‘이건 맨날 가지고 다니는 거고….’
약 5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식수.
‘아껴 먹으면 20일은 먹을 수 있어.’
디아루기아 촉매.
‘이건 넉넉하게 챙겨왔고.’
전설 등급의 체력 물약 10병. 그 외 잡다한 촉매와 재료.
‘조금 부족해….’
기본적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역시 문제는 몸을 지킬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린델에 꼭꼭 처박아둔 율리에나가 괜스레 그리워진다.
잠에서 한 번 깨어나게 한 이후에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일이 없어 놔두고 다녔던 것이 통한의 실수.
‘돌아가면 다시 가지고 다녀야겠네.’
최근 좀 물렁하게 지냈다는 자기반성도 해본다.
괴물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자기발전에 너무 소홀했던 것도 사실.
필드에서 뛰다 보니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근 나태하게 지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지금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고개를 한 번 흔든 이후에 곧바로 엘프의 품을 뒤적거린 것은 당연지사.
혹시나 쓸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제법 꼼꼼히 뒤져봤지만 그나마 건질 수 있었던 것은 허리춤의 단검 하나.
사실 사용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개털이네.’
“이, 이기영 님.”
다시 한번 천천히 주변을 살폈을 때 들려온 목소리.
돌아오지 않아 불안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계신 겁니까? 명예추기경님.”
“네, 엘레나 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겨 마차로 돌아가니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엘레나가 시야에 비쳤다.
귀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공포에 질린 것 같다.
그나마 나를 보자 안심했는지 숨을 몰아쉬었지만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튜토리얼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사람들을 보는 것만 같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치에 비해 실전 경험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귀찮은 짐이 생겨 버린 셈.
“바, 밖은 조금 어떻습니까?”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현재 저희가 있는 장소도 알 수 없고 주변에 보이는 게 없어서…. 일단 마차의 보호 마법이 유지될 때 까지만이라도 원정대를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무사하다면 이곳으로 내려올 테니까요.”
“네. 명예추기경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금방 찾으러 와주시겠죠. 네. 분명히요.”
‘나도 그렇게 쉽게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명예추기경님.”
“네.”
“만에 하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시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은 경우에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찾아올 겁니다.”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길드원들이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싫을 뿐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김현성이 이런 곳에서 리타이어한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그 두 명이 살아 있다면 던전 공략보다는 이쪽을 찾는 걸 선택할 것이 분명.
나와 엘레나가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알고 있을 테니 원정대를 정비한 이후에 곧바로 이곳으로 향하게 되리라.
‘수습하기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네.’
정하얀이 울고 불고 난리칠 걸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그 현장에 없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 모두가 정하얀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을 게 뻔하다.
‘아네모네의 눈이 안 보이는 건 조금 그렇기는 한데….’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전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정하얀의 스토킹 카메라는 사정거리가 길지는 않으니까.
“문제는 그동안 저희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겠죠. 지금 당장은 안전하지만 언제 몬스터들이 달려들지 모르니까요. 가마에 걸려 있는 보호 마법이 계속해서 유지되면 좋겠지만 아마 길어야 하루일 겁니다. 식량도 넉넉하지 않고요.”
“얼마나….”
“아껴도 10일 정도면 바닥날 겁니다.”
“그런….”
“일단은 최대한 아끼면서 버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엘레나 님께서도 따로 짐 같은 건….”
“제, 제 짐은 모두 루드비히가 관리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보다.”
지면이 갑자기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바로 그때.
“…….”
눈앞에 있는 엘레나가 갑작스레 숨을 죽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미묘한 감각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문을 열고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것은 당연지사.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지면이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위, 위험합니다. 이기영 님.”
“지금 이거…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네?”
“지면이 통째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분명히요.”
아니.
단순히 움직이는 게 문제는 아니다. 잠시 후에는 굉음과 함께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시발. 이거 혹시.’
서둘러 엘프 시체가 있던 곳으로 달려간 것은 당연지사.
뭔가 찜찜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반신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시체는 아까와 별 다를 게 없어보였지만 단면이 무척 신경 쓰인다.
깨끗하게 잘리거나 힘에 의해 찢겨진 것이 아니다. 레인저처럼 흔적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마치 거대한 스테이플러로 물어뜯긴 모양새. 표면이 거친 것은 물론 이상한 타액까지 묻어 있다.
[살리트의 타액-준신화 등급]
[연금술의 촉매로 활용할 수 없는 소재입니다.]
‘제기랄….’
마음의 눈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
조금이라도 행복회로를 돌리고 싶지만 마음의 눈으로 둘러본 광경은 다시 한번 내 기대를 배신한다.
[살리트의 위장-준신화 등급]
‘시발.’
[살리트의 위장-준신화 등급]
어느 곳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곳은 변함이 없다.
‘먹힌 거야.’
지금 나와 엘레나가 떨어진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몬스터의 위장이다.
저 엘프는 이빨에 뜯겨 상반신만 넘어온 것이 분명.
하반신은 이 사이에 끼어 있거나 아직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와 엘레나가 타고 있었던 가마는 운 좋게 곧바로 이쪽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빠져나가야 해.’
이곳에 있다가 소화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박덕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일 터.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간 그전에 녀석에게 소화되게 생겼다.
“엘레나 님, 밖으로 나오세요. 지금 바로 이동해야 될 것 같습니다.”
“네?”
“현재 저희가 있는 곳이 몬스터의 뱃속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지금 있는 장소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 무슨….”
“설명은 이동하면서 드리겠습니다.”
내 목소리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나오는 엘프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그야 몬스터의 뱃속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하리라.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다.’
당연하지만 이 몬스터의 기관은 인간의 완전히 다르다.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디아루기아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뭐라도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더 편한 것은 당연.
물론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디아루기아 신체 탐방이 의외의 곳에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디아루기아의 기관은 섭취한 모든 것을 마력으로 분해해 체내로 전달한다.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녀석 역시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준신화 등급의 몬스터.
대부분의 일반, 희귀 몬스터들의 소화기관보다는 조금 더 상위의 기관으로 움직인다고 추측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서둘러 사방을 살펴본 것은 당연지사.
분해한 에너지를 체내, 특히 심장 쪽으로 전달하는 기관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워낙 넓어 꼼꼼히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
하지만 마력이 흐르는 곳은 분명히 존재한다.
“엘레나 님,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혹시나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
“엘레나 님?”
“…….”
“엘레나 님!”
“아… 네, 네! 이기영 님. 방금 뭐라고 말씀….”
‘아…. 얘 맛탱이 간 것 같은데.’
무리도 아니다.
갑자기 몬스터의 뱃속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저렇게 반응할 것이다.
오히려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지 않는 게 용하다. 순간적으로 버릴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 뭐라도 할 줄 아는 사제가 하나 있다는 건 무조건 도움이 된다.
천천히 그녀의 손을 움켜잡자 움찔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귀는 파들파들 떨고 있었고 예상대로 공포감에 휩싸여 있다.
화를 내기보다는 달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은 순식간.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입을 열자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보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나 님.”
“아… 네… 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까요.”
“…….”
이런 손발이 없어지는 소리도 이제 제법 적응이 된다.
물론 방금 대사는 거짓말.
실제로 위기가 닥친다면 버리고 갈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런 대사라도 해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한번 손을 잡자 그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아직 눈은 공포에 질려 있지만 무언가 결심한 모양인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닙니다. 제, 제가… 설사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기영 님만은 반드시. 반드시….”
‘그래. 그런 마음가짐 좋다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둘이서요.”
“네. 둘이서.”
“그럼.”
“저… 명예추기경님.”
“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계속해서 손을 잡고 계신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혹시나 또 발작을 일으키실지 모르니까요.”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얘는 진짜 너무 쉬운데.’
묘하게 붉어진 얼굴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평범하게 잡고 있던 손을 돌려 꽉 하고 깍지를 끼우자 조금 긴장한 듯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