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
회귀자 사용설명서 359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6)
“살아 있을 거요. 누님도 분명히 살아 있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분명히 살아 있을 거요. 암! 그렇고말고.”
“…….”
“거… 표정 좀 푸쇼. 무, 물론 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누님이 그렇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분명히 무사할 거라니까! 형님이 거, 옛, 옛날부터 바퀴벌레 같은 면이 조금은 있었다는 거 아니요. 우리 형님은 사막에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이요.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틀림없이 뭔가 방법을 찾았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까…. 틀림없다니까? 무조건 무사할 거요. 무조건. 아암. 그렇고말고.”
“…….”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두들 평소 같지 않다.
계속해서 괜찮다는 듯 입을 열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박덕구 님의 모습도 그랬고 평소답지 않게 멍한 표정을 유지 하고 있는 선희영 님도 그랬다.
물론 가장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
누가 봐도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비집고 나오는 살기 때문에 주변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최소한 기억에는 없다.
물론 나는 주로 정하얀 님과 부길드 마스터와 함께 다녔기에 길드 마스터와는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동기인 유아영이나 창렬 오빠에게 들어 왔으니까.
평소에 무표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부길드 마스터나 조혜진 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간혹 미소를 짓기도 했고 자신이 길드에 막 입단 했을 때에는 웃음으로 마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을 닫아버리는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모양.
이틀 전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도 내뱉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히 화가 났다는 수준을 넘은 것이 분명하리라.
이번 원정에서는 제법 많은 모습을 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심지어 엘프 쪽의 리더와도 말을 섞지 않고 있으니 어느 정도로 분노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에게 사고의 책임이 있다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굳이 몇 명을 꼽자면 부길드 마스터와 엘프 공주가 타고 있는 가마를 지키던 엘프들 이었으니까.
회피하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검을 뽑아든 것은 엄연히 그들의 잘못이다.
아마 보잘 것 없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멍청해.’
종류는 다르지만 마치 예전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부길드 마스터의 침식 속도가 빨라진 이후, 원활한 공략을 위해 엘리오스를 제외한 다른 엘프들이 후방 경계를 맡은 것은 물론 구경꾼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들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문제는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 게 이 던전의 네임드 몬스터였다는 것.
땅 속에서 튀어나와 가마를 삼키고 몸을 내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는 우두머리 엘프의 가까이로 다가간 조혜진 님이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 마스터께서는 현재… 상심이 크신 것 같아. 원정 내용에 관해서 의견을 주고받으실 상태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나 원정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제가 직접 말씀을 전하거나 할 수 있는 내에서 합의점을 찾아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엘리오스 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엘레나 공주님 역시 함께니…. 지난 일에 대한 질책보다는 최대한 서둘러 네임드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진입하는 게 최우선 과제일 것 같습니다. 휴식시간은 최소한으로, 길드 마스터를 중심으로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주어진 보급품의 범위 안에서 틈틈이 개인적으로 식사를 해주시고 수면 시간 역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가 급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살아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부길드 마스터가 그런 곳에서 죽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실제로도 살아 있기는 했지만….
‘그 인간이 죽을 리가 없지.’
절대로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죽어서도 안 된다. 만약 부길드 마스터의 몸에 해라도 생긴다면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는 저 사람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려 애써 다른 곳을 쳐다보려고 했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또한 괜스레 조심스러워진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누가 봐도 정상 같은 상태가 아닌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고 어딘가 불편한 듯이 표정을 찡그리고 있다.
만약에 정말로 부길드 마스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금 쌓아두고 있는 분노의 화살이 불특정다수를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싸늘한 표정으로 엘프 쪽의 진영을 힐끔거리는 정하얀 님을 보며 갑작스레 이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나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 * *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야 물론 사랑하고말고.’
가끔 정신을 놓으며 돌이킬 수가 없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를 묻는다면 당연히 좋아하는 쪽이다.
1회 차 가면 쓰레기에게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가지고 있고 2회 차에서의 일 역시 일말의 책임감 정도는 느끼고 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것도 마음에 들고 최근 행보는 제법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사랑이지, 뭐.’
물론 최대한 내 말에 신뢰감을 주기 위한 메소드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당연.
어째서 엘레나가 이런 걸 물었는지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엘레나 역시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여신의 거울로 그 장면을 봤다면 나와 정하얀을 그저 사이좋은 오빠 동생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 굳이 이 건에 관해서 물어온 이유는 그녀 자신이 내 입으로 확인 받고 싶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뻔하지 뭐.’
“그, 그렇군요. 역시….”
“네.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 같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단 둘은 아니었지만 던전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었죠.”
“아….”
확연히 어두워지는 얼굴.
표정을 관리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는 모양.
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어느 정도까지 넘어온 건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이쪽은 종잡을 수조차 없다.
여러 가지 떡밥을 뿌려 던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감내하는 것은 그녀의 몫.
계시라는 소재가 들어간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마음고생하고 있을 엘레나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양심이 콕콕 찔려오기는 했지만 이미 쏘아올린 공을 다시 집을 수 있을 리 만무.
나는 네가 왜 이런 걸 물어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도 힘들다.
‘연기하는 것도 쉽지 않네.’
하지만 적성에는 맞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입을 여니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 물론 아직도 귀는 떨리고 있다.
“부족한 제 옆에 항상 있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쭉 함께였지만 마땅히 해준 것도 없고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웃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고 가끔은 화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데 그마저도….”
“네. 저, 정하얀 님은 무척 아… 름다우시죠. 영혼 역시 사랑이 흘러넘치시고요.”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기는 합니다.”
“네?”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혹시 엘레나 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정확히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지.”
“신께서 미리 저희의 운명을 점지해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무, 물론입니다. 저 역시 계시를 받고….”
“하하. 제가 말씀드리는 건 엘레나 님이 말씀하신 거창한 이야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엘레나 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조금 보잘 것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대륙에 얼마나 많은 이방인과 대륙민이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괜스레….”
“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운명이라는 것 말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하얀이와 만난 일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수많은 사람 중, 그녀를 만나고 또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분명히 우연이 아닐 겁니다.”
“…….”
“제가 온 곳에서는 이런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요. 아마 그녀와 저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요.”
“네… 네….”
엘레나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무언가 죄악감에 휩싸인 느낌.
조금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마이너스한 에너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
그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표정이다.
‘성공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조심스럽게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
“그, 그렇지만. 무,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
“그런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 신의 뜻이라는 건 그렇게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엘레나 님. 혹시나 제가 실례되는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닌지…. 다소 민감한 내용이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엘룬님의 교리에 대해서는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터라.”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영 님. 네.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오라… 교리와 다르다는 것이 아니오라 무, 물론! 정하얀 님과 이기영 님과의 관계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혹시나 이기영 님께서 신의 뜻을 왜곡하실까 걱정돼서….”
장담컨대 나보다는 그녀가 신의 뜻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지, 직접 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네. 분명히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신해서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하, 하지만 이기영 님께서는 저와는 조금 다,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을 전파하는 입장에 계시는 만큼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되지 않을까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린 겁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그… 제가 건방졌다면….”
“아닙니다, 엘레나 님.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엘레나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조금 경솔했습니다. 신의 뜻을 왜곡해서 일어난 종교적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우려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네. 네! 그, 그것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제법 표정이 어둡다.
횡설수설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이 뜻하는 바는 그거다.
‘정하얀과 내 만남은 운명이 아니라는 거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돌려 이야기했지만 핵심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제법 귀여운 사고방식.
내 눈에는 조심스레 의도한 대로 와주는 게 귀엽기만 비쳤지만 그녀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죄악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그거야.’
쓰레기가 되는 방법은 간단.
자기 자신이 쓰레기라는 걸 인지하고 그 죄악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첫 번째다.
그걸로 죄악감을 느끼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든.
우선순위는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엄연히 그 다음 챕터도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조금 더 쉽다.
‘합리화하게 되거든.’
인간이나 엘프나 다르지 않다. 생각하는 모든 동물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어 있다.
순진한 엘레나 공주처럼.
잘못이나 부정적인 에너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