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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60화 (359/1,590)

# 360

회귀자 사용설명서 360화

엘룬 쓰레기(1)

물론 내 말이 전부 옳다는 건 아니다. 사실 이건 내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사람마다 케이스는 확연히 다르니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행동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본 적이 없어서 문제지만….’

대륙이나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애초에 성악설을 믿는 이쪽은 후자보다는 전자가 설득력이 높게 느껴진다.

물론 그녀가 후자의 타입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전자다운 행동을 할 거라 믿는다.

후회할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글러먹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진짜 성인은 애초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도 않는다.

‘아암. 그렇고말고.’

내가 기대한 것처럼 금방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지만 이쪽을 바라본다거나 혹은 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기색을 내비칠 때마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양심에게 응원을 보낸 것은 당연지사.

‘이제 그만 버틸 때도 됐다. 화끈하게 포기해라!’

라든가.

‘이제 그만 쓰러져라. 엘레나의 양심아!’

같은 응원이었다.

에베리아 왕국에 남은 마지막 양심답게 저항이 꽤 거칠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녀와 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엘레나는 현명한 선택에 한 발 더 내디딜 것이다.

그 날로부터 하루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날 때까지 엘레나는 제법 말을 조심하게 됐다.

사실 나는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은근슬쩍 정하얀의 이야기를 주도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그녀가 민감해할 운명이니, 계시니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 뱉지는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의 대화를 진행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상당 부분 찝찝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라트의 내부 탐험을 하는 와중에도 엘레나는 점점 더 내게 달라붙어오고 있는 중.

솔직히 개인적으로 준비한 다른 일련의 작업들은 전부 필요 없게 느껴질 정도.

물론 엘레나가 티가 나게 나에게 추파를 뿌려댔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처한 상황이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엘레나 자체가 그럴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저쪽은 먼저 유혹하기보다는 상대를 계속해서 기다리는 쪽.

하지만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항상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만큼, 여러 가지 행동을 함께하는 만큼 스킨십 같은 것은 불가피하다.

심한 경우에는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도 함께 있어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실제로 내가 엘레나에게 정이 갈 정도였으니 그녀가 나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배경과 상황이 엘레나 러브 이기영 운명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점점 더 나와 그녀가 극한의 상황에 마주하며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만큼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밀고 있는 정하얀 이기영 운명론을 부정하고 싶어질 것이다.

생각대로 그녀가 정하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그날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부정하는 대신 합리화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합리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어쩔 수 없는 거야.

혹은.

이게 올바른 길이야.

아직까지 얼굴에는 죄악감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처음에 비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엘레나 200년 인생을 통틀어 처음 타인을 음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너무 하수처럼 보여 귀여워 보였을 정도.

아니나 다를까 옆쪽에서 굉장히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고개를 돌리자 못된 마음을 먹은 엘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귀를 연신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슬슬 시동을 걸 생각인 모양이다.

이미 우리가 있는 위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여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 명예추기경님.”

“네, 엘레나 님.”

“여, 역시 정하얀 님께서는 조금 질투가 심하신 겁니까?”

뜬금없이 이딴 걸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미 하수라는 증거라는 거다.

여우짓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어색한 연기에는 기가 찼지만 이쯤에서 한 번 속아 넘어가 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번 귀가 움찔거려왔다.

“사실 조금 심한 정도가 아닙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다른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모습도 귀엽게 비치기는 하지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애초에 조금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그렇군요. 역시 질… 투심이 많은 여성보다는 이해심이 너, 넓은 여성이 더 이상형이라 생각하시는 건지….”

‘그건 이지혜 사고방식이다, 야.’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냐 아니냐를 설명하자면 당연히 이해심이 넓은 쪽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러 사람을 만나는 만큼 이성, 동성의 만남을 구분 지을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 그렇군요.”

“네. 한데 그건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딱히… 그저 제가 정하얀 님의 영혼을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것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저번에는 분명히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이라고….”

“무, 물론 정하얀 님께서는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을 가지고 계시지만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부분도 존재합니다. 순… 수하지만은 않은 영혼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지…. 자세하게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이기영 님께서 모르는 부분이실 겁니다.”

‘제대로 때려 맞췄네. 돗자리 펴라.’

“혹시나 하얀이도 악마에게 영향을….”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그렇지는 않아요. 그, 그건 오롯이 정하얀 님의 본성이라….”

“그렇군요.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로 신기합니다. 타인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 혹시 서로 잘 맞는 영혼들도 구별할 수 있는 겁니까? 예를 들면 영혼의 파장이 잘 맞는다거나 서로 궁합이 좋다거나.”

“물론입니다. 아주 딱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저와 하얀이는 어떻습니까?”

순간적으로 들어온 질문에 고민하는 저 얼굴이 정말로 재미있다.

현재 내가 처해있는 힘든 상황을 응원이라도 해주는 것 같은 느낌.

찔려오는 양심과는 반대로 괜스레 가슴은 두근거린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순진한 엘프의 모습은 가관.

하지만 결국에는 눈을 꽉 감고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번에도 그녀는 양심을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실… 망할지도 모르시겠지만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안 맞는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정… 확합니다.”

일을 저지르고 난 이후에야 어두워지는 얼굴은 더 중독성 있다.

순간적인 욕심을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후회하지 않게 도와주는 게 이쪽의 역할.

자신의 양심을 배신한 결과가 고통이 아닌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일류 쓰레기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 저와 엘레나 님은 어떻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조금 무례한….”

“아닙니다. 네. 그런 표현을 한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조금 놀라서… 네. 다, 답을 드려야지요.”

“…….”

“부끄럽습니다만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네.”

“영혼의 파장은 굉장히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궁합이 좋냐 좋지 않냐를 물어보시는 거라면 단연코 좋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나를 처음 봤을 때 안에 있는 것을 시원하게 게워낸 건 이제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 헐레벌떡 받아드는 꿀을 핥아 먹는 모습이 제법 재미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난다면 조금 아쉬운 것이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마 조금 더 받아먹고 싶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난 죄책감에 발라야할 연고도 좀 필요할 테고 마실 물도 조금 필요할 것이다.

“엘레나 님의 말씀대로라면 혹시 엘룬 님께서 내려주셨다는 계시가 전혀 다른 내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하.”

“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그럼 슬슬 다시 이동해야 되겠군요. 기왕이면 하루 더 묵어가고 싶지만 심장까지는 아직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명예추기경님, 그보다 아까 해주신 말씀은….”

“하하.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나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현재 저희가 처해 있는 상황도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은근슬쩍 아련한 눈빛을 발사.

마찬가지로 엘레나의 눈 역시 아련함을 한 스푼을 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는 않았다. 부수적인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입장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

“네.”

“아마 내일이면 주요 기관이 있는 쪽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추측이 옳다는 가정 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아마 생각하시는 바가 맞으실 겁니다. 이곳까지도 별 탈 없이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데 만약 주요기관 쪽에 도착하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물약이나 엘레나 님의 신성력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보통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공격에 취약할 테니까요. 언제 일행이 도착할지 모르니 준비는 미리미리 해놔야겠지요.”

“역시… 계속 연금술을 공부하신 것도 전부 그 연유 때문이었군요.”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에도 베니고어 여신님께 새로운 힘을 얻기도 했지만 병상에 누워 있느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이기영 님께서도… 신탁을 받으셨군요.”

“아.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나 보군요.”

“네.”

“일개 연금술사에 불과하지만 여신님의 배려 덕분에 과분한 힘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어!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니가 무슨 수로?’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와 꽂힌다.

하지만.

문뜩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니 어쩌면 정말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거 정말 선물인 거 아니겠지?’

그녀가 받았다는 계시를 생각하니 한 번 더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어쩌면 엘레나는 엘룬이 내게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 가정이 맞다면 조금 더 즐거워지는 상황이다.

엘룬 이 자식이 생각보다 더 비정한 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키야. 이 자식도 진짜 쓰레기네.’

설마하니 자신의 딸을 넙죽 넘겨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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