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회귀자 사용설명서 362화
엘룬 쓰레기(3)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고요.’
마음속까지 빛으로 깨끗해지는 듯한 기분.
빛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덕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이쪽에 돌아오는 게 있게 마련.
절로 입가에 웃음이 머무른다.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준신화 등급의 퀘스트가 고작 오른손 들기라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손가락 펴기가 아닌 게 다행이다.
비장한 표정을 유지하며 살며시 오른손을 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즐거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준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오른손 들기(1/1)]
[퀘스트 완료 보상]
[빛 폭탄 물약 레시피]
[신성력이 첨가된 하이엘프의 눈물(0/1) 세계수의 잎(0/1)]
[준신화 등급 - 빛의 연금술사 전용 촉매.]
그 외 다수의 촉매가 리스트화 되어 좌르륵 보인다. 몇몇은 확실히 이쪽이 보유하고 있는 게 맞다.
물론 가장 중요한 두 개가 빠지기는 했지만 분위기를 보니 이미 엘레나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세계수의 잎 역시 그녀가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여신님께서 이런 쓸데없는 레시피를 던져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지금 상황에서 쓸 만한 레시피를 던져줬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이거 혼자서 했으면 절대로 성공 못 했겠네.’
세계수의 잎이 재료로 들어가는 사실 이전에 레시피 자체가 무척이나 복잡하다.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대충 던져보는 식으로 만들어서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종류의 레벨이 아니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쓸데없는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가는 아까운 촉매들만 날아갈 뻔했다.
‘몇 년은 걸렸겠는데.’
심지어 내가 사용한 적이 없는 기법들 역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보통 연성진이나 촉매를 다룰 때는 마력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테면 연금술이라는 자동차에 마력이라는 기름을 넣는 거라 설명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빛의 연금술은 마력이 아닌 신성력이 기름이며 연료다.
기존의 것과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리라.
‘혹시나 했었는데. 정말로 맞긴 맞았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대충 한번 시도해 본 게 이렇게 잘 풀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시 한번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은 당연.
역시 나의 사랑스러운 베니고어 여신님이 항상 우리를 지켜봐주고 계시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거지! 바로 이거지!’
내 가설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당연하다.
이 대륙은 몇몇의 신에 의해 보호되고 있고 퀘스트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자신들의 뜻을 전달한다.
너무나 깊숙한 개입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고 그들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페널티를 받는다.
어쩌면 김현성을 회귀시킨 알타누스라는 자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페널티를 받았을 확률이 크다.
방금 걸로 베니고어 여신 역시 뼈아픈 출혈이 있었을 테고….
물론 내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쪽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며 행복회로나 돌리면 된다는 거다.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자 엘레나가 궁금한 듯 이쪽을 보았다.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좋은 소식은 나누면 배가 된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우며 확실한 단어. 이 말만큼 안심이 되는 소리가 또 없다.
“네?”
“일단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당장 제가 필요한 것은 신성력이 들어간 하이엘프의 눈물과 세계수의 잎입니다. 혹시 엘레나 님이….”
“에베리아 왕국의 엘프라면 모두가 세계수의 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 엘레나 님의 눈물이 들어간다면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촉매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기영 님, 무엇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조금만 천천히 상황을….”
“설명은 이후에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베니고어 여신님께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어째서 엘레나 님과 제가 만나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재료 조달 노동자와 사장님의 관계.
핫산과 사장님.
하지만 그걸 그대로 입에 담을 리가 만무하다.
‘비정한 쓰레기 엘룬이 널 팔아 넘겼단다.’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대신 조금 더 달콤한 열매를 던져주는 게 합리적이리라.
어차피 그녀의 일을 해결하는 것도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물론 전부 다 던져주진 않는다.
“어, 어떤….”
“엘레나 님이 제게 꼭… 필요한 사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
원래 달콤한 과실이라는 건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있어야 더욱 탐 나는 법이니까.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아마 내 얼굴에 들어선 표정이 무엇인지 그녀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손을 꽉 잡은 것은 물론 그녀를 갖고 싶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쉬운 엘프의 얼굴이 굉장히 붉어졌다.
아마 눈치가 없지 않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틀림없이 느끼고 있다.
‘아. 드디어 알아줬구나. 깨달았구나. 아니, 깨닫고 있는 도중일지도 몰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긴장했는지 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
하지만 얼굴에는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배덕감? 성취감?’
아마 비슷한 종류일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기쁨에 몸부림치는 표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자신을 원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마 자신이 정하얀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와이프가 있는 남편을 뺏는 불륜녀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더라도 이상하지는 않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게 부정적이라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으면 된다는 거다.
내 손을 꽉 쥔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왠지 모르게 입술을 꽉 다문 모습은 귀엽다.
말은 필요 없다.
엘레나의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척 긴장하고 있는 얼굴. 귀는 추욱 내려갔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다.
언뜻 죄책감이 느껴지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기분 좋은 긴장으로 뒤바뀌리라.
예상했던 대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겼어.’
라든가.
‘드디어 알아주신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아직 승리의 축배를 들기에는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결정타를 날리기에는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
마침 우리들의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힘을 써주신 덕분에 시간 자체도 굉장히 넉넉해진 상황.
조금 정도는 다른 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적당히 긴장이 풀린 게 마치 캠핑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번쯤은 더 갇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천천히 내 팔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진다.
자신을 봐달라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멈칫 하기는 했지만 귀엽게도 다시 한번 몸을 밀착시켜 왔다.
여전히 이래도 되는 것인지 고민 하는 게 포인트.
그렇지만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깨, 깨달아 주셨군요.”
“…….”
“저,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한참 전부터 깨닫고 있었지만 모, 모르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이… 이제는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물론 이기영 님께서 이미 사랑하시는 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조금 갑작스럽습니다만… 엘레나 님 제가 방금 말씀드린 뜻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이기영 님도 이미 아, 알고 계신 걸로 압니다. 틀림없이요.”
‘얘 봐라.’
제법 마음을 굳게 먹은 것처럼 보인다. 덜덜덜 떨리는 다리와 파르르 떨리는 귀가 재미있다.
그 와중에도 이런 말을 해오는 것을 보니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은 과실에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이기영 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지, 지금 한 발 더 내딛지 못하시는 건 분명히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이기영 님은 너, 너무 상냥하시니까요.”
‘그래. 나 상냥하다.’
“이기영 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때는 정하얀 님과 이기영님께서 연결되어 있다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다르다는 걸 깨달으셨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저를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이기영 님. 운, 운명의 상대는… 정하얀 님이 아닙니다. 부디….”
‘오우야.’
내가 그녀를 독려해야 되는 상황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독려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곳에서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럴 시간도 없고요. 그보다 엘레나 님, 조금 흥분 하신 것 같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으시면 아마….”
“아니요. 이런 장소라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이라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저를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제 눈을 피하지 마시고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한다.
얼른 쏟아지는 걸 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부디 바라봐 주세요. 감정을 숨기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
“안아주세요.”
“…….”
“안아주세요.”
한 번 물꼬가 트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절박해 보인다.
떨어질 듯 말 듯한 열매를 바라보며 기도라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이정도로 저돌적으로 달려 들어올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 그녀에게도 꽤 충동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애가 많이 탔던 모양.
떨어지는 과일을 바라보며 허겁지겁 입을 내벌리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그녀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엘레나는 수동적인 면모가 조금은 강하다.
최근에 와서는 조금 능동적인 성격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200년 동안 왕국에 갇혀 있었던 시기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까지 말한다는 건 아마 엘룬 쓰레기가 등을 떠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말씀과 계시라는 게 좋긴 좋다.
상황과 배경의 특수성도 좋고.
‘열매에 독이 들었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네.’
파르르 떨리는 귀.
다가와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것이 보인다.
물론 나는 거부하는 척할 뿐, 거부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는 것은 순식간.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잠깐 찾아온 불청객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야 뻔했다.
아마 엘레나는 중간부터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열매가 생각만큼 달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이 지나 내가 잠을 청하는 와중에도 괴물의 안에서는 그녀가 훌쩍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자신을 합리화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